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영준 Oct 19. 2024

당신은 바위로 만든 미소

경주 남산, 용장리~이무기능선~고위봉~금오봉~냉골~삼릉

남녘 경주로 향하는 길은 이용인구 천만을 넘어섰다는 고속철을 이용하면 그리 먼 곳도 아니었다. 동대구역에서 갈아타게 되어있는 환승표를 이용하면 세 시간 남짓. 교통체증의 도시에서라면 길에서도 쉽게 쏟아버릴 시간의 거리였다. 

‘경주 남산. 금오봉(468m)과 고위봉(494m)으로 솟아 남북 8km 동서 4km로 뻗어있음. 주로 화강암으로 이루어졌고 소나무가 많아 식생이 다양한 편은 아님. 등반 난이도 초급. 남아있는 절터 147개, 현재까지 발굴 조사된 유물 729개,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도 불림’  

경주행 열차에 오르기에 앞서 정리한 남산의 개요는 그저 ‘하루 설렁설렁 다녀올만한 곳이군’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하지만 이런 요점정리란 얼마나 ‘서울스런’ 것들이었는지.  

‘바위로 만든 미소’를 만나는 순간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을 향했던 발길은 천년의 세월을 거슬러 신라 그들의 서라벌과 부처의 나라에서 어지러운 ‘서울 촌놈’만을 남긴다.       


골골마다 사연 없는 곳이 없구나

종주산행 들머리로 잡은 용장골은 금오봉과 고위봉에서 흘러내린 물이 만나 이룬, 남산에서는 제법 큰 골짜기다. 계곡은 크게 열반골과 절골로 나뉘고 다시 탑상골과 은적골, 비석대골 등 무수한 골짜기로 나뉜다. 여느 산이라면 무슨 골이라 할 것도 없을 작은 지류에까지 저마다의 이름이 붙은 데는 남산의 이력이 깊은 탓이다. 열반골로 난 포장도로를 따라가는 길은 천우사 앞 민가가 있는 너른 공터에서 멈춘다. 

“전엔 텃밭이었는데 등산객들이 많아지며 이제 주차장이 됐지요.”

산행을 함께 하는 경주코오롱산악회 이용숙 씨의 말처럼 차를 세우자 할아버지 한분이 집에서 나와 주차료 천 원을 받아간다. 차 10대면 꽉 찰만한 주차장에서 수입이야 노인의 쌈짓돈에 지나지 않을 테지만 이 작은 일에는 많은 것이 담겨있는 듯했다. 남산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며 찾는 이들이 늘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 밭을 일구고 있었을 것이다.

열반골은 그 이름도 심상치 않거니와 골짜기마다 줄지어 선 비파바위, 이무기바위, 곰바위, 흔들바위 그리고 ‘분암(糞岩)’이라고 표시된 똥바위까지 예사롭지 않은 바위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꼴이었다. 그리고 지도를 따라 열반재를 넘으면 천룡마을이 있는 너른 천룡사터로 이어진다. 완만한 계곡길은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넘나들었던 통로였을 것이다. 예상대로 열반골의 무수한 바위들은 인생사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속뜻을 지니고 있었다. 

열반골에는 신라시대 마을에 살던 아리따운 처녀의 전설이 내려온다. 세속의 유혹들을 멀리하고 부처를 찾아 산속에 들어 길을 찾을 때 수많은 맹수들이 나타나 위협했지만 굴하지 않고 고개를 넘어 부처님 나라에 들었다는 것이다. 

일행은 열반골에서 왼쪽 능선을 따라붙는, 지도에 ‘이무기 능선’이라 표시된 길로 오르기로 했다. 이무기능선으로 이어지는 길은 남산의 유일한 암릉길이다. 경주시산악연맹 사무국장 차극돌씨에 따르면 이곳은 전부터 경주지역 산악인들이 ‘남산 리지’라고 부르며 다니던 길로 주변에 마땅한 암장이 없는 가운데 바위맛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고 한다. 하지만 찾는 사람이 늘며 위험한 구간에는 고정로프를 설치해 놓아 이제는 누구나 오를 수 있는 길이 되었다. 떡고물처럼 부서지는 남산의 산길은 쉽게 길을 넓혀나간다. 이무기능선 오르막에도 등산로가 훼손되어 나무뿌리가 허옇게 드러난 곳들이 곳곳에 있어 지나는 발길을 무겁게 했다. 

1시간여 크고 작은 바위턱을 넘자 남산에서 가장 높은 고위봉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남산은 고위봉과 금오봉 두 개의 큰 봉우리로 이어진 능선이다. 높이로 치면 고위봉이 높지만 주봉은 금오봉으로 여긴다. 위치상으로도 금오봉이 중앙부에 있을뿐더러 고위봉의 이름이야 말 그대로 높은 위치에 있는 봉이라는 뜻이지 별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고 한다. 하긴 신라 사람들이 20여 미터밖에 차이 나지 않는 그 높이를 두고 산을 보았겠는가. 

정상 표지석과 ‘밟지 말라’는 메모가 적혀있는, 이제는 봉분도 희미해진 무덤이 있는 고위봉 정상을 지나 10여분이면 백운재에 닿는다. 백운재는 백운암에서 올라오는 길과 길게 늘어진 용장골 최상류, 봉화대 가는 길과 만나는 사거리다. 이정표가 있는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내려가면 사자봉(432m) 아래 있는 산정호수와 만난다. 인공저수지인 이 호수는 농업용수를 목적으로 1950년대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용장리 산비탈에는 농사짓는 이들이 거의 없어 그저 저수지로만 막혀있는 상태다. 

봉화대 방향으로 발길을 튼다. 고려시대, 또는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하는 봉화대는 서울 남산의 봉수대와 같은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기초가 되는 돌무더기만 아주 조금 남아있을 뿐이다. 그런데 봉화대라고 하면 봉화를 피워 올려 사방에 보일만큼 트여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름드리 소나무로 막혀있는 봉화대가 궁금해 물어보니 김구석 경주남산연구소장은 “이 나무가 몇 년이나 된 것처럼 보입니까?”라며 오히려 되묻는다.

아, 무릎을 칠 일이다. 한 아름이 넘는 나무라야 고작 100년. 남산의 시계로는 바로 엊그제와 같은 시간이다. 지금은 제법 울창하기도 하고 산 정상까지 소나무가 주종을 이룬 숲이 덮여있지만 불과 50년 전만 해도 남산은 벌거숭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근현대를 겪으며 생활을 위한 벌목과 채취가 진행된 까닭이다. 남산을 들어서며 유독 작은 소나무가 많다 여겼었다. 지금 적당히 휘어지며 뻗은 나무들은 경주가 관광지로 개발되며 인공적으로 식은 것들이다. 

봉화대에서 칠불암까지는 완만한 능선을 따르다 급경사의 암반길을 내려가야 한다. 멀리서 보면 길이 끝나는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벼랑에 다다르면 그곳에 신선암 마애보살상이 있다. 종주 중 처음으로 만나는 유적이다. 예전엔 신선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이곳은 가장 좁은 곳이 폭 50여 센티미터에 불과하다. 바위 벼랑을 사이에 두고 부조로 새겨진 마애보살은 ‘유희좌’라고 하는 편안한 자세로 앉아 구름을 탄 모습을 하고 있다. 마애보살과의 첫 대면은 박물관도 아닌데 나라에서 정한 보물을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것이 가슴 벅차기도 하거니와 한번 슬쩍 만져보고 싶은 짓궂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감동은 앞으로 펼쳐질 무궁한 남산의 모습에 비하면 시작에 불과했다.

마애보살상을 지나 절벽을 끼고돌아 100여 미터를 내려가면 칠불암이 있다. 칠불암이라는 이름은 수십 년 전 이곳에 지어진 암자가 이 이름을 썼기 때문이지 원래 이곳에 있던 절이 어떠했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절 마당에 불상 일곱 개가 나란히 새겨있어 칠불암이라 부르는 것이다. 천년이 넘은 불상은 코가 조금 깨진 것 말고는 깨끗이 보존되어 있다. 마당에 얼기설기 쌓아둔 석탑은 지금의 기단으로 사용되는 돌이 본래 옥개석(탑의 지붕돌)으로 본래 4개를 모아 하나가 되도록 설계한 것인데 온전한 모습을 상상해 보면 바위벼랑에 이렇게 큰 탑이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할 뿐이다.      


천년을 가른 40년의 단편 남산순환도로    

내려간 길을 거슬러 올라와 다시 남산의 등허리에 올라붙는다. 봉화대능선을 따라 이영재에 다다르면 순간 좁았던 산길이 뻥 뚫리고 임도가 나타난다. 서쪽 포석정에서 동쪽 서출지까지 남산을 가르는 순환도로다. 1960년대 경주 일대를 관광지로 개발하며 뚫었다는 이 도로는 아직 포장은 되지 않아 긴급한 일이 아니고는 차량을 통제하고 있지만 최근까지 산악마라톤 코스로 사용한다거나 가로등을 놓아 시민들의 산책로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해 논란을 샀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고 흙먼지 이는 울퉁불퉁한 임도를 걷는 느낌은 사라진 신라의 황망함처럼 가슴을 두드린다. 

너른 길은 금오봉 발치까지 800여 미터를 이어진다. 하지만 앞만 보고 걷기에 앞서 오른쪽으로 나있는 골을 따라 용장사터에 들러보지 않을 수 없다. 비석을 세워두기 위해 바위를 파낸 자리만 남아있는 비석대를 지나 200m쯤 가면 용장사터로 내려가는 길과 만난다. 용장사터는 사슴뿔처럼 갈라진 용장골(茸長谷)의 어원이 된 절이다. 조선 생육신 중 한 사람인 김시습은 이곳에 머물며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썼다고 한다. 

능선에서 내려오면 가장 먼저 만나는 삼층석탑은 남산 전체를 기단 삼아 쌓은 탑이다. 굳이 불교를 믿지 않더라도 절벽에 서서 천년 비바람을 맞고도 당당히 서있는 탑을 보면 그 장엄한 위엄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탑이 바라보는 산 아래 세상은 먼 과거와 같다. 이곳은 천상의 세계, 속인은 머무를 수 없는 상상의 땅 유토피아가 된다. 팽팽한 절벽의 수직과 발아래 보이는 황산벌 너른 수평의 조화는 더할 것도 덜 것도 없는 신라인들의 정신세계가 고스란히 보이는 것 같다. 

부조로 새긴 마애여래좌상을 지나다 보면 곳곳에 널린 바위 조각에 쐐기자국을 볼 수 있다. 바위 비탈에 수 톤은 되어 보이는 채석 흔적을 보고 미스터리라거나 현대과학으로는 풀 수 없는 석공술이라는 생각은 접어두자. 그건 위대한 인간정신과 땀이 만들어낸 노력의 결실일 테니까. 다이너마이트와 중장비에 익숙해진 현대인의 시간으로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다른 개념의 시간을 살던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경주 황남빵을 연상케 하는 세 개의 기단 위에 세워진 삼륜대좌불을 만나면 ‘악’하는 비명이 터져 나온다. 부처의 목이 떨어져 없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놀랄 것은 없다. 이곳 말고도 남산의 무수한 불상들이 목 없는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 유독 불두(佛頭)훼손이 많은데 대해 경주국립박물관 권강미 학예연구사는 “불상 중 목 부분이 약하기도 하지만 숭유억불정책의 조선과 일제 강점기를 거쳐 오며 일부러 훼손시킨 경우도 많은 것 같다”는 의견을 냈다. 연화대에 앉은 부처는 생김새로 보아 미륵불이라는 의견이 높다. 미륵불은 56만 7천 년 후에 세상에 나와 중생을 구한다는 미래의 부처다. 참수된 부처는 세상을 굽어보며 이제 눈물도 흘릴 수 없다. 금오봉에서 굽어본 발아래는 10여 년 전 일어난 산불로 나무도 몇 남아있지 않아 한여름의 녹음조차 상상할 수 없다. 아직 검게 그을린 나무둥치의 화상자국이 불어오는 바람조차 막아주지 못하는 그곳은 남산에서 목이 잘린 수많은 부처의 공동묘지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삼릉으로 하산길을 잡아도 더 많은 문화재를 보려면 바둑바위까지 갔다가 내려가는 것이 좋다. 상사바위는 남산에서 가장 작은 불상이 발견된 곳이기도 하지만 민간신앙터로 불교가 전해지기 훨씬 전부터 바위를 섬기던 옛사람들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손녀뻘 소녀를 사랑하던 노인의 애절한 사연이 담긴 상사바위는 민간신앙터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남근석과 여근석이 있다. 이곳은 달리 산아당(産兒堂)이라는 이름으로 불려 왔다는데 여근석 아래에는 1856년 이곳에서 기도해 아들을 낳았다는 기록이 적혀있다.      


남산에서 가장 많은 유적이 묻혀 있는 냉골

상사바위에서 내려 보이는 마애대좌불을 시작으로 냉골 하산로는 눈이 즐거운 길이다. 남산 발굴 유적이 가장 많은 이곳은 그동안 다리품을 팔아온 노력을 갚아 줄 만큼 보따리 가득 이야깃거리를 담아간다. 바위벼랑에 새겨진 높이 7m의 마애불은 남산에서 가장 큰 부처상이다. 누군가 그랬다. 남산의 불상은 바위에 새긴 것이 아니라 바위 속에 숨어있는 부처를 찾아낸 것이라고. 아마추어의 눈으로 본 불상이 예술성이 어떻고 고고학적 가치가 어떤지 따져 묻기도 우스운 일이지만 첫인상만으로도 그 불상들은 예사롭지 않은 서기를 낸다. 머리만 양각으로 새기고 몸통은 평면에 새긴 마애대좌불. ‘시간이 없어 몸통은 대충 새겼나 보다’ 이런 생각이 들만도 하지만 전체를 놓고 보면 산과 바위까지도 부처로 보았던 신라인들의 불심을 엿볼 수 있다.

상선암 물줄기에 목을 축이고 아래로 난 길을 따르다 주 등산로를 버리고 불상답사코스 표지판이 있는 왼쪽 작은 길로 가면 제7절터로 이름 붙여진 곳에 석조여래상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얼굴 생김새가 꼭 나병환자 같다. 복원 과정에서 시멘트로 깨진 턱을 새로 덧붙였기 때문이다. 돌팔이 성형외과 의사가 병 고치려다 오히려 부작용만 키운 셈이다. 손으로 잠시 입을 가리고 보면 이만큼 잘 생긴 부처도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배광(背光)’이라고 하는 부처상 등 뒤에서 나는 서광을 표현한 것은 깨져 바닥에 흩어져 있는데 수십 년 전 아이들의 장난으로 떨어져 깨졌다고 하니 아쉬움이 더한다. 

불상이 떨어지고 깨지는데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한번 사라지면 다시 만들 수도 온전히 복원할 수도 없는 바위의 성질 탓이다. 백운암 스님에게 “목 떨어진 불상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하고 물었더니 “그깟 바윗돌 하나 깨진 걸 갖고 마음 쓰지 말라”라고 했다. 어쩌면 더 안타까운 건 천년이 아니라 만년 백 만년을 하나의 모습에 가두고자 하는 욕심 같은 것이 아닐까. 

바위 주름을 그대로 살려 새긴 선각아미타삼존상은 유심히 들여다봐야 그 모습이 보인다. 바위결은 마치 커튼을 드리우고 현세와 바위 안의 세계를 가르는 것 같다. 조각에만 눈길을 뺏기다 보면 놓치기 쉬운 게 있다. 바위 위쪽에 올라보면 전각을 세웠던 홈과 함께 가로로 긴 홈통이 파여 있다. 부처님 얼굴로 빗물이 흘러내리지 않게 물길을 돌리는 수로로 사용되던 곳으로 신라인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흔적이다. 이쯤 되면 발길에 차이는 돌 하나까지 조심히 밟을 수밖에 없다. 흙속에 묻혀 있는 천년의 세월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인간 이상의 시간이다. 

삼릉으로 내려오는 길, 아예 목과 두 손마저 잘린 석불좌상은 입이 없어 말할 수 없고 무얼 어떻게 표현해 볼 도리가 없어 답답하기만 하다. 하지만 가슴을 칠 필요는 없다. 북쪽 마루에 걸린 관세음보살상은 웃는 듯 웃지도 않는 듯 희미한 표정으로 천년 그 자리에서 황산벌을 내려 보고 있을 뿐이니까. 따져 묻지 않으련다. 아, 바위의 미소.      

-2006년 1월.

이전 05화 가자 벌거벗은 봄의 골짜기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