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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준 Jun 26. 2024

섧도록 넘는 길에 하얀 술 부어주오

동강 백운산, 점재~병매기고개~수리봉능선~정상~칠족령~제장

취재산행을 떠나기 전에는 기존 문헌자료를 통해 정보를 꼼꼼히 살펴보아야 함은 물론이요, 사전에 주변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보고 현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 준비를 해야 독자들에게 보다 많은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그래서 동강 백운산으로 떠나기 전에도 여러 책을 뒤지며 공부를 하게 됐는데, 그중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었으니 김형수 선생이 쓴 <한국 555 산행기>에 나와 있는 한 구절이었다. 


‘마지막 봉인 칠족령(529.9m)을 지나 6번째의 급경사 길을 내려서면 임도가 나타나고, 동쪽 길을 따라가면 밤나무집에 닿는데 냉막걸리 맛이 일품이었다.’


옳거니, 산행 코스는 당연 점재나루에서 출발해 밤나무집이 있다는 제장나루로 내려오는 길로 잡혔다. 나름대로 세운 이유인 즉, 지금까지 취재기사를 써 오며 전국의 숱한 산을 두루 올라 어떤 수식과 찬탄으로 우리 강산을 그린다 한들 산꾼들의 반응은 늘 “산에서 내려오면 맛있는 거 뭐 있어?”였기에. 한편으론 슬픈 일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먹는 것도 중요한 일이고 ‘즐거운 취재는 독자에게 고스란히 옮아간다’는 나름의 철학이 있었기에 여름날 땡볕을 기어올라 막걸리 한잔으로 목을 축이는 환상의 시나리오로 백운산 산행을 기획했던 것이다. 이런 결정에는 어느 노동자 노래꾼이 동강과 맞붙은 서강변에서 썼다는 아래 시가 큰 작용을 한 게 사실이다. 길지만 전문을 옮기니 읽어 보시라.      


‘강가에 서면 시상이 떠올라 / 흐르는 강물에 생을 띄워 노래해야 하는데 / 난 어떻게 그물을 쳐서 물고기를 잡아 / 매운탕을 끓일까만 생각한다 // 그림처럼 펼쳐진 절벽을 바라보면 / 그 웅장함에 넋을 잃고 / 아- 탄식과 함께 / 한소리 줄줄 흘러야 하건만 / 난 그저 오르고 싶어 / 안달이 나서 / 친구 꼬드겨 오르다 무르팍 까지고 / 기어코 한소리 듣고 마는 / 난 / 망나니 기질만 흐르는가 보다 // 그저 흐르는 물속에 / 맥질하여 고기를 건져 / 그 시원함에 / 소주 한잔 빨아야만 / 속이 풀리는 / 난 / 놈팽이가 분명하다 // 놀러 왔으면 쳐 놀아야지 / 웬 개잡폼 / 난 / 서강에 몸 담그고 / 시상은 잡지 못한 채 / 고기만 잡아 / 바로 딴 고추에 / 한쌈 쿡 / 서강 / 조오타’ - ‘삶이 보이는 창’ 백일장 우수작 김성만의 ‘서강에서’ 



능선길에는 가파른 오르내림 많아 주의해야

그런데, 동강은 섧다. 줄곧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맴돌았다. 동강은 슬프다 못해 섧다. 동강 난 것도 없이 굽이쳐 흘러갈 뿐인데 대체 왜. 백운산으로 향하는 길, 구불텅구불텅 한창 포장공사가 진행 중인 비포장도로를 지나 차 한 대가 겨우 지날 만한 마을길을 통과하면서도 마음 한편은 우울한 구름 속에 잠겨있는 것일까. 


“동강 살린 건 인생에서 최고 잘한 일이라고 생각은 하는데, 결국 사람들에게 남은 건 뭔지 의문이 들기도 하네요.”


동강에서 태어나 여전히 강에 기대어 살고 있는 동강레포츠 대표 김정하 씨는 지난밤 취기가 오르자 노래 한 자락 하겠다며 정선아리랑을 구성지게도 불러젖혔다. 그는 “동강이 지금까지 이나마 보존될 수 있었던 건 사방 둘러싸고 있는 뼝대와 구멍 숭숭 뚫린 동굴, 쉽게 콘크리트를 쏟아부어 개발할 수 없는 자연조건 때문”이라고 말했었다. 

십여 년 전 동강을 쓸고 지나간 한바탕 갈등과 그 끝에 나온 사람들의 떠남, 그리고 모든 여울이 잦아든 후에 남은 이들에게 덧씌워진 삶의 무게란 그저 두둥실 흘러가는 물결로 치부해 버리기엔 너무 무거운 것이었을까. 동강의 본 이름은 연촌강(聯村江)이다. 강이 아니면 마을과 마을이 이어질 수 없었기에 물은 사람들에게 소통의 수단이요 삶의 근원이 되어왔다. 연촌강이 어느 날 동강으로 탈바꿈 한건, 일제에 의해서라고 한다. 


백운산 산행 기점으로 잡은 점재 마을까지는 취재팀의 숙소였던 문희 마을에서 직선거리로 4km도 되지 않지만, 동강을 둘러 있는 도로는 두 마을 사이를 잇지 못하고 끊어져 있어 멀리 영월을 지나 1시간여나 돌아가야 했다. 연촌강이 동강이 되며 동강 난 단편이다. 

몇 년 전까지 줄배가 있었다는 점재나루터에는 콘크리트 다리가 생겨 차도 드나들 수 있게 되어있었다. 다리라 봐야 물이 불어나면 곧 잠기고 마는 작은 잠수교였다. 점재 마을에는 서너 가구쯤 살고 있는 것 같았는데, 산비탈을 두고 텃밭이 조금 널렸을 뿐 마을사람들이 농사를 지어먹고 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주차장에서 표지판을 따라 콘크리트길을 올라가면 나오는 첫 번째 집은 주변 지리에 익숙하다고 알려진 이종수 씨의 집이었다. 마침 채비를 갖추고 마차에 계모임이 있어 나간다는 할머니에게 음료수 하나씩을 사 먹었는데, 집 유리문에 ‘밀주 막걸리 있음’이라는 이상한 문맥의 광고가 붙어있는 걸로 보아 할머니의 주 수입원은 백운산을 찾아오는 등산객들인 듯했다.


점재에서 바라보는 산의 동쪽 절벽은 ‘뼝대’라고 하는 절벽으로 되어 있었기에 등산로는 밭을 가로질러 강을 바로 아래 끼고 한참을 돌아서 시작됐다. 산을 횡단하는 길이 너무나 쉽게 이어졌기에 ‘이러다 갑자기 불쑥 솟는 것 아닌가’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는데, 생각대로 어느 순간부터 코가 땅에 닿을 듯한 된비알이 시작됐다. 

며칠간 비가 내리지도 않았다는데 진흙으로 된 땅은 기분 나쁠 지경으로 미끄러웠다. 간간히 굵은 동아줄이 묶여 있기도 했지만, 한발 올라 두발 미끄러지는 고빗사위에서 한참이나 진땀을 빼야 했다. 기존 등산로에는 ‘계단 구간’ 등이 쓰인 리본이 곳곳에 묶여 있었다. 백운산은 정상 능선을 경계로 평창군과 정선군에 걸쳐있는데, 정선군에서도 본격적으로 이곳 등산로를 개발할 계획인 듯했다. 


무더운 날씨 속에 온몸은 금세 땀으로 젖어들었다. ‘병매기 고개’라 불리는, 수리봉 능선과 전망대로 갈라지는 능선 안부에 올라서면 바람이 좀 불까 기대도 해보았지만, 취재팀은 모두 낙지처럼 늘어져버렸다. 이제 30분을 걸어왔을 뿐인데. 

하나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굽이진 동강은 잠시나마 더위를 식혀주는 광경이었다. 적어도 100m 이상 높이의 뼝대에 자리 잡은 터에서는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고도감을 느꼈으니까. 하지만 발아래 흘러가는 물줄기도 이 더운 날에는 빠른 속도로 증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수리봉능선이라 이름 붙은 암릉은 코가 닿을 정도가 아니라 네발로 기어가야 할 지경이었다. 이곳도 간간히 동아줄이 설치돼 있었지만 한쪽이 끝 모를 낭떠러지라 경치 구경이라도 할라치면 바짝 엎드려 고개를 내밀곤 해야 했다. 

만일 곧 등산로가 정비된다면 이곳도 분명 철계단이 줄지어 늘어설만한 구간이었지만, 한편으론 오르는 길이 고될지언정 누구도 손대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거대한 병풍처럼 펼쳐진 뼝대는 태고이래 어느 누구의 흔적도 없는 천연 그대로의 것이었기에.

차라리 비라도 내렸으면 고대하며 철퍼덕철퍼덕 발길을 옮겼지만,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은 제장나루 밤나무집에 있었다. ‘시원한 냉막걸리, 시원한 냉막걸리’를 속으로 읊조리며 한걸음 두 걸음 옮기다 보니 결국 정상은 나타났다. 정상에는 평창군에서 세운 자그마한 표지석과 정선군에서 세운 지적 도근점이 나란히 서 있었다. 지도에는 882.5m라고 표기돼 있지만, 정상석에는 그보다 조금 낮은 882.4m로 나와있다.        


점재~제장 종주에 4시간여 소요  

평일인데도 반대편에서 올라온 한 무리의 사람들로 정상은 북적였다. 안산에서 왔다는 그들은 제장 마을에서 올랐다고 했는데, 서로 앞으로 펼쳐진 길에 대해 묻기 바쁘다. 더운 날에 모두 늘어지게 올라왔고, “저쪽은 엄청나게 가파르던데 반대쪽은 어때요?” 하는 게 마주친 사람들과 나눈 대부분의 이야기였다. 

정상에서 북쪽으로 난 능선을 따라가면 정선 청옥산(1256m)과 이어지는 길이고, 남서쪽으로 난 능선은 칠족령 능선이라 불리는 가파른 길이다. 능선을 따라 10여분을 가다 보면 문희 마을에서 계곡을 따라 올라오는 길과 만난다. 


하산길은 올라온 수리봉 능선처럼 크고 작은 바위가 곳곳에 있고 가끔씩 가파른 비탈을 오르내려야 하는 길이었다. 왼쪽은 절벽, 오른쪽은 완만한 형세가 계속 됐지만, 다행히 간간히 바람이 불어 가끔씩 나무 사이로 드러나는 강을 내려다보며 쉬엄쉬엄 발길을 옮길 수 있었다.  

넉넉잡아 2시간여면 내려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칠족령 능선은 크고 작은 봉우리를 6개나 넘어야 했다. 고개를 하나 넘으면 눈앞에 또 하나가 서 있고, ‘산 넘어 산’이라는 말이 다르지 않은 길이었다. 여전히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 속에 이미 수통의 물도 다 떨어진 상황. 684봉, 625봉, 615봉을 순서대로 지나 마침내 칠족령에 다다를 수 있었다. 


칠족령은 ‘령’이라는 이름이 붙을 만한 고갯길이었는데, 문희 마을과 제장 마을 사람들은 예부터 이 고개를 넘어 소통했을 듯싶다. 옻 칠(漆) 자와 발 족(足) 자를 쓰는 칠족령은 옛날 제장마을 이진사집 개가 발에 옻을 묻힌 채 고개를 넘으며 자국을 남겼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이지만, 더 이상의 설명은 없어 대체 개발자국에 무슨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하도 궁금해 산행을 끝내고 내려와 동강변에서 만난 할아버지에게 뜻을 물어보았지만 “그냥 개가 발자국 남기고 다닌 게 재밌지 않아?”하고 말아버린다. 달리 생각해 보면, 사방 막힌 고립무원의 오지에서 그저 개가 발자국을 남겼을 뿐일지라도 사람들에게는 ‘동강스런’ 재미가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칠족령에서부터 잠깐 급한 내리막을 내려선 것 말고는 곧 완만한 오솔길이 나타났다. 당연히 걸음은 바빠졌는데, ‘밤나무집’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옥수수밭을 지나 드디어 저 멀리 커다란 밤나무 한 그루가 보이기 시작했고 그 아래 자그마한 집 한 채가 있었다. 밤나무 아래 평상에 대자로 누워 냉막걸리 한잔 들이켜고 강변에 나가 웃통 벗어던지고 등목도 하면 지금까지 무더위는 한방에 날아가겠지 하는 기대가 여울처럼 밀려와 한달음에 나를 그 앞에 서게 했으나…. 

아,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정감록>의 십승지 중 하나로 늘 평온했다는, TV 드라마 촬영지로 한때 ‘떴다는’, 제장마을 밤나무집은 지금 굳게 닫혀있다. 


20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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