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 강천산
아버지, 어느덧 황폐한 계절이 돌아왔어요. 다시 겨울이지요. 벌써 입동이로구나. 이제 찬연했던 가을빛도 썰물처럼 산을 빠져나갈 테지. 불현듯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시간이 올 거야. 너무 상심 마세요. 나무들도 긴 겨울을 앞두고 붉은 잎을 모두 떨굴거예요. 그래야 간신히 겨울을 날 수 있다잖아요. 그래, 소설이 지나고 동지 해가 저물도록 여전히 산은 물을 머금고 있을까.
다시, 겨울이다. 다시, 겨울이다를 되뇌며 사내는 도계(道界)를 지나쳤다. 수확이 끝난 들녘, 벼를 잃은 논들은 오돌오돌 떨며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전남 담양을 넘어선 24번 국도는 전북 순창(淳昌)과 이어졌다. 순박하고 창성한 땅. 하지만 이런 말뜻이 무색하게 순창과의 첫 대면은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아직 저녁 여덟시가 채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점포들의 문은 대부분 닫혀있었고, 터미널 앞으로 난 4차선 신작로에는 고양이들이 괴성을 지르며 질주하곤 했다. 어제가 보름이었고 가로등이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도 이 시간, 읍내의 지배자는 어둠이었다.
멀리서 휘청대고 있던 건 하얀색 애드벌룬이었다. 거리 곳곳에서 바람에 푸드덕거리는 플래카드로 미루어보건대 그날은 축제의 마지막 날이었다. 인구 만 명이 되지 않는 이 소읍에서는 추수가 끝나고 겨울이 다가오기 전 며칠 사이에 장류(醬類)축제를 열고 있었다. 올해가 그 첫 번째라고 했기에 몇 가지 궁금증이 들었으나 이렇듯 거리는 텅 비어 누구에게도 축제가 어땠는지 물어볼 길이 없었다. 간간히 미등을 밝힌 다방이나 허름한 대폿집을 지날 때면 두런거리는 인기척이 새어나왔지만 낮선 문을 밀고 들어서기까지는 저으기 오랜 시간이 흘러야 했다.
-축제는 뭔동 뉴스에도 나올거인디. 아따 뜽금없이 강천산은. 젊은 사람이 가서 보시요잉. 술은 참이슬이요 하이트요?
‘장수(長壽)의 고장’이라는 이름답게, 썰렁한 거리에서도 식당 문을 열어두고 있던 노파의 대답은 쉰 목소리 속에서도 기운이 묻어났다. 하이트. 사내는 한잔 가득 섬진강을 따르기 시작했다.
전북 장수에서 시작해 전남 광양으로 치닫는 호남정맥 줄기는 영산강과 섬진강을 품고 평야를 동서로 가른다. 하지만 가르는 것이 땅인들 별로 서먹한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가을갈이가 끝난 썰렁한 들판에 서도 눈이 심심치 않을 크고 작은 산줄기들이 있기 때문이다. 찬바람 부는데서 떨어진 벼이삭이라도 하나 줍는다면 호남정맥은 단지 대간에서 갈라져 나온 무수한 가지 중의 하나가 아니라 그 땅과, 땅을 딛고 서있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라는 생각이 울컥 울컥 배어나는 것이다.
강천산(剛泉山․583.7m)은 그런 호남정맥을 이루는, 100여개가 넘는 무수한 산봉우리 중의 하나다. 산은 전북 순창군과 전남 담양군에 경계를 두고 있는데, 한쪽 어께로 흘러내린 물은 읍내를 가로질러 섬진강이 되고 다른 한쪽으로 흐른 물은 담양호에 고였다가 영산강이 된다. 산 하나가 솟아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을 가로지르는 강 두 개를 품었으니 여간 범상한 게 아니다. 그 산의 이름도 지세에 걸맞게 ‘용이 꼬리를 치며 승천하는 것 같다’고 하여 용천산으로 불렸으나, 신라때 도선국사가 계곡 깊은 곳에 강천사라는 절을 만들며 산 이름도 강천산으로 바뀌게 된 것이었다. 도선은 한국에 처음 풍수지리설을 도입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니, 그가 절터를 강천산에 잡은 것이 우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 8대 명당 중 세 곳이 모여 있다는 순창, 하지만 대체로 산이 많고 들은 그 여백 사이에 군데군데 자리해 이 땅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은 여간 억세지 않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런 땅의 기운처럼, 순창의 사람들은 어쩌면 역사의 화살을 정통으로 맞고도 주저앉았다간 일어나곤 한 것이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하고 조선 7대 왕에 오르자, 신말주는 형 신숙주의 처신에 실망해 벼슬을 버리고 고향 순창으로 내려왔다. 자신의 집 뒤에 귀래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주변의 벗들과 십노계를 만들어 오랜 시간을 풍류로 보냈다고는 하나, 후일 신말주도 세조 아래서 전라수군절도사까지 올랐으니 결과만 놓고 보면 사뭇 민중의 역사와는 비교가 된다.
순창읍내가 내려다보이는 귀래정에 서면 ‘옛 모습은 아니다. 그러나 비록 모습은 바뀌었다 하더라도 정자에 담긴 귀래정의 정훈이야 퇴색했겠는가’하는 탄식이 쓰여 있다. 대체 어쩌란 말인가.
오히려 신말주의 후손으로 백두대간의 개념을 집대성한 <산경표>를 지은 여암 신경준이나, 이황․이이․서경덕 등과 함께 조선 성리학의 6대가로 불리는 기정진, 판소리 서편제의 창시자 박유전 같은 인물이 순창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 아닐까.
순창하면 고추장이 먼저 떠오른다. 고추장이 유명하게 된 데는 조선시대부터 왕의 밥상에 올랐기 때문인데,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기 전 무학대사를 만나기 위해 순창에 내려왔다가 어느 민가에서 고추장에 밥을 비벼먹은 후 훗날 그 맛을 잊지 못해 고추장을 진상하라고 명했다고 한다. 이런 내용은 순창의 또 다른 산인 회문산 만일사에 있는 비석에 적혀있다.
고추장 같은 인물을 대라면 단연 면암 최익현을 꼽겠다. 을사조약 이후 ‘벼슬아치․선비․농부․장사꾼․장인․서리․승려까지도 모두 함께 일어나서 힘을 합하여 원수를 무찔러 그 씨를 없애고 그 소굴을 불 지르며 역적의 무리들을 모조리 쳐부수어 그 머리를 베고 사지를 찢어서 나라의 명맥을 튼튼히 하자’며 400여 명의 의병을 끌고 강천산에 진을 쳤던 최익현은 결국 일본 쓰시마 섬으로 끌려가 단식 끝에 죽었다. 그가 관군에 체포된 장소라는 순창객사는 초등학교의 교무실로 사용되었다가 지금은 텅 비어 수업이 끝난 코흘리개들의 놀이터가 되곤 한다.
강천산이 전국 최초의 군립공원으로 지정된 것은 1981년이다. 순창객사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듯, 산은 어른들의 놀이터가 된 것이다. 1980년 당시로서는 호남 최대의 구름다리를 세우며 산의 볼거리를 늘렸고, 최근에 와서는 마한시대 구장군의 전설이 서린 절벽에 거대한 인공폭포를 조성해 산책 나온 사람들의 시선을 쏠리게 한다. 폭포는 일과시간에만 물을 틀어 흘려보내고, 밤이나 추운 겨울에는 스위치를 내린다. ‘웰빙맨발산책로’라 이름 붙은, 잔모래가 깔린 길을 따라 걷는 동안에도 곁길을 따라 원앙사육장, 토끼사육장, 대나무 숲길, 통나무 데크가 깔린 산림욕 코스가 애초의 발길을 이리저리 흔드는데, 그 길 끝에는 내년 2월까지 테마공원이 또 조성된다니 산이 아닌 공원이 되어가는 모습은 비단 입구에 몰린 음식점의 호객행위와 다를 바가 아니다.
-그렇죠? 할머니 강천산은.
-워째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요. 산을 볼라믄 저짝 담양호에도 가보시요.
노파는 빈 병을 남기고 문을 나서는 사내의 뒤통수에 아직 씹어 삼키지 못한 장아찌 같은 한 마디를 던졌다. 빈 그릇을 치우는 그의 모습은 꼭 읍내 한 구석에서 웃고 있는, 돌로 만든 벅수를 떠올리게 했다. ‘철로 만든 벅수는 없다. 금을 입힌 장승은 더더욱 없다. 그건 항상 돌이나 나무로, 대목이나 석수장이가 아닌 보통 사람이 정성을 다해 깎는다’던 어느 민속학자의 말처럼. 그제야 사내는 이 작은 마을이 산의 그림자 아래에서 바지런히, 그리고 쉬지 않고 맥박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읍내는 부연 안개에 싸인 새벽이었다. 안개의 원인이 호수에서 증발한 수증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사내는 생각했다. 담양호에 이르는 길은 위험천만해서 길가에 널브러진 싸늘한 고양이를 두 마리나 지나쳐야 했지만 그곳에 다다를 때까지 동은 터오지 않았다.
산의 한 귀퉁이에서 부연 미명이 스멀거리며 새벽을 몰고 올 때 비로소 썰물 뒤의 갯벌 같은 호수가 드러났다. 찬바람이 더욱 차갑게 불어오는 벌판, 헌데 그건 호수가 아닌 밭이었다. 밭을 덮은 검은 비닐이 삭아버린, 이제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자라나지 않는 죽은 땅이었다. 뭍이 아닌 벌판에서는 말라가는 수초들이 새벽 서리를 맞으며 이곳이 수몰지구였음을, 그런데 오랜 가뭄 끝에 바닥을 드러낸 것임을 알리고 있었다. 발길에 차이는 것은 찌그러진 양은냄비, 깨진 농약병, 아무렇게나 버려진 변기조각이나 빛바랜 폐타이어. 강천산은 그런 것들이 뿜어낸 안개에 쌓여 다시 아침을 맞고 있었다.
아버지, 야윈 산에는 단단한 물이 흐릅디다. 그 물은 아주 천천히 흘러서 우리가 유속을 가늠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그뿐이에요. 허나 전혀 불쾌하지는 않아요. 안개는 숲을 적시고 작은 고랑 같은 나무껍질 사이로 흘러 다시 호수로 모여들 것이기에. 짧은 대답은 썰물처럼 사내의 몸을 빠져나갔다. 다시, 겨울이다. 다시, 겨울이다.
20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