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 없던 마을 내원마을의 기억, 대전사~내원마을~가메봉~절골~주산지
봄이 도시를 떠나 산으로 숨어들었다고 했다. 그곳은 청송 주왕산 하고도 아주 깊은 골짜기라고 했다. 봄을 찾으려 서울에서 중앙고속도로를 따라 달리는 길은 절로 휘파람이 나오게 상쾌했다. 십수 년 전만 해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깊은 오지의 대명사였던 청송은 새로 뚫린 길 덕분에 그 이미지를 조금씩 벗고 있는 것이다. 이제 어디에서든 한나절이면 닿을 수 있는 주왕산은 청송군에서 ‘산악스포츠 메카 구축’을 통한 ‘웰빙산업 기반조성’을 군정장기발전전략으로 내놓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하지만 ‘스포츠, 메카, 웰빙’이라는 활력적이고 상큼한 단어들이 담아낼 수 없는 산의 외진 곳에 봄이 있을 것 같았다.
대전사로 올라가 내원마을을 거쳐 절골로 내려오는 계곡산행은 아침에 출발해서 한나절이면 충분할 거리였지만 하룻밤을 산속에 머물며 느릿느릿 봄을 찾아볼 생각으로 오후가 한참 지나서야 매표소를 통과했다. 떠남에 앞서 들은 “이 땅에 오지란 있을 수없고, 그곳은 ‘전기 없음’을 파는 마을일 뿐”이라는 건조한 이야기들은 오히려 내원마을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크게 했기 때문이다.
봄을 찾아 떠난 발걸음
대전사에서 시루봉에 이르는 주방동은 땅이 잘 다져져 있는 산책로다. 5월이 되면 계곡을 따라 수달래가 흐드러지게 꽃을 피운다지만 아직 무엇이 수달래고 철쭉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앙상한 가지뿐이다. 수달래꽃이 필 때 즈음 사람들은 물가에 나와 정성으로 제를 올린다. 수달래는 청운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은 주왕의 피가 섞여 붉어졌다는 전설이 있다는데, 제를 올리는 청송사람들에게 주왕이란 단지 여름밤에 전해 들은 전설 속의 인물이 아니라 모두의 가슴에 깊이 자리 잡은 미륵이라서 일까. 수달래에 한눈팔다 보니 애꿎은 아들바위만 얼마나 돌 세례를 많이 받았는지 껍질이 다 벗겨져 속살이 하얗게 드러나 있다. 아들바위는 조약돌을 왼손에 들고 다리사이로 던져 그 위에 얹히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시원하게 뚫린 주방동 산길은 시루봉에 들어서 작은 오솔길로 바뀐다. 거대한 기둥처럼 솟아있는 협곡은 비로소 사바세계와 극락정토를 가른다. 그것은 산문 밖 인간의 봄과 산속 자연의 봄을 가르고 서있는 일주문 같다. 지금과 같은 튼튼한 나무다리가 없었던 옛날에는 그 협곡사이로 떨어지는 폭포가 신선계로 들어가는 문짝 역할을 했으리라. 그리고 그 문을 여는 열쇠란 당신의 마음 깊은 곳에 무성히 자란 원시림과도 같을 것이다.
‘전기 없는 마을’ 표지판을 따라 내원산방에 도착하자 마침 저녁 밥상을 차리고 있는 중이었다. 시간은 아직 밥때가 되지 않아 시장기가 오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했지만 차려놓은 밥상을 마다하기도 어려워 죽 한 사발과 봄나물을 앞에 두고 앉았다. 폐교를 개조해 만든 내원산방은 주왕산 곁에서 평생을 지내온 이상해(47세)씨와 그의 가족이 산다. 그곳은 정말로 전기가 없기에 그들의 하루는 해가 저물기 전에 모두 끝난다. 남은 볕이 들어오는 문 옆에 모여 앉아 저녁을 마치자 어스름이 지기 시작했다.
내원마을의 ‘내원’은 다분히 불교에서 옮아 온 것일 테다. 석가모니가 태어나기 전까지 살던 곳, 미래불인 미륵보살이 성불을 기다리는 곳인 내원에 부처 아닌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고려 중기부터라고 한다. 천상의 오지에 처음 흘러들어온 사람은 하필이면 도적떼였는데 결국 고려 원종 때 임지한 장군을 앞세운 ‘범죄와의 전쟁’ 끝에 모두 일망타진된다. 그리고 남은 잔병들이 신분을 숨기고 골짜기에 은신한 것이 내원마을의 기원이 되었다고 역사는 전한다. 씁쓸한 시작이 되었던 내원마을에도 ‘봄날’은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주왕산 일대에 참나무를 벌목해 목탄을 생산하는 공장이 들어서고부터다. 한때 100여 가구가 넘게 모여 살았다는 이곳은 일제가 패망하고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빨치산의 은거지가 된다는 이유로 강제 철거되어 10여 가구까지 그 수가 줄었으나 전쟁 이후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모여들어 주왕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전에는 분교가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살았다. 주왕산초등학교 내원분교는 1970년 개교해서 1980년 폐교하기까지 79명의 학생이 졸업했다. 그리고 마을의 유일한 콘크리트 건축물인 그곳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10여 년 전부터 이상해 씨 가족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주왕산의 뼈골을 보았는가
“손님방에 군불 넉넉히 넣어주라고.”
산에서 나무 하나라도 공짜로 배달되는 것이 아닌데, 후한 인심에 당장 나가 도끼질이라도 거들어야 할 것 같았다. 어둠이 내린 산속의 밤은 고요하거나 은은하거나 맑은 깨달음 같은 것이 아니라 ‘심심할 뿐’이었다. 심심하던 차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전기가 없다더니 웬 전화란 말인가?’ 통화를 끝내고 온 이상해 씨는 지난 태풍 루사 때 마을이 수해로 고립된 이후 전화선을 끌어왔다고 설명한다. 그것도 완전히 합법적인 것이 아니라서 아래 대피소까지만 가능한 일이었고 마을까지 1㎞는 직접 가설한 것이다. 하지만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뿐이던 내원마을에 전화벨소리는 쉽게 어울릴 수 없는 것이라 마을 사람들은 공연한 근심 하나를 더 들여놓은 것 같다. 전기가 없다는 것은 단지 전기뿐 아니라 그와 관련된 모든 문명의 혜택이 전해지지 않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미개함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안다. 그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 또는 ‘살아가며 과연 무엇이 필요한가?’를 스스로에게 묻는 일이다.
내원마을은 이제 사라질 처지에 놓였다. 관에서는 유산객들을 상대로 음식을 팔고 방을 내주는 것이 환경보전에 역행하는 일이라며 마을 사람들이 얼마의 보상금을 받고 산 밖으로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지만 지난 역사처럼 억지로 내쫓지 않아도 평생을 이곳에서 살다 이제 노인이 된 대부분의 마을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모습을 감출 것이다. 그들이 가고 난 자리에 그들의 후손은 돌아오지 않을 테니 내원마을의 영화도, 추억도 모두 전설이 되고 이 시간 불이 꺼진 정적도 고스란히 땅에 묻힐 것.
<하늬바람/눈비 뚫고/찾아온 길손//내원골에/뿌리박고 싶다면/가난은 천직으로/삼아야 한다… 가난도 욕심이라며/웃어야 한다-이준상의 시 ‘내원 입문’ 중에서>
날이 밝음과 함께 밥 한술 뜨고 더 깊은 산으로 발길을 옮긴다.
“지금쯤 올라가야 주왕산의 뼈골까지 볼 수 있을 거요.”
산 중턱까지 배웅 나온 이상해 씨의 말은 숨이 턱에 차도록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아직 잔설이 남아있는 응달을 지나 눈 녹은 물이 질퍽한 능선에 올라설 때까지 짙노란 봄은 고작 생강나무 끝에나 달려있었다. 화사한 색이 곧 봄이라 믿는 부류에게는 능선너머 대문다리까지 이어지는 흙먼지 내리막길이 지루하기만 했다. 산길이 계곡을 만나자 길은 사라졌으나 사라짐이 막힘은 아니었다. 물이 흐르는 곳이 곧 사람이 갈 길이었는지라 어느새 봄 따위는 까맣게 잊은 채 발끝이 물에 젖지 않도록 징검다리를 건너뛰는 일에만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절골의 이름이 되는 옛 절터가 나오자 깨진 기와 몇 조각이 발길에 차였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가위질을 하며 물길을 따라 건넜다. 건너다보니 처음 산문을 열고 들어왔던 기둥 같은 협곡이 곧 산 밖으로 빠져나가는 출구인지도 모른 채 허둥지둥 몸을 날린 것이었다. 비로소 뒤를 돌아보았으나 봄은 저 멀리 산속 깊은 곳에 몸을 숨기고 있을 터,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하산을 시작한 사람의 봄만 가득한 것이었다.
안녕, 봄이여
봄이 늦어진다. 개화시기를 알리는 그래프 끝에 달리는 날짜가 예년에 비해 며칠씩 뒤로 미루어진다. 뒤로 미루어지는 날짜만큼 사람들의 봄도 뒷걸음질 친다. 기대만큼 선뜻 다가오지 않는 봄은, 봄맞이 축제가 무산되었다거나 계절 옷이 팔리지 않아 울상이라는 어두운 모습을 하고 신문 한 귀퉁이에 부고처럼 실리곤 한다. 날짜 지난 건조한 신문지처럼 한 장 한 장 푸석거리던 시간이 뽀얀 는개에 젖어들면 아무도 믿지 않았던 예수의 환생처럼 봄은 갑자기 겨울의 커튼을 젖히며 세상에 나타난다. 하지만 아무런 전주도 없이 불쑥 도시로 찾아온 봄은 진땀을 흘리며 매캐한 황사 먼지에 숨을 헐떡이는 고난의 시간을 겪는다. 꽃샘추위야 어느 해라도 찾아와 봄을 실컷 두들기고 지나갔지만 이제는 그 추위가 잦아들고 난 자리에 꽃망울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기도 전에 ‘잘 가라 겨울’을 환호하듯 도심의 분수가 샴페인처럼 터져 나오니까. 사람들은 솟구치는 분수 앞에서 어느새 까마득히 봄을 잊고 따가운 여름을 떠올린다. 은근한 봄, 미지근한 봄, 느릿한 봄 대신 매서운 겨울 아니면 화끈한 여름이 발 빠르게 도시를 접수해 간다. 느릿느릿 소달구지에 실려 고개를 넘는 야윈 얼굴의 내 애인 같던 봄은 겨울과 여름이 각축을 벌이는 사이 신작로를 벗어나 외딴 산길로 향한다. 그리고 산속에 숨어버린 봄은 다시 벙어리 가슴으로 일 년을 기다려야 할 전설이 되고 만다. 병든 봄이 그리운 나그네는 아지랑이 같은 전설을 찾아 산으로 발길을 옮기기도 하는데, 그곳엔 벌거벗은 골짜기 말고는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다. 안녕, 봄이여.
2005.4
*전기 없는 마을로 유명했던 내원마을은 2007년 국립공원공단에서 마을 사람들을 이주시키고 생태문화 휴식공간으로 조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