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선운산의 이야기들
선운사 앞을 흐르는 선운계곡은 언뜻 보기에 물빛이 검다. 이 계곡을 처음 찾은 사람들에게는 탄광촌에 흐르는 검은 석탄물이 생각날 법도 하다. 하지만 현대 과학은 차의 떫은맛을 내는 성분인 탄닌(tannin)이 돌에 스며들어 검게 보이는 것일 뿐, 실제로 물이 탁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계곡물에 탄닌이 많은 까닭은 선운산 일대의 활엽수 탓이다. 산에 활엽수가 많다는 것은 이제 그 숲이 성숙단계에 들어섰다는 뜻이니 좋은 일이다.
검은 물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두 계곡의 합수점과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물빛은 두 가지로 바뀐다. 유독 희여재골에서 흘러내려오는 물만 검은빛을 띠고 있을 뿐, 도솔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여느 계곡과 다르지 않은 맑은 빛을 띠고 있다. 궁금증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처음부터 선운계곡의 물빛은 검었을까?
사람의 땀으로 일군 산
눈을 씻고 찾아봐도 선운산에 선운(禪雲)이라는 지명은 없다. 하나 있다면 선운사뿐이다. 선운산의 본래 이름은 도솔산(兜率山)이다. 그래서 일주문 현판에 걸린 글자는 ‘도솔산 선운사’다. 그런데 대동여지도에는 선운산이라고 표기되어 있고 지금도 누구나 선운산이라고 부른다. 대체 절의 기운이 얼마나 세기에 산 이름까지 바꿔 놓았는가. ‘노을에 깃들고 구름에 머물면서 참선 수도 한다’는 선운을 찾는 발걸음은 처음부터 번뇌 망상일 수밖에 없다.
제 이름을 개명한 선운산을 이야기하려면 선운사에서부터 거슬러 올라야 한다. 선운사가 들어선 땅은 원래 바닷물이 들고 나는 갯벌이고 늪이었다. 그것은 배를 매어놓은 흔적과 조개껍질도 간간이 발견된다는 능선 위의 배맨바위가 말해준다.
절을 세운 사람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불모의 늪가에서 굴을 찾아 참선을 시작한 사람은 왕위를 버리고 이곳까지 건너왔다는 신라의 진흥왕이란다. 그런데 이 또한 헷갈린다. 백제 땅 한구석에 웬 신라왕이란 말인가. 차라리 또 다른 창건 설화인 검단선사 이야기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선운사가 들어설 즈음 이 지방에 심한 눈병이 돌았다. ‘눈병을 고치려면 이 땅에 숯을 한 가마니씩 가져다 부으라’는 선사의 말에 사람들은 숯짐을 지고 희여재를 넘었다. 늪지에 숯이 쌓여가자 무른 땅이 다져지고 그곳은 절을 지을 만큼 탄탄한 기반이 닦이게 되었다. 그래서 희여재골은 사람들이 지고 넘던 숯가루가 떨어져 그리 검은 것은 아닐까.
선운사가 병을 고치는 용한 도량으로 알려지자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졌다. 하지만 갯벌을 건널 수는 없으니 산을 넘어 절을 찾았다. 선운사 가는 옛길은 고개를 넘는 길이라 지금의 등산로와는 반대다. 그래서 선운사에서 도솔암 오르는 길에 있는 미륵불상은 그 유래를 모르고 지나다가는 뒤통수밖에 볼 수 없다. 지금은 선운사보다 산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어 등산객을 배웅하는 것 같지만 옛날에는 산문 밖까지 마중 나온 형상이었던 것이다.
공양거리를 지고 오가던 고갯마루는 사방 절벽이고 외길이라 흉년이 들면 도적이 들끓었다. 절을 지키던 검단선사는 도적들에게 소금 굽는 법을 가르쳐 너른 곰소만에서 그들이 먹고살 길을 열어주었다. 얼마 전까지 염전에서 생산된 소금 중 최상품을 골라 선운사에 보은염이라는 이름으로 공양하는 풍습이 남아있던 것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이름을 짓는 것도 사람이고 부르는 것도 사람이다. 그 이름이 도솔에서 선운으로 변한 까닭은 도솔보다 선운의 뜻이 깊거나 멋들어져서가 아니라 선운사가 처음 바탕부터 사람들의 삶 속에서 뒹굴며 자라왔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선운산에서는 ‘구름밥 먹고 무지개 똥 싸는’ 우아한 염불보다 흙투성이 촌로의 육자배기 가락이 더 어울린다.
황무지에 생명을 살려내는 땅
거슬러 올라가자면 끝이 없다. ‘눈창 비창 바람창’이라는 척박한 고창땅은 먼 과거에는 그렇지만도 않았나 보다.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고인돌이 그렇다. 무덤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100톤이 넘는 바위를 끌어올리자면 1000명이 넘는 사람이 힘을 써야 했다니 이 고장에는 전부터 사람이 많이 살았고, 따라서 먹고 입을 것도 풍부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이 설령 무덤이었다 할지라도 옆에 서면 그저 따스한 햇살에 데워진 바위에 기대는 듯 편안하기만 하다. 그래서 고창의 무덤들은 더없이 친근하다. 평야에 솟은 수십 미터의 둔덕은 온통 선산이고 무덤이다. 가파른 비탈이 없기에 봉분에 용맥을 두지 않고 어머니 젖가슴처럼 둥글게 만든 무덤들을 보면 죽은 사람의 거처라는 생각에 앞서 예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조상이 굽어보고 붉은 흙에서 생명을 일구는 모습은 고창에서든 볼 수 있는 농경사회의 전형이다.
선운산이 길러낸 사람의 모습은 제각각이다. 하지만 사람이 땅을 닮아간다면 이곳에서 난 사람의 모습은 진취적일 수밖에 없다. 추사 김정희와 논쟁을 벌이며 불교사상계의 기폭제가 되었던 백파긍선(白坡亘璇․1767~1852). 조선 영조 때 고창에서 태어난 백파는 선운사에서 머리를 깎고 평생 전국을 돌며 참선수도하고 살았다.
선운사 앞마당에는 절을 짓고 자투리 나무로 만든 만세루가 있다. 제대로 된 목재로 만든 건물이 아니기에 지붕아래서 보면 얼기설기 엮어놓은 천장은 절로 웃음이 날 정도로 해학이 넘친다. 하지만 그 서까래 한 구석에 조각된 용 두 마리의 모습에서 시선은 멈춘다. 입을 다물고 있는 용은 곧 선이요, 입을 열고 있는 용은 법(法)이라는 설명은 200년 전 백파와 추사가 넘나들던 세계를 어렴풋이나마 짐작케 하기 때문이다.
백파가 입적한 뒤 추사가 비문을 썼다는 백파율사비는 본래 순천 영구산 구암사에 있다가 지금의 선운사 부도밭으로 옮겨온 것으로 ‘가난해서 송곳을 꽂을 땅은 없으나 그 기세는 수미산을 삼킬만하다’라고 적고 있다. 수미산을 삼킬 기세는 이후에도 줄곧 이어져 환응 탄영과 영호당 정호로 이어지는 선불교의 종주를 이어나가 미당 서정주까지 가 닿았다.
미당의 외할아버지는 동학교도였고, 그의 아버지는 고창의 거부 인촌 김성수 일가에서 한때 머슴살이를 했다고 한다. 훗날 파행을 겪기도 한 그의 행보가 얄미울망정 그 삶과 시대의 배경은 이 땅의 사람들이 걸었던 그 길과 다르지 않다.
선운산의 무수한 바위벼랑을 거슬러 오르는 클라이머들도 빠뜨릴 수 없다. 국내 최대의 자유등반 대상지라는 이름을 얻기까지 그들이 흘렸던 땀방울 또한 지난날 숯가마를 지고 희여재를 넘었던 사람들의 그것과 닮은 것이 아닐까.
가장 북쪽 끝에 솟은 경수산(444m)를 제외하고는 도솔봉(336m), 개이빨산(345m), 청룡산(314m), 비학산(307m)등 고만고만한 높이의 봉우리가 늘어선 선운산은 높이로 치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도솔제를 에두른 그 능선을 모두 걸어서 돌아보려면 하루가 모자랄 정도로 큰 산이 되고 만다. 1993년 12월에 준공된 도솔제는 농업용수 확보를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정작 물이 흘러내리는 삼인리에는 논이 별로 없다. 처음 개발 때부터 배를 띄울 관광용이라는 의혹의 목소리가 나왔지만 아직 그곳은 조용하기만 하다. 가뭄이 들어도 선운계곡의 바닥이 드러나지 않도록 도솔제는 물줄기를 흘려 찾는 이들의 마음을 식혀줄 테지만 골짜기를 걷던 옛사람들의 발자국은 다시 볼 길이 없다. 낙조대에 올라 저무는 서해의 태양을 바라볼 수 있다면 당신은 행운아리라.
그리고 이 못생긴 부처를 보라
도솔계곡은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그것은 풍수지리학적으로 서출동류(西出東流)의 형상이다.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지형인 한반도의 물줄기는 당연히 서쪽으로 흘러야 옳다. 그런데 그 땅의 서쪽 끝에 솟은 300여m의 야트막한 산 하나가 물줄기를 동으로 돌리며 일어서 있다. 당돌한 반역인 셈이다. 그런데 그 반역은 성공했는가? 아니, 잠시 동으로 몸을 틀었던 물줄기는 인천강을 만나 곰소만으로 흘러가며 목을 꺾고 만다. 그래서 서러운 산의 눈물을 많이 먹은 곰소만에는 늘 짠 바람이 분다. 인천강은 바닷물이 들어올 때 바람을 몰고 온다고 하여 풍천(風川)으로 불린다. 심해에 살던 장어도 산란기가 되면 생명을 잇기 위해 그 물줄기를 따라 뭍으로 거슬러 올라온다.
이런 선운산의 지세는 희망을 현실로 살아가고자 하는 일 같아 안타깝다. 꿈을 손에 쥐는 일은 늘 고달프기 마련이다. 그것은 물에 사나 뭍을 동경하는 한 마리 장어와도 같기 때문이다. 몸 푸른 장어가 강줄기를 거슬러 올라 뭍에 오르는 순간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도 그렇게 꼬리질을 계속한다면 생에 대한 하나의 반역일 수밖에 없다. 고매한 수선(修禪)은 어느덧 간데없고 제 방향과 순리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어디 장어뿐이랴. 뭍에 기대어 사는 것들은 어찌도 그 땅의 기운을 꼭 빼어 닮았는지.
옛사람들은 도솔계곡의 한가운데에 미륵을 새겼다. 도솔암 마애불이 그것이다. 이렇게 야위고 못생긴 부처를 본 적이 있나. 어떤 이들은 그것이 척박한 땅에 자비행을 베풀었던 검단선사의 초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유독 손바닥이 굵직한 이 미륵은 분명 일하는 부처의 모습이다. 필경 그 해에는 흉년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비쩍 마른 민초의 눈에는 살찐 부처가 보이지 않았으리라. 56억 7천만 년 후에 세상에 나와 중생을 구한다는 미륵은 배고픈 사람들에게 막연한 희망처럼 그곳에 새겨졌다. 그리고 그 미륵에 대한 믿음은 이상을 현실에서 구하고자 하는 민중의 메시아로 오래도록 도솔천에 머물러 왔다.
마애불의 비결이 열리는 날 한양이 망한다는 이야기는 바닷바람에 실려 온 턱없는 풍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절실했다. 그래서 벼락살을 맞을 각오를 하고도 손화중은 미륵의 배꼽을 부수고 비결을 꺼냈다. 산궁수진(山窮水盡)의 지세인 선운산처럼 벼랑 끝에 몰린 세상살이는 벼락을 맞아 죽으나 굶어 죽으나 매 한 가지였으리라. 처음에는 그 수가 삼백이었으나 석 달 뒤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인 무장읍성에 모인 백성은 일만을 웃돌았다. ‘서면 백산이요 앉으면 죽산’이라던 그들의 반역도 성공했는가? 성공한 반역은 반역의 이름을 갖지 않는다. 그 역시 거꾸로 흐르다 목이 꺾인 도솔계곡의 설움처럼 한이 되어 남아있을 뿐이다. 이제 물길을 차고 오르던 장어도 사각의 양어장으로 돌아가고 사람이 곧 하늘이던 그날의 함성도 농민군의 진격로를 알리는 길가의 표지판을 따라 단정히 정비되어 있는 곳. 그래도 선운산은 절망으로 대할 수 없는 미래의 산이다. 황톳길을 맨발로 걷던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이상하게도 가슴은 후련해진다.
‘반쪽만 남은 돌미륵 / 모로 누운 채 잠든 내 / 주검 곁에서 웃어라 / 너는 크게 웃어라 // 아아아 / 이 커다란 품.-김지하 시 <바램.1>중 에서’
이제 물도 끝나고 산도 끝나는 반도의 모퉁이에 마지막 몸부림처럼 솟은 4월의 선운산을 찾거들랑 그대는 흐느껴 울어도 좋다. 하지만 황사먼지 속에 핏빛 동백이 모가지 채 떨어져 나간다 해도 절망만은 하지 말라. 서에서 동으로 거스르는 도솔계곡은 큰 물줄기를 만나 그 색이 변한다 해도 영원히 썩지 않고 흘러갈 테니. 못생긴 천년의 마애불도 변함없이 그대를 반겨 맞을 테니.
20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