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용화산 산행, 큰 고개~새남바위~용화산~득남바위~무명폭포~고성리
영화 <율리시즈의 시선>을 보면 사라예보의 사람들은 안개 자욱한 날 거리로 몰려나와 축제를 벌인다. 이런 날은 저격수의 총구가 사람들을 겨냥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설명한다. 그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밤과 같은 낮에 그들은 인종과 국가와 종교가 다른 젊은이들의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으며 안갯속의 자유를 누린다. 하여, 비가 온다 한들 걱정 말라. 모든 것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날, 그날은 한편으로 산에 자유가 있다.
용화산으로 가는 내내 비가 내렸다. 적어도 산행이 걱정될 만큼이었다. 함께 용화산을 밟기로 한 변광재(강원산악회) 씨와의 전화통화는 무거웠다. “어쨌든 다시 돌아오더라도 가보자”는 약속을 하고 하루가 지나갔다.
아침, 다행히 전날 밤까지 퍼붓던 빗줄기는 시나브로 사그라졌다. 화창하게 맑은 하늘이 보인 것은 아니지만 한편으로 상쾌한 녹음을 맞이할 기대를 갖게 하는, 그런 아침이었다.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는 용화산
산행은 지역사람들에게 ‘큰 고개’ 또는 ‘북두지 고개’라고 불리는 산마루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화천 쪽 삼화리에서 접근하면 용화산 정상부근까지 포장도로가 나있는 큰 고개는 한국전쟁 때 군사도로로 뚫렸다고 한다. 본래 화천에서 춘천을 오가는 비포장도로였는데, 십수 년 전 화천군에서 도로를 포장해 지금은 드라이브 코스로 이용된다. 길은 정확히 용화산 능선과 맞닿는 곳까지만 포장되어 있는데, 고개 너머는 춘천시 사북면 고성리로 그곳부터는 도로의 흔적은 있으나 수풀이 우거져 등산로와 다르지 않은 길이다.
포장도로의 끝에는 널찍한 주차장이 있고 간이 화장실과 한편에서는 가는 실 계곡에 고무호스를 받쳐놓아 식수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두었다. 복날이면 여럿이 함께 올라와 더운 여름밤을 지세도 좋을 시원한 바람이 부는 곳이다. 주차장 정면에 있는 고갯마루 표지판을 따라가면 군데군데 로프가 묶여있는 일반등산로로 가는 길이고 춘천시 경계를 넘어 7부 능선을 따르는 길은 새남바위로 접근하는 길이다. 취재팀은 야영지와 새남바위를 둘러본 후 다시 능선으로 붙기로 했다.
고개 너머로 내려가 바로 왼쪽으로 길을 꺾으니 오솔길과 함께 샘터가 나왔다. 단지 물이 조금 흐르는 비탈에 웅덩이 하나 파 놓았을 뿐인데 여간 훌륭하지가 않다. 고인 물속에는 언뜻 도롱뇽 알이 비쳤다. 알이 다치지 않게 조심스레 손 우물을 만들어 목을 축인다.
“전에 용화산에 오면 야영장에서 불도 때고, 선배들이 술 심부름을 시켜 저 아래 양통까지 내려갔다 오면 날이 밝곤 했어요.”
강원대학교 산악부 시절부터 산에 다닌 변광재 씨는 새남바위 앞에서 30년도 넘은 추억을 떠올린다. 그는 1972년 새남 A․B코스를 개척한 장본인으로 용화산에 남다른 기억이 있는 것 같았다.
함께 산행에 나선 강원산악회 회원들은 모두 수십 년째 춘천에 살며 용화산을 오르내렸던 사람들이다. 그중 가장 연장자인 이원상 씨는 강원산악회 창립 초기인 50년대부터 활동해 온 멤버로 보다 옛 일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50년대에 용화산에 오면 녹슨 포탄이나 군인들이 설치해 놓은 철조망이나 전선이 많았어요. 큰 고개 도로는 전쟁 때 뚫었는데 도로가 북한에서 바로 보인다고 이후로 사용을 안 했다고 하더군요.”
“셋째 형님이 학도병으로 참전했었는데, 당시 용화산에서 참호를 파고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으며 전투를 치렀대요. 이게 뭔지 알아요? 비행기에서 쏜 총탄 자국이에요.”
옛날이야기를 들려달라는 기자의 말에 옆에서 듣던 최병옥 씨가 거든다. 바위에 움푹 파인 주먹만 한 구멍들은 그의 설명이 없었다면 그저 모르고 지나쳤을 역사의 상흔이었다. 용화산의 북쪽 화천에서 직선거리로 4km만 가면 민통선이고 그 위로는 비무장지대가 나온다. 그리고 그곳부터는 눈에 보이나 정작 우리가 알 수 없는 지도의 공백지대다. 아니, 지도의 공백지대라고 느끼는 것은 ‘민간인 통제선’이라는 아주 묵직하고 차가운 느낌의 그 여섯 글자에 대한 편견이 아닐까. 어쩌면 그 말은 반세기를 내려오며 저마다의 마음에까지 통제선을 그어 실제 발 디딜 수 없는 땅뿐 아니라 그 땅을 상상하는 것조차 스스로 막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진짜 민통선은 용화산에도 있었다. 능선 멀리에서도 잘 보이는 산의 5부 능선쯤 흙이 다 드러난 큰 공터가 궁금해 물어보니 ‘폭발물 처리장’이란다. 등산객들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는데, 전에 용화산에서 발견되던 불발탄을 처리하는 곳이더니 지금도 간간히 사용된다고 한다.
꼭 어릴 적 골목에서 놀다 넘어져 무릎이 까진 아이처럼 용화산은 살점이 움푹 파여 찡그리고 있었다.
너른 식탁과 나무판자로 만든 의자까지 갖춘 야영지에서 이야기를 듣자니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축축하던 날씨도 적당히 선선해져 어느새 등짝에 흐르던 땀이 다 말랐다.
기자에게 새남바위는 서울에서 주말 산행을 위해 몇 번 찾아본 것이 전부였는데, 용화산까지 왔던 까닭은 주말이면 북새통을 이루는 서울근교 암장보다 한가롭고 취사와 야영도 얼마든지 자유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꼭 도봉산 선인봉을 연상케 하는 새남바위는 순 한글로 ‘새가 난다’는 뜻이다. 새가 날아가다 용화산에 앉아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1970년대 초반부터 지역 산악인들과 서울 타이탄산악회 등에서 암벽등반 루트를 개척해 현재 20여 개가 나있다. 까실한 화강암 암벽은 한가득 물기를 머금어 말라가던 이끼를 제법 부풀려놓았다.
이끼 사이에는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것도 있고, 이미 빛이 바래고 녹슬어 조금씩 꺼풀이 벗겨지는,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동판이 걸려있었다. 변광재 씨는 후배 두 명을 이곳에 묻었는데, 기자를 안내해 간 곳은 사람들이 전혀 등반하지 않는 이끼 무성한 바위 아래였다.
“그때 교련 반대 데모한다고 휴교령이 내려서 서울에 바위 하러 간다고 갔는데, 촌놈들이… 결국 사고가 난 거죠. 또 하나는 안나푸르나 팡봉에 가서 눈사태로 보내고.”
찬찬히 새남바위를 올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던 데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갓 스물몇 살, 푸르디푸르렀던 그들은 이곳 용화산에서 큰 산을 꿈꾸고 또 품었을 것이다.
수많은 전설 내려오는 지역의 영산
취재팀은 능선으로 올라붙기 위해 새남바위를 왼쪽으로 끼고돌아 작은 골짜기를 오르기 시작했다. 얼마쯤 흔적이 드문 희미한 산길을 치고 오르자 굵은 동아줄이 묶여있는 등산로가 나타났다. 능선길은 간간히 크고 작은 암릉으로 되어있어 몇 해 전 화천군에서 등산로를 정비하며 위험구간에 로프로 난간을 설치했다고 한다.
정상까지 가는 길은 만장봉, 층계바위, 하늘벽 등 지도에 각각의 이름이 나와 있어 대체 그 생김새가 어떤지 궁금했지만 바위의 머리꼭대기를 밟고 지나가면서는 볼 수가 없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제대로 된 모습을 볼 수 없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상황이다. 연애의 법칙이라 하던가, 차라리 먼발치에서 운무에 싸여 보일 듯 말 듯한 칼새봉의 옆모습이 애틋하다.
만장봉 정상에는 ‘주전자 바위’가 있다. 꼭 주전자 주둥이를 닮았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는데, 수억 년 동안 물이 흘러 그리 됐는지 툭 튀어나온 바위 돌출부에 U자형의 골이 파여 있다. 주전자 바위에는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전해오는 풍습이 있는데, 바로 ‘개적심’이라는 묘한 이름이다.
개적심은 전통 기우제의 하나로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들면 동네 사람들은 개를 끌고 용화산에 올라 그 자리에서 잡아서 흐르는 피를 주전자 바위에 묻혔다고 한다. 그러면 곧바로 비가 쏟아졌다는데 화천군에서 발간한 <화천민속지>에는 주전자 바위와 관련해 주민들의 제보가 채록되어 실려 있다.
‘… 시뻘겋게 피 칠을 하면 갑자기 깜장 구름이 덮이면서 소나기가 막 쏟아지고 마침 내가 갔다가 비가 당장에 맞고 왔는데…깨끗한 거기다가 피 칠을 하니까 보기 싫다. 하늘 아버지가 그거 딱해서 비를 내려주신다 이거지.’-<화천민속지> 480쪽 정병출(화천군 상서면)씨의 제보.
사람들은 개적심을 한국전쟁 이전까지만 기억하고 있을 뿐 그 이후로는 한 번도 기우제를 지낸 적이 없다고 했다.
조금 더 가자 ‘장수발자국’이라 불리는 움푹 팬 바위가 있었다. 꼭 용알을 닮기도 했는데, 둥그런 모양이 책에서 보던 공룡발자국 같았다. 장수가 성큼성큼 걷다가 낸 발자국이라며 용화산에 있는 것은 오른발이고 왼쪽 발자국은 20리도 더 떨어진 화악산에 있다고 했다. 가는 곳마다 전설과 설화가 전해오는 용화산은 어쨌든 예부터 지역의 영산(靈山)이었던 것이다.
정상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이미 자동차로 해발 600여 m까지 올라온 덕에 완만한 능선으로 쉬엄쉬엄 가도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길이다. 참나무가 사방을 뒤덮은 정상에는 커다란 표지석만 있을 뿐 시원스레 조망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마침 정상 주변에 너른 공터가 있어 딱 쉬어가라고 만들어놓은 것 같았다.
“저기가 오음리지.”
사람들이 가리킨 동쪽 끝에는 별 다를 것이 없는 그저 초록 논밭이 펼쳐진 시골마을이 있었다. 하지만 오음리(梧陰里)라는 이름에는 오동나무 그늘보다도 훨씬 큰, 한국 현대사에 빼놓을 수 없는 선명한 명암이 남아있다. 바로 베트남전 파병 국군의 훈련소가 있던 탓이다.
“거기 파로호 때문에 늪지대 같은 게 있었다고 해요”
일제는 1944년 대륙침략을 위해 화천수력발전소를 건설하며 지금의 파로호를 만들었다. 파로호로 인해 오음리 주변에는 전에 없던 늪지대가 생겼는데, 그게 베트남으로 향하는 군인들에게 훈련장으로 사용된 것이다.
반공을 국시로 삼던 시대였다고 한다. 1964년 8월 압도적인 찬성으로 파병결의안이 국회에서 가결되고 1965년 첫 파병을 시작으로 1973년까지 8년 5개월간 열대의 전장으로 향한 젊은이들은 32만 명이었다. 그중 4900여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1450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수만 명의 참전 군인들이 고엽제로 고통받고 있다.
오동나무 그늘 아래는 순식간에 ‘산중도시’로 변했다. 떠나는 그들에게 ‘월남’은 곧 아주 컴컴한 그늘 아니면 비옥한 양지였을 것이다. 한때 계란 한 개의 가격이 춘천 물가의 3~4배에 달할 정도로 사람들의 씀씀이가 많았다는 오음리는 40여 년이 지난 지금 부연 안개만이 덮여있었다. 화천군에서는 최근 훈련소 터에 ‘베트남 참전 기념관’을 조성해 올 가을 문을 열 예정이라고 한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계곡길
설명을 들으니 발길이 가볍지 않다. 나라에서 관리하는 공원도 아니고, 흔한 유원지 하나 없는, 그래서 하고 싶은 대로 맘껏 방종을 누려왔던 용화산은 그 숱한 전설보다도 더 날카로운 사금파리 하나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불알바위는 꼭 보고 가야 한다”는 재촉에 길게 걸어보려던 계획을 바꾸어 용화산의 전설을 더듬어보기로 했다.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가니 꼭 그 이름새에 걸맞은 커다란 바위 하나가 나왔다. ‘불알바위’라는 말이 왠지 입에 붙지만 ‘득남바위’라는 점잖은 이름으로 불리는 그곳은 예전부터 사내아이를 기원하는 사람들이 치성을 드리던 곳이라고 한다.
미끄러운 바위 비탈에는 가느다란 끈이 매여 있었다. 화천 쪽 능선길을 오르던 때와 등산로는 영 딴판이었는데, 축축한 노끈은 사람의 손을 별로 안 탔는지 여간 미끄덩거리는 것이 아니었다. 아마 지난날 누군가 이 길로 하산하다가 임시로 매어놓은 것 같았다.
“춘천에 워낙 볼거리가 많아서 그런지 용화산은 별로 신경 안 쓰는 것 같아요.”
“춘천 와서 용화산 아니래도 놀데가 많지. 젊은 사람들이 산에 오나.”
한편으로 사람들이 정성껏 치성을 드리던 영산이 다른 한편으로는 주변의 화려한 것들에 묻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들은 옛것과 현재, 전통과 인스턴트, 호롱불과 네온사인 같은 단어들로 머릿속을 자꾸만 채워나갔다. 그러다 보니 등 굽은 용화산은 어느새 낡아 있었고 그 자리에는 축제, 페스티벌, 웰빙 같은 짜릿하고 상큼한 것들이 들어앉았다.
삽십 분을 채 내려가지 않아 우렁찬 물소리와 함께 폭포가 나타났다. 전날 내린 비 때문에 폭포는 시원한 물줄기를 쏟고 있었다. 경사는 급하지 않지만 높이는 20여 m나 되어 멋들어진 이름 하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냥 ‘폭포’ 일뿐이었다. 물안개에 얼굴을 씻으며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왜 용화산은 아무것도 아니죠?”
빼어난 풍경에도 용화산이 지자체에서 정한 도립공원이나 군립공원도 아니고, 등산로 정비도 되어있지 않은 것 같아 든 궁금증이지만 우문 중에 이런 우문이 있을까. 세상에 아무것도 아닌 게 어디 있는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그 ‘아무것도 아니어서’ 이런 원시와 태고의 숨결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다면 그것에 감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어진 계곡 하산길은 무심코 내뱉은 말에 통쾌하게 화답하듯 어느 산 어느 계곡에서도 볼 수 없었던 ‘본래 그것’을 서슴없이 드러냈다. 그것은 TV에서 보던 지구촌 어느 오지의 밀림보다 울울창창했고 모든 것은 살아 숨 쉬어 죽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생명, 생명이 거기에 있었는데 나를 강하게 이끌던 뭇 생명들은 우거진 수풀이 목까지 차오르는 묵밭을 지나는 동안 쉴 새 없이 두 뺨을 간질이곤 했다.
각기 다른 뿌리와 다른 이파리와 다른 열매를 맺는 풀과 나무가 서로의 몸뚱이 비비며 거센 비바람 견디어 내는, 오! 거기 그곳, 푸른 자유가 있는 곳.
200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