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명산을 가다] - 울릉도 성인봉
묵호항에서 닻을 올린 한겨레호가 동쪽으로 기수를 돌린 지 10여 분도 되지 않아 사람들은 속을 게워내기 시작했다. 동쪽에서부터 밀려오는 파도는 끝없이 뱃머리에 부딪쳤고, 그럴 때마다 배는 크게 울렁거렸다. 그 섬에 닿고 싶으면 당신의 은밀한 과거조차 모두 토해 내버리라고, 바다는 쉴 새 없이 사람들을 흔들어대고 있는 것 같았다.
먼 옛날, 그 망망한 바다 어딘가에 있을 무언가의 이상(理想)을 찾아 한밤에 돛을 올렸을 유사무서(有史無書)의 사람들도 그러했으리라. 울릉도행은 바람을 거스르는 반역의 길이요, 금단으로의 여정이며 환상을 실재로 만들어 가는 상처투성이 횡보(橫步) 같은 것.
갈매기 한 마리 날지 않는, 사방 바다뿐이던 길은 2시간 30여분 만에 배가 도동항에 닻을 내리는 찰나 다시 뭍의 시간으로 빠르게 순간이동을 한다. 사방 자아내는 탄성과 이리저리 뒤엉킨 사람들은 그야말로 인파(人波)가 되어 여기저기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좁은 골목길 사이사이로 다닥다닥 붙은 식당, 슈퍼마켓, 여관, 주점, 다방, 불야성…. 문득 고개를 들면, 거기에 성인봉 지그시 그대를 내려 보고 있을 터.
울릉도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3세기에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대해 쓴 <삼국지 위지 동이전 > 옥저조에서 찾을 수 있다. 위나라에서 고구려를 침범했을 때 함경남도 남부지역까지 다다랐던 중국 장수 왕기가 동네 사람에게 바다 동쪽에도 사람이 사느냐고 묻자 “언젠가 풍랑을 만나 동쪽의 한 섬에 도착해 사람을 만났지만 말이 통하지 않았다”는 대답을 들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허나 지금의 학자들은 울릉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이 그보다 앞선 상고시대부터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1세기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이사부가 우산국(于山國)을 정벌한 건 그로부터도 400여 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건국 이후 지금의 강릉 부근까지 땅을 넓혀가던 신라는 지증왕 때에 이르러 고구려와 대치하며 더 이상 북진이 어려워지자 하슬라(강릉)의 군주 이사부에게 동해의 가장 큰 섬을 점령하라고 명한다. 그곳이 바로 동해의 유일한 섬 울릉도였고, 이사부는 배를 끌고 출전하지만 오랫동안 바다와 살아온 우산국의 병사들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슬라로 돌아온 이사부는 다시 병사를 일으켜 우산국으로 향하는데, 바다에서는 도저히 승부가 나지 않을 것 같아 한 가지 꾀를 내기에 이른다. 뱃머리에 거대한 사자를 나무로 깎아 세워 우산국의 병사들을 겁주기로 한 것이다. 사자는커녕 뱀 한 마리도 본 적 없는 섬나라 사람들은 결국 나무 인형이 두려워 신라군에 항복했다는 이야기가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 13년(512) 편에 전해온다.
우산국 사람들은 어떻게 울릉도의 존재를 알고 그곳에 건너갔으며, 이사부가 섬에 올라 본 건 과연 무엇이었을까. 해답은 간단하다. 울릉도는 육지에서 바라보이기 때문이다. 태백산 정상에 올라 본 섬이 분명 울릉도였다고, 토박이 최희찬 씨는 이야기했다. 얼마 전 울릉도에서 육지 사진 촬영에 성공했다고도 하니, 옛사람들도 맑은 날이면 산에 올라 섬의 모습을 확인했으리라. 바다로 막혀 쉽게 가 디딜 수 없는 그 땅에 대한 무성한 기대와 상상은 사람들에게 더욱 높은 이상향으로서의 땅을 마음에 새기게 했는지도 모른다.
울릉도는 무릉도라 불렸다. 신선들이 사는 땅. 하나 사람들이 그 섬에 닿았을 때, 그전까지 상상했던 무릉도원의 모습은 정작 기대를 넘어선 현실이었다. 1871년 간행된 이유원의 <임하필기>에서는 “울릉도에는 쥐가 고양이처럼 크고 고양이는 개처럼 크고 포도는 계란처럼 크고 복숭아는 박처럼 크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과장이라고만 볼 수 없는 것이, 그 이전에 펴낸 <만기요람>이나 <오주연문장전산고>와 같은 책에도 ‘되를 만들 만한 복숭아씨’ 라거나 ‘서까래 같은 대나무’라는 문장이 등장해 울릉도의 생태계가 육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요로웠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사부가 확인한 우산국의 모습은, 삼국이 영토확장을 위해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때로 민중이 기근에 시달려야 했던 속계의 그것과 달리, 싸움을 모르고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여유롭게 살아가는, 말 그대로의 ‘무릉도원’이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듯 땅이 풍요로웠던 건, 지금의 관점으로 봐도 이유가 분명하다. 현재 울릉도에 살고 있는 동물은 천연기념물인 흑비둘기를 비롯해 조류 54종과 곤충 345종이 분포하고 있다. 조사된 식물은 모두 592종으로 울릉도만의 고유종인 너도밤나무, 섬잣나무, 솔송나무를 비롯해 이루 열거할 수 없는 야생화와 풀들이 자란다. 도둑, 뱀, 공해가 없고 바람, 여자, 물, 돌, 향나무가 많다는 ‘3 무 5다’를 넘어 그야말로 ‘1000다(多)’쯤 되는 땅과 바다와 하늘의 생명들이 살아가는 터전인 것이다.
이렇게 많은 생명들이 뿌리내릴 수 있었던 건 울릉도의 비옥한 흙과 늘 마르지 않는 물, 큰 추위 없이 사철 온화한 해양성 기후의 영향이 크다. 6500만 년 전 신생대 제3기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울릉도의 윤곽은 두 번의 큰 폭발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울릉도는 제주도와 같은 화산섬이지만 살펴보면 같은 구조는 아니다. 해저는 성긴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땅 위로 솟아오른 부분은 비교적 단단한 조면암, 안산암, 응회암 등으로 되어있는데, 그래서 비가 오면 곧바로 땅 밑으로 스며드는 성긴 제주도의 토양과 다르게 울릉도는 늘 물을 지닐 수 있었고, 물을 먹고 자란 각종 식물들은 더욱 수분을 머금어 뭇 생명들의 터전을 만들어 준 것이다. 육지의 흙이 대부분 산성인데 반해 울릉도는 ph 6.8~7.0의 중성으로 어디에 무엇을 심으나 비옥하게 잘 자란다. 먹이사슬의 가장 상위가 매나 괭이갈매기와 같은 조류였기에, 육지에서와 같은 육식성 천적이 없는 것도 울릉도를 풍요롭게 만든 한 가지 이유일 테다.
이사부의 정벌 이후 400년 넘는 시간 동안 울릉도는 역사에 등장하지 않았다. 고려 초 태조 13년(930) 백길과 토두라는 울릉도 사람이 울릉도에서만 나는 여러 가지 공물을 들고 왕을 찾아와 벼슬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동안 울릉도는 무릉도라는 이름에 걸맞게 아무도 간섭하지 않고, 누구도 굶주리지 않는 평화와 풍요의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허나, 이런 풍요와 평화를 시기하는 세력은 늘 있어왔다. 고려 초 동북 여진족의 침략과 함께 동해에 해적이 들끓기 시작하며 울릉도는 혼란의 시기를 겪게 된 것이다. 울릉도에 관한 기록은 1032년을 끝으로 끊기고 마는데, 해적과 왜인들에 몸살 앓던 울릉도 사람들이 모두 육지로 나와 버린 것이라고 사람들은 추측한다.
이후 고려와 조선을 지나며 울릉도는 차츰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간다. 조정에서는 몇 번 울릉도에 사람을 살게 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지만 그전 같은 영화는 다시 재현되지 않았다. 울릉도와 일본의 관계는 참으로 악연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조선 세종 때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 전까지 500여 차례나 왜구의 침략을 받았다는 울릉도는 늘 풍요로운 물산 탓에 그렇게 시달려 온 것이다. 이후로 근대의 수탈을 지나 망언을 일삼지 않는 지금 이 순간까지 울릉도와 일본의 관계는 참으로 멀고도 멀다. 허나 그들이 지금까지 우리 땅 울릉도와 독도에서 벌인 만행을 생각하면 무릎 꿇고 석고대죄하지 않는대야 울릉도에 일본인 관광객 찾아오지 않는다고 해서 아쉬울 것 하나 없다.
하지만 정작 이런 왜구의 출몰에 중앙 권력의 대응은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조선은 진도와 같은 큰 섬을 포함해 왜구의 침략이 잦은 섬에 대해 ‘공도(空島) 정책’을 내세웠고, 살려고 육지를 떠난 사람들을 오히려 군대를 보내 잡아들였다. 최근 울릉도 주민들이 주축이 돼 독도에서 열고자 했던 각종 일본 망언 규탄 집회들이 천연기념물 보호라는 둥 나라의 규제에 묶이고 언론통제로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그런 권력의 사대적 발상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50년대 독도의용수비대원으로 청춘을 바쳤던, 울릉도 주민 정원도 옹은 2005년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매년 독도에서 열리는 3․1절 행사 때 홍보용으로 자리나 지키고 있는 게 무슨 소용”이냐며 “그런 행사에는 이제 참석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라고 한탄했다. 여전히 한국인이 한국땅 독도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30분 남짓일 뿐이다. 독도의 실상이란 그 높고 푸른 상징과 달리 그저 사람들에게 각광받는 사진촬영지로만 전락한 것은 아닐까.
울릉도 사람들은 거세다. 거친 바다와 싸우고 가파른 비탈을 일구며 살아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이런 기질의 근원은 옛사람들이 생각했던 무릉도원과 또 떼어놓을 수 없다. 육지에서의 팍팍한 삶을 도무지 견딜 수 없었던 민초들은 새로운 이상을 좇아 내일 죽더라도 오늘은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거친 바다를 건넜을 것이다. 고향을 뒤로하고 생면부지의 땅으로 향하는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생각은 당연 세상의 모든 질서에 대한 거부였을 테지만, 이는 끈질긴 생활력으로 다시 피어나게 되었다. 조선에서 울릉도 이주민을 잡아들인 이유 중 하나는 그 먼 섬으로 향한 데에는 분명 불순한 의도가 있을 것이라는 억측 때문이었다. 울릉도 이주민은 육지에서 범죄를 저질러 도피했거나 세금과 부역을 면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허나 한때 무인도였던 이 땅을 지킨 사람은 장삼이사 안용복이었으며, 그는 곧 민중이었으니, 무성히 아무렇게나 자라나 풍요를 일군 울릉도 원시림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현재의 울릉도 사람들은 1882년 고종의 공도정책 해금 이후 감찰사 이종무를 파견하고 전국에서 이주민을 모아 도착한 이들의 후손이다. 지난 120여 년 간 그들은 다시 비탈을 일구고 밀림을 베어내며 무릉도원으로 향한 새로운 길을 개척해 왔다. 하지만 아직 그들이 가야 할 길은 멀고도 험할지 모른다.
4대째 울릉도에서 살아왔다는 한 토박이 주민은 쓴 소주를 목으로 넘기며 “육지에서 950원짜리 술을 평생 슈퍼마켓에서 1500원 주고 사 먹고 있는데, 섬에서 사는 것도 서럽지만 대체 나라에서 우리에게 해준 게 무어냐”라고 일갈했다.
21세기의 이 시대에도 면적 73㎢, 둘레 42km에 불과한 작은 섬을 한 바퀴를 도는 것은 불가능하다. 1962년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 의장의 울릉도 방문 이후 착공한 섬 일주 도로는 환경보호의 논리 하에 40년째 이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울릉도 사람들은 이제 염원을 벗어나 사람이 죽고 난 뒤의 환경이란 과연 무엇인가 의문을 던질 지경에 이르렀다. 민간 독점항로에 묶여 며칠씩 줄을 서야 탈 수 있는 육지행 배도 그렇거니와 더 이상 예전처럼 찾아오지 않는 오징어 떼도 울릉도를 짙은 해무에 쌓여있게 만드는 것들이다.
울릉도는 이제 다시 돛을 올리고 싶다. 그 옛날 부푼 가슴을 안고 미지의 바다로 나아갔던 장삼이사 유사무서의 삶처럼. 가자, 그 섬엘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