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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준 Oct 19. 2024

잉태한 여인의 배를 오르다

100명산을 가다 - 원주 치악산

어느 해 늦은 겨울이거나 아니면 아주 이른 봄으로 기억한다. 금요일 늦은 귀갓길에 청량리역을 지나다 원주행 통일호 열차에 훌쩍 올랐던 그때 말이다. 주말인 탓에 객차는 발 디딜 틈이 없었지만 찬바람이 낡은 문틈을 비집고 쉴 새 없이 들이닥치는 통로는 한산했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추위를 쫒던 시간 그곳에는 두 명의 사내가 더 있었는데 때 묻은 야구가방을 들고 있는 그들이 노숙자라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때 즈음 청량리역 광장에는 그들처럼 날지 못하는 ‘무적(無跡)의 비둘기 떼’가 넘쳤기 때문이다. 

그들도 원주로 가는 길이었다. 거기가 치악산 기슭이라고 했다. 둘은 청량리역 광장에서 만난 사이라고 했는데, 한 사람은 간질을 앓고 있는 듯했다. 전라도가 고향인 그가 연신 “이것이 마지막이여”라는 푸념과 함께 소주를 삼키던 중 갑자기 발작을 시작하자 다른 한 사내는 마치 비상시 행동요령을 따르듯 익숙하게 그를 눕히고 어머니처럼 무릎베개를 해 주었다. 그때 가방에서 헌 옷가지와 함께 빨간 통에 담긴 초등학교 졸업장과 빛바랜 흑백 가족사진이 굴러 떨어진 것이었다. 태어난 고향은 달랐지만 서울에서 만나 또 다른 삶터를 찾아 떠나는 철새의 무리 같던 그 둘의 동행은 마치 유년의 고향까지도 고스란히 원주행 열차에 싣고 가는 것 같았다. “이것이 마지막”이라던 그들이 지금까지 병풍처럼 둘러진 치악산 기슭에 등을 대고 사는지는 알 수가 없다. 값싼 웃음의 여인네가 손목을 끄는 원주역전의 7000원짜리 여인숙을 뒤로하고 그들과 헤어져 늦은 밤 운동화 차림으로 겨울산을 헤맸던 나는 결국 ‘치가 떨리고 악이 받히는’ 기억만을 남긴 채 다시 지친 서울로 송환되어 왔으니까. 그런데 그들은 왜 치악산으로 가야 했을까.      


텃세 없는 충절과 보은의 땅 원주

서울을 떠난 그들이 제3의 고향으로 삼고 싶었던 원주. 치악산(1288m)에 기댄 그곳은 중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듯 오래전부터 군사도시로 불렸다. 지금 원주에는 1954년 발족한 1군 사령부와 주한미군기지 등 수많은 군사시설이 여전히 존재한다. 때문에 ‘생산’보다는 ‘소비’가, 문화의 향기보다는 군화발자국 소리가 더 돌출된 이미지로 굳어져 온 것이다. 군대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국가의 존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뜻일 텐데 원주가 교통의 요지인 까닭이다. 

강원도에서 가장 교통이 발달했다는 원주는 영동고속도로와 중앙고속도로가 만나고, 중앙선과 태백선 철도가 지나며 원주공항도 있다. 남한강의 댐들이 가로막기 전에는 물길을 따라 서울까지 직항하는 뱃길이 나있어 고려시대 영서지방에서 모인 세금을 저장하던 창고인 흥원창(興元倉)에는 쌀 200석을 실을 수 있는 큰 배가 21척이나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500여 년간 지금의 도청 격인 강원감영이 있었던 원주는 이렇듯 정치사회적으로 중요한 땅인 탓에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지만 그만큼 외침도 많았다. 삼국시대부터 번갈아가며 백제, 신라, 고구려 땅이 되었던 원주는 역사 이래 지금까지 933번이나 외부의 침략을 받았다고 한다. 혼란 속의 민중이란 색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곧 삶을 지키는 일이었을 것이다. 어디를 가도 “나 원주 사람”이라며 흔한 고향 자랑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긍정적 의미로 보면 그 땅에서 발현한 그런 삶들은 원주가 외지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좋은 텃세 없는 땅으로 자리 잡는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여러 사람이 어울릴 수 있었던 땅이라 해서 그것이 아무에게나 옷고름을 풀어헤치는 흥청망청한 것은 아니었다. 고속도로를 타고 원주시내에 들어서면 ‘충절과 보은의 도시’라는 입간판을 볼 수 있는데 원주는 933번의 외침을 겪으며 밖으로는 부드럽지만 내면은 단단한 외유내강의 노하우를 갖게 된 것이다. 

역사적 사실에서 ‘충절과 보은’의 뿌리를 찾을 수 있는데 그 흔적이란 대부분 치악산과 함께 한다. 원주시 판부면 금대리에서 계곡길을 따라 한참을 오르면 영원사라는 절이 나오고 그 위로 가파른 비탈을 따르다 보면 화강암으로 된 산성길과 만난다. 몇 해 전 원주시에서 복원을 마친 영원산성인데 그 규모에서 공사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짐작이 갈 정도로 사람들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인적도 드문 산길에 왜 그렇게 공을 들여 산성을 복원했는지, 그 이유는 누구나 때마다 죽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듯 바로 원주 사람들의 뿌리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도 기록이 나오는 영원산성은 그 형상으로 보면 전형적인 피란성이다. 하지만 고려 충렬왕 17년 우리나라를 침략한 칭기즈칸의 합단(哈丹)군에 저항해 군사를 일으켰던 원충갑이 4일간 격렬한 게릴라전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전쟁 이후 원춘갑은 장군 벼슬을 받고 나라에서는 원주 땅에 3년간 세금을 물리지 않았다. 

영원산성에서는 임진왜란 때도 충․절․효가 함께 이루어진 일이 있었는데 원주역 광장에 있는 ‘김제갑 목사 충렬비’에서 그 역사를 찾아볼 수 있다.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에 맞서다 영원산성에서 전사한 김제갑 원주목사와 뒤를 이어 군사를 지휘하다 죽은 그의 아들 시백, 그리고 남편과 자식의 죽음에 할복자살로 순절한 부인 이 씨의 일화는 치악산의 날카로운 발음처럼 원주의 정신을 파고든다. 

이런 잦은 난리통에 벌어진 장렬한 모습이 아니더라도 태종 이방원의 스승이었던 운곡 원천석이 두 나라의 왕을 섬길 수 없다 하여 은거했던 치악산 변암과 태종대, 그리고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망왕봉에 올라 매일 단종이 유배 간 영월 쪽으로 삼배를 올렸던 원호 등 원주와 치악산에는 절의를 지킨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내려온다. 천주교 원주교구장을 지내며 한국의 민주화에 앞장섰던 지학순 주교와 사회운동가 장일순, 시인 김지하 등을 배출한 원주는 1970년대 반독재투쟁의 거점이 될 정도로 기운이 센 땅이었다.      


꿩의 보은설화에 출연한 구렁이의 진실

예부터 내려온 이런 기운은 분명 산의 이름에도 그 영향을 끼쳤을 터인데, 꿩 치(雉) 자에 큰 산 악(岳) 자를 쓰는 치악산에는 유명한 ‘꿩의 보은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구렁이에게 잡힌 꿩을 구해준 선비가 그날 밤 구렁이의 처에게 사로잡히자 꿩이 몸을 던져 종을 울리게 해 주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정재구 원주시 문화유산해설사의 말에 따르면 이 전설에는 상원사 주지와 감악산 백련사 비구니의 숨은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옛날 상원사 주지는 대처승이었다고 한다. 중창불사를 꿈꾸던 스님은 원주 사람 만 명에게 놋쇠를 시주받아 종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시주를 받으러 다니던 중 백련사에서 비구니를 만나 정분이 들어 매일 밤 말을 타고 백련사까지 오갔다. 스님은 말이 힘들지 않게 여물에 콩을 섞어 먹였는데 스님의 원처가 이 사실을 알고 하루는 여물의 콩을 덜어냈다. 그날 밤 기운이 빠진 말은 상원사 앞의 절벽을 뛰어오르다 미끄러져 죽고 말았다는데 상원사 앞 절벽의 붉은 자국은 그때 흘린 말의 핏자국이라고 한다. 어쨌든 종을 만들기는 했지만 초심과 다르게 시주해 받은 놋쇠 중 많은 양을 말의 콩값으로 유용해버린 스님이 타종식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종을 때리자 종소리 대신 벼락이 치며 스님과 비구니는 각각 구렁이로 변했다는 것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사람과 물자가 많이 모였던 원주에서는 숱한 입을 통해 많은 이야기가 전해졌을 것이다. 민중의 설화 속에 나타난 권선징악의 교훈은 그들이 추구한 가치관이 어떤 것이었는지 어렴풋이 짐작케 한다.   

1000m 고지에 있는 상원사 동종에 그 전설이 있다 하여 한국전쟁 때 소실된 종을 1993년에 복원하고 ‘아름다운 소리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지만 꿩은 해발 700m 이상 고원에는 살지 않기에 그 아래 영원사의 옛 이름이 상원사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도 있다. 영원사 주변에서 이루어진 수많은 충절과 보은을 생각하면 설득력 있는 말이다.      


마지막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다

치악산은 그전에 적악산(赤岳山)이었다. 가을 단풍이 아름다워 그렇게 이름 붙여진 것이다. 하지만 이름이 바뀌었다 해도 여전히 치악산의 가을은 아름다운데 그 숲은 따로 인공조림을 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것이기 때문이다. 치악산에서 사람이 가꾼 나무란 1970년대에 화전민을 산 아래로 내려 보내고 심은 것뿐이다. 원주시 신림면 성남리에는 천연기념물 93호로 지정된 성황림이 있다. 90여 종에 달하는 온대낙엽활엽수 숲은 가을이면 색색으로 산을 물들인다. 

치악산의 이런 자연가치를 예부터 인정받아 조선시대에는 치악산 일대 숲을 황장목(黃腸木)으로 지정하고 궁궐을 짓는 나무이니 함부로 베지 말라는 황장금표(黃腸禁標)를 설치하기도 했다. 황장금표가 있는 소초면 학곡리에는 치악산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인 구룡사가 있는데 서기 666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늪에 살던 9마리의 용을 몰아내고 세웠다는 구룡사는 원래 아홉 구(九)였지만 지금은 거북 구(龜) 자를 쓴다. 의상대사가 창건한 이후 계속 신도가 줄을 이었지만 어느 때부터 사람 발길이 끊어져 폐찰의 위기에 놓였는데 절 옆에서 수호해 주던 거북바위의 기운이 다해 그렇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절 이름을 바꾸어 거북이의 기운을 빌렸더니 다시 예전과 같아졌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사실 치악산의 풍성한 자연자원을 말해주는 근거가 된다. 황장목 말고도 치악산에서 나는 임산물은 예부터 전국에서 으뜸으로 쳤는데 남한강의 최상류인 원주시 봉산동 배말에는 산채를 수매하는 관청이 있었다고 한다. 산에서 얼마든지 채취할 수 있는 나물을 관에 납품하는 일은 지역경제에 큰 역할을 했는데 너도나도 산에서 나물을 뜯다 보니 결국 그 수가 줄게 되고 사람들은 질이 떨어지는 나물을 팔며 관리에게 뒷돈을 주는 일도 벌어졌다. 구룡사가 폐찰의 위기에 놓였다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와 경쟁논리가 사람들에게 파고들며 더 이상 종교적 의미의 내세를 중요치 않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다. 지금까지도 구룡사에는 거북이 박제를 소중히 모시고 있다. 그것은 여전히 원주 사람들에게 미신으로 치부되지는 않는다. 치악산 정상 비로봉의 돌탑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치악산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것 중 하나인 돌탑은 사실 그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다. 돌탑을 처음 쌓은 이는 원주에서 과자를 만들어 팔던 용창중 씨라고 하는데, “3도가 보이는 산 정상에 3도의 돌을 이용해 3년 안에 돌탑 3개를 쌓으라”는 신의 계시를 받고 1966년에 혼자서 탑을 완성했다고 한다. 이후 자연재해로 여러 차례 탑이 무너졌지만 그의 정성이 사람들에게까지 가 닿았는지 치악산을 찾는 사람들은 탑을 보존하려 노력하고 있다. 

치악산은 어느 쪽에서 올라도 내려오는 길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등산로가 많다. 앞서 말한 충절과 보은의 사람들이 깊은 산속으로 파고들며 걸었던 길이다. 적막한 산에서는 시 한수가 떠오르기도 했을 텐데 운곡 원천석은 치악산 기슭에 머물며 1144수의 시를 썼고 허준의 누나인 허난설헌은 원주로 시집을 와서 수많은 문학작품을 남겼다. 심리학서를 쓴 조선 후기의 여류 성리학자 임윤지당과 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 씨가 살던 원주는 그렇게 보면 백지 위에 빛나는 창작의 길을 써 내려간 ‘문학의 도시’라는 말 또한 어색하지 않다. 

노산 이은상은 생전에 치악산을 오르며 “잉태한 여인의 배를 오르는 것 같다”는 말을 남겼다. 그것이 완성된 볼거리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화려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잉태한 여인의 뱃속에 있는 태아처럼 치악산에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계곡과 능선, 자연자원과 인간의 삶이 공존해온 역사가 무한한 가능성으로 다가온다는 의미가 아닐까. 1984년 12월 31일 16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치악산은 여전히 수많은 생명을 품고 내일을 꿈꿀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이라며 서울을 떠난 그들이 마주했던 제3의 고향도 꼭 그러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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