[100명산을 가다] 점봉산 1424m
함박꽃이 지천이었다. 더위를 피해 점봉산으로 들어갔을 때 그 꽃과 마주쳤다. 순박한 산골 처녀가 밭이랑 갈다 낮선 손님을 보고 허리를 일으켜 환한 웃음을 짓는 것 같았다. 아름드리 거목사이에 자그마한 체구로 뿌리내려 너른 품 벌리고 있는 새하얀 꽃잎은 영락없이 무명 저고리 입은 정갈한 조선 처녀의 모습이었다.
첫눈에 함박꽃에 반한 나는 산에서 내려와 책을 뒤져보고서야 함박꽃나무가 산목련, 개목련, 목란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 꽃 앞에서 이건 산목련이 아니라 함박꽃나무라고 우겼었다. 산목련이 목련과 생김새가 비슷하기는 하지만 목련은 이미 지난 봄에 모두 꽃잎이 떨어지지 않았는가. 저것이 단지 산에 피는 목련이기에 산목련이라 불린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그리고 한자어로 된 산목련(山木蓮)보다 순 한글 함박꽃이 토종 그 꽃의 이미지를 제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 꽃은 산목련이라는 왠지 흔한 느낌의 이름보다 함박꽃나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 같았다. 꽃나무뿐 아니라 우리말의 ‘함박’은 눈과 웃음과 바가지에까지 가서 붙는다. 공통적으로 그것들이 가진 속뜻은 둥실둥실 푸근하고 넉넉하다는 것이다. 초가지붕처럼 둥근 6월의 점봉산에는 함박꽃나무가 참 많았다.
‘이제껏 지도책에도 나와 있지 않은 어느 눈부신 나라 / 이 세상 맨 처음의 처녀 같은 함박꽃 / 그 꽃그늘 아래 / 한 천 년쯤 쉬어가고 싶네. -복효근의 시 ‘함박꽃 그늘 아래서’ 중에서’
이 세상 맨 처음 처녀 같은 산
점봉산(1424.2m)은 영동과 영서에 걸쳐 인제군 인제읍과 기린면을 가르고 북쪽으로는 양양군 서면에 어깨를 대고 있다. 백두대간이 그렇듯 그 용마루에 위치한 점봉산은 옛날에는 남과 북이 아니라 동과 서를 가르는 경계였다. 동서는 막힌 것이 아니어서 바닷바람과 산바람이 만나는 고개는 여럿인데, 그 중 귀둔리에서 곰배령으로 통하는 진동리는 귀둔리 사람들이 양양으로 가기위해 고개를 넘다 잠시 들르던 마을이었다. 진동리는 한때 산골 치고 꽤 컸다고 하는데 점봉산 정상을 기준으로 서쪽과 북쪽의 급경사에 비해 남동쪽에 완만한 고원의 형상을 하고 있어 일년 내내 물이 마르지 않아 화전을 일구며 살기 좋았을 것이다.
그 주변의 지명에서 당시의 풍성했던 흔적들을 찾을 수 있다. 진동리 앞을 흐르는 강선골과 너른골은 어떤 지도에는 강선리와 너른리로 표기되어 있는데 예전에는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진동리’라는 행정구역상의 이름 말고도 그 안에 포함된 두 개의 골짜기가 ‘리’로 불린 까닭은 그 안에 마을 하나를 이룰 만큼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는 증거일 테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겪으며 ‘리’는 결국 ‘골’이 되었다. 사람들이 산을 떠난 것이다. 지금도 녹슨 총탄이 흔하게 발견될 만큼 치열한 격전지였던 점봉산 일대는 휴전 이후 남한 땅이 되며 농민수복령(農民收復令)에 따라 1954년까지 미 8군에서 군정을 실시했다. 1945년 분단 이후 9년 만에 정식으로 한국정부의 행정권이 미치는 땅이 되었지만 떠난 사람들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1970년대 들어 화전민을 이주시키며 현재 그곳에는 50여 가구가 흩어져 살지만 그 중 토박이는 5가구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 근래 들어 공기 좋고 살기 좋은 자연을 찾아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다.
백두대간이 성처럼 둘러싸여 천연의 요새같은 그곳을 두고 사람들은 ‘하늘마을’이라고 부르곤 한다. 해발 750m의 평탄한 고원은 교통편이 쉬운 오색에서 시작해 급경사를 헐떡이며 올라온 등산객들이 산마루에 닿는 순간 천상세계에 온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하늘마을 곁에 그들의 ‘여신산(女神山)’인 점봉산이 있다. 바위가 많은 강골의 설악은 남신(男神)으로, 전형적 육산인 넉넉한 점봉산은 여신으로 여겨진다. 여신에게서 흘러내린 강선골과 너른골의 물줄기는 방대천(芳臺川)이 되어 소양강으로 내려가는데 그 길이가 30여km에 달해 평야가 아닌 산을 흐르는 계곡으로는 남한에서 가장 길다고 한다.
가장 가까운 도시인 인제군 현리까지도 차로 1시간을 가야하는 진동리는 지금과 같은 비포장이 섞인 도로가 놓이기 전인 1990년대 초반까지도 지독한 오지의 대명사였다. 그래서 진동리 사람들은 가장 가까운 단목령을 넘어 오색리로 바깥세상과 통했고 행정구역상 인제군이지만 실제 생활권은 양양군에 가까웠다고 한다.
이렇듯 교통이 불편한 탓에 사람의 손을 덜 타고 수백 년간 화재나 수해를 입지 않은 탓에 이제 점봉산의 얼굴처럼 되어버린 울창한 숲은 보존될 수 있었다. ‘남한의 허파’라거나 ‘야생화의 천국’과 같은 점봉산의 생태를 잘 드러내주는 말들은 1982년 설악산과 점봉산 일대가 유네스코가 지정한 ‘생물권 보존구역’이 되며 한층 빛을 더했다. 점봉산 일대에 펼쳐진 원시림은 남한 최대의 활엽수림이라고 하는데 산정에는 곰취, 곤드레, 참나물과 같은 10여 가지 산나물이 자생한다. 특히 점봉산은 한반도에서 자생하는 식물의 남북방한계선이 맞닿는 곳으로 4000여 한국 토종식물 중 약 20%인 850여 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그 중 희귀․보호식물이 50여 종에 달해 단위 면적당 가장 많은 식물이 살고 있는 ‘식물 박물관’이다. 모데미풀, 한계령풀, 등대시호, 도깨비부채, 두루미꽃 등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종류의 풀꽃들이 사는 점봉산은 1987년 산림청이 유전자원 보호림으로 지정․관리하고 있다. 전형적 육산의 형태를 한 점봉산 남동부의 단목령 일대에는 고층 습원지와 산늪이 발견되기도 해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고갯길에서 멀지 않은 숨은골에는 크고 작은 늪을 많이 볼 수 있는데 4000년 이상 된 것으로 보여 이곳의 생태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볼 수 있는 보고로도 가치가 높다.
하지만 ‘22세기를 위해 보전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지정되기도 한 점봉산의 속살이 세상에 알려지자 최근 외지인들의 무분별한 산나물 체취와 고목 도벌꾼이 몰려들기도 해 산림청에서는 통제소를 설치하고 입산을 금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오색화 전설이 살아있는 산
점봉산은 토박이들에게 ‘덤붕산’ 또는 ‘큰덤붕’으로 불린다. ‘덤붕’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라 발음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추측하지만 점봉산에서는 다른 특이한 지명도 많이 만난다. 곰배령은 바람이 드세어 큰 나무가 자라지 못하고 넓은 초원을 이루고 있다. 우묵한 지형은 누워있는 곰의 배와도 같은데 곰의 배는 다른 부위에 비해 털이 짧은 것이다. 이밖에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넓어진다고 해서 너른골, 그 앞에 가기 전까지는 안 보인다 하여 숨은골 등 한글로 된 지명이 많다. 박달나무가 많아서 단목령(檀木嶺), 호랑이를 사냥하던 홍씨 성을 가진 포수가 살았다 해서 홍포수막터, 주전골에서 위조화폐를 만들던 무리가 망을 보던 곳이라 하여 망대암산 등 옛 지명들은 그만한 전설을 감추고 있다.
주전골 전설은 실제로 점봉산 인근에서 철광석을 녹이다만 쇠 슬러지가 발견되기도 해 사실성을 더한다. 홍포수막터에 살던 포수는 홍씨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도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온다. 정작 움막을 지키던 포수의 견습생쯤 되던 이가 포수 행세를 하고 마을로 내려오곤 해 사람들이 그리 불러주었다는 이야기다. 홍포수막터는 오색리 안터에서 시작해 점봉산을 오를 때 물을 구할 수 있는 마지막 샘터라 등산객들에게 많이 알려졌다.
약수와 온천, 마을 이름에까지 배인 ‘오색’이라는 이름은 오색화의 전설에서 기원한다. 다섯 가지 색의 꽃이 피었다는 오색화는 최근 복원된 오색석사의 앞뜰에서 아직 자라고 있지만 정작 색이 화려한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부처의 가르침을 뜻하는 청색․황색․적색․백색․주황색이 지금 오색이라는 지명의 기원이 되었다고 하는데, 오색석사를 세운 뜻과도 같다고 풀이한다. 불교의 진색(眞色)인 오색은 세상에 살고 있는 각 인종으로 비유되기도 하는데 삶의 다양성을 색으로 풀어낸 것 일게다.
부드러움 속에 강함이 있다 했던가. 점봉산의 남쪽이 둥글고 순하다면 설악과 마주한 북쪽은 협곡과 기암괴석이 솟아 산이 단단한 뼈를 품고 있는 것 같다. 오색약수와 주전골로 대표되는 점봉산의 북쪽은 일찍부터 관광지로 개발되며 사람들의 발길이 잦았다. 하지만 그것은 오색약수 주변에만 국한된 것이어서 지난 2004년 흘림골 등산로 개방 이후 지금까지 3만여 명이 찾았다지만 같은 오색에서 출발하는 대청봉을 향한 긴 행렬에 비할 바는 아니다. 사람의 발길이 적은 이유는 점봉산에 등산로가 개방되지 않은 탓인데 점봉산을 둘러볼 수 있는 길은 현재 흘림골과 용소폭포, 오색약수 등 3군데밖에 되지 않는다. 사전에 신청을 하면 정상에서 한계령에 이르는 자연휴식년제 구간도 선택적으로 입산 허가를 해준다지만 실질적으로 얼마나 효용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500년 전 오색석사의 스님이 발견했다는 오색약수는 탄산과 철분 등 톡쏘는 맛으로 유명한 점봉산의 명소였다. 하지만 1994년 사학연금관리공단에서 오색그린야드호텔을 만들고 탄산온천을 개발해 하루 2000톤의 지하수를 뽑아 쓰면서 2004년부터는 약수물이 나오지 않는다. 500년 동안 끝없이 솟은 물줄기가 한갓 10여년 만에 사람의 손에 의해 말라버린 것이다. 지역 주민들과 해당기관인 양양군청은 탄산온천 허가를 취소하라는 내용의 소송을 제기했지만 지역 개발이라는 실정법을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현재 2심이 진행 중이다. 그런데 어디 사라지고 왜곡되는 것이 말라버린 오색약수뿐이겠는가.
점봉과 설악의 어색한 분단선 44번 국도
점봉산은 한계령길을 기준으로 설악산의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설악으로 분류되곤 한다. 물론 설악산과 점봉산이 한데 묶여 설악산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후의 일이다. 그 선을 서북주능선으로 긋는 경우도 있으나 산이란 ‘솟아오른 것’을 두고 하는 말이기 때문에 능선으로 산을 가르는 것은 여러모로 옳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한계령길을 기준으로 하는 설악산의 남북이란 다분히 사회학적인 기준이라 그 또한 자연의 이치로 놓고 보면 어색한 일이다.
지도를 펴놓고 한계령 도로를 보라. 무수히 끊어져 마치 잘린 낙지 발처럼 제 몸 잃은 계곡과 능선이 얼마나 많은가. 오색약수 주변에도 그런 곳이 많은데 흘림골, 온정골, 독주골, 큰고래골 등 대부분의 계곡이 도로에 의해 끊어져 있다. 능선 역시 마찬가지라서 칠형제봉이라 불리는 암릉의 경우 한계령길에 막혀 만나지 못하는 이산가족 형제 몇을 더 두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한계령길이 산을 가르는 선이라는 기준이 우리 머릿속에 알게 모르게 굳어졌는지 점봉산에 오를 때는 본래의 뿌리가 무엇이었는지를 종종 잊고 화려하고 높은 것만 먼저 찾게 된다. 오색 제2약수에서 왼쪽으로 갈라지는 온정골은 서북릉에서 발원하는 계곡인데도 점봉산이 등 뒤에 있는 탓에 물이 거꾸로 흐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일으킨다. 도로에서 10분이면 닿을 수 있는 용소폭포도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 뚝 떨어지는 이상한 골짜기 형상을 하고 있지만 깊고 투명한 계곡에 눈을 빼앗기다 보면 이 물이 정작 반대편 석고덩골부터 흘러온 것임을 까맣게 잊는 것이다.
60년 전 점봉산은 갈 수 없는 땅이었다. 일제가 쫓겨 간 뒤 들어온 또 다른 외세에 의해 우리나라가 수평으로 잘렸기 때문이다. 북위 38도 00분에서 38도 05분 사이에 위치한 점봉산은 그 시절 남과 북의 치열한 긴장 속에 오히려 적막하던 차가운 선이었을지 모른다. 허나 그 선이 아무리 날카로웠던들 지금의 아스팔트 도로만 했으랴.
점봉산은 남설악이 아니라 점봉산이다. 그것이 우뚝 선 점봉산의 주체성이다. 하지만 또한 설악과 뗄 수 없는 하나다. 그것은 백두대간으로 이어진 점봉산의 인연(因緣)과 관계다. 문명의 파헤침에 끊어진 산은 돌이킬 수 없지만 크고 작은 골짜기는 오색천으로 하나 되어 설악과 점봉을 싣고 동해로 잘도 흘러가지 않는가. 머릿속에 어색한 분단선을 지우는 일은 점봉산을 대하기 전 첫째로 할 일이다.
그대는 아는가 함박꽃 피는 나라를. 함박꽃은 1991년 지정된 북한의 국화다. 점봉산에서 마주친 순한 함박꽃향기를 나는 잊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