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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준 Jun 11. 2024

경원선 따라 소요의 길을 떠나다

[100명산을 가다] 동두천 소요산

아버지는 한글날 점심 무렵 배낭을 꾸리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배낭을 꾸린다는 것은 필경 생각할 거리가 생긴 것이었다. 아버지의 발걸음은 소요산으로 정해져 있었다. 아버지는 소요산(逍遙山․587m)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생각할 거리가 있으면 이리저리 슬슬 거리며 그 산을 돌아다니다 오곤 했다. 아침 뉴스를 보다 텔레비전을 꺼버렸던 아버지는 둥근 배낭을 메고 마른 가을 같은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한북정맥 줄기가 양주 천보산에서 갈라져 신천(莘川)을 따라 한탄강으로 흐르는 허리께에 소요산이 있다. 여섯 개 봉우리가 말발굽형으로 생긴 소요산에 들면 아버지는 꼭 태아가 되어 할머니의 자궁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고 말해왔다. 그래서 아버지의 소요산 소요는 단순히 저잣거리에서 자연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팽팽한 시론(時論)에서 출발한 현재가 점차 지나온 역사와 알 수 없는 과거로 스며드는 과정이었다. 

소요산까지는 집 앞 큰 길가 정거장에 서는 시외버스를 타면 삼십 분이면 되었지만 아버지는 유독 의정부역까지 먼 길을 돌아 한 시간에 한 대뿐인 통근열차를 탔다. 종착역 원산에 절반도 못 미치는 연천군 신탄리까지만 운행하는 경원선 통근열차는 매시 20분에 의정부역을 출발했다. 열차는 십여 년 전만 해도 좌석 하나에 세 명이 앉게 되어있는, 정말이지 낡디 낡은 비둘기호였다. 아버지의 타임머신 같던 비둘기호는 20세기의 끝날에 마지막 운행을 했다. 그날도 아버지는 휴가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하는 사병들 틈에 끼어 소요산행 열차에 올랐었다. 


열차는 정확히 삼십오 분을 달려야 소요산역에 도착했다. 소요산역에 도착하기 전까지, 주내와 덕정역을 지나면서도 차창 밖으로 보이는 모습은 서울의 여느 교외 풍경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열차가 동두천으로 접어들면 들녘 사이로 아파트 공사 중인 타워크레인 대신 탱크와 장갑차가 나타나곤 했다. 황색 지붕이 정확히 열 지어 서있는 미군 2사단의 담장 안 풍경이었다. 


동두천에 영문 간판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가 다섯 살 때인 1951년부터였다. 캠프 케이시의 정문을 지키고 있는 도끼를 든 인디언 석상은 1970년부터 동두천에서 근무해 아버지와 군번이 비슷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도 전역을 못하고 위병소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것이었다. 주한미군 보병의 절반이 주둔하며 동북아 최고의 주둔군 규모와 화력을 자랑한다는 미군 2사단에는 한국군에 한 대도 없다는 아파치 헬기가 40대도 넘게 있었다. 열차는 빠르게 속도를 냈지만 담장 너머로 보이는 아파치 부대의 사열은 아직 끝나지 않고 있었다.  


동두천시 면적의 42%는 1956년부터 한미주둔군지위에 관한 협정에 따라 미군에게 공여되어 있기에 창밖 풍경이 황색 일색인 것은 당연했다. 미군의 땅은 한국정부의 간섭 없이 자율적 사용권을 가지고 있는 전용공여지뿐 아니라, 소유권은 개인에게 있지만 땅주인의 동의 없이 군사상의 이유로 사용할 수 있는 지역공여지도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아버지는 그 말이 미군들이 부대로 들어가는 송유관을 묻겠다며 뜬금없이 내 집 앞마당을 파헤칠 수도 있다는 것인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2004년 미군 일부가 이라크로 빠져나가며 1229만 평의 땅이 2008년까지 다시 원래의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수십 년 전 국방부에서 땅을 매입하며 돈 대신 주었던 징발보상증권이라는 종이는 찢어버린 사람들이 더 많다고 했다. 소요산은 처음부터 미군 공여지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보산동 기지촌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라서인지 대부분의 네온사인 간판이 꺼져있었다. 80년대만 해도 보산동은 일 년 내내 불이 꺼지지 않는 동두천 경제의 중심이었다. 미군기지 일부 반환이 결정되고 난 2003년에도 작은 핫도그 노점을 포함한 400여 개 점포에서 미군을 상대로 벌어들인 돈은 800억 원 규모였다고 동두천시는 파악했다. 


한국인의 출입이 금지된 미군클럽 앞을 아버지는 한 번도 열차에서 내려걸어보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열차가 보산동을 지날 때마다 윤금이라는 이름밖에 생각나지 않는 자신이 참 답답했다. 그 이름이 잊힐 때쯤 이기순, 신차금이라는 이름이 차례로 보산동 골방에서 지워졌고 아버지가 붉은 티셔츠를 입고 월드컵 4강에 열광할 때 신효순, 심미선이라는 작은 이름표는 미군 2사단의 장갑차에 아래 붉게 깔려 있었다. 


아버지는 으레 그랬던 것처럼 황색 지붕의 풍경이 끝날 즈음 미리 담배를 손에 들었다. 열차는 몇 분 후면 소요산역에 도착할 것이었다. 비둘기호 시절, 객차의 수동 미닫이문을 열고 소요산역에 내리면 청기와 지붕에 반사된 가을볕이 눈을 간질이곤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하늘이 맑은 날 소요산역에 내려도 더 이상 실눈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아버지도 알고 있었다. 연말 개통을 앞두고 있는 경원선 전철화 사업에 맞춰 옛 건물을 허문 소요산역은 회색 콘크리트 벽을 하고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기 때문이다. 공사가 완료되면 이제 배차시간이 삼십 분으로 줄고 열차도 의정부전철역에서 연장운행 되어 서울 종로까지 한 시간 이십 분 남짓이면 닿을 수 있게 된다.  


소요산역에 내린 아버지는 횡단보도의 파란 불을 기다리며 라이터 불을 그었다. 40일 넘게 비가 오지 않아서인지 건조한 날씨에는 아버지의 담배도 더 빠르게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1981년부터 불리게 된 국민관광지라는 입간판을 지나 허름한 음식점 골목과 주차장을 가로질러 반공희생자위령탑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길 때에도 월요일 오전의 소요산은 고요하기만 했다. 


아버지는 주차장 귀퉁이에서 칡즙이며 군밤을 파는 할머니를 스치며 잠시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지만 발길을 돌리지는 않았다. 아스팔트길 왼쪽으로는 보도블록을 깔아놓은 단풍나무숲길이 있었다. 아버지는 그 길을 좋아했다. 하지만 단풍나무숲길에서 가을색을 찾기는 힘들었다. 어찌 된 일인지 나뭇잎은 방사능 낙진을 맞은 것처럼 산채로 말라가고 있었다. 바람이 한번 쓸고 지나면 미라 같은 잎사귀들은 후드득거리며 덩어리째 떨어지곤 했다. 낙엽 사이로 스물한 번째 소요단풍축제를 알리는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단풍나무의 집단 사산(死産)이 가뭄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아버지는 생각했다.     


아버지는 아스팔트길을 따라 올라 일주문을 지나면 만나는 원효폭포 앞 벤치에서 잠시 배낭을 풀 계획이었다. 본격적인 등산로가 시작되는 원효폭포까지는 약수터가 세 군데 있는데 세 곳 모두 수도꼭지를 틀면 약수가 나오는 곳이었다. 폭포는 말랐는데 약수는 끊이지 않고 있었다. 바가지에 물을 받아 마시던 아버지는 원효처럼 생각에 잠겼다. 


원효는 곧 소요산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었다. 해골바가지 물을 먹고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깨달은 원효는 자루 없는 도끼를 찾아다니다 요석공주와 결혼해 설총을 낳더니 어느 날 홀연히 속세를 떠났다. 그리고 찾아든 곳이 소요산이었다. 원효의 뜻이 아무리 높다 한들 졸지에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가족들의 마음까지 가벼웠으랴. 요석공주는 어린 설총을 데리고 소요산 공주봉 기슭에서 살며 매일 원효가 수행하는 움막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가족과 뒤로하고 참선 중이던 원효에게 어느 날 묘령의 여인이 찾아왔다. 하룻밤만 재워달라던 여인은 해가 저물자 원효를 유혹하기 시작했다. 눈길 한번 주지 않던 원효는 그 여인이 돌아가고 나서야 관세음보살이 다녀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마음에 속박이 없다는 뜻의 자재암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아버지는 콘크리트 계단을 올라 자재암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자재암까지는 천천히 걸어도 십여 분이면 되었다. 사방이 절벽으로 막힌 협곡 가운데에 법당이 있고 청량폭포 옆으로 원효가 참선했다는 동굴이 나한전이라는 편액을 달고 있었다.


자재암(自在庵). 자재무애(自在無碍). 자유자재(自由自在). 내 마음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아버지는 원효의 자재가 자주(自主)와 같은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에 잠겼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아버지는 가파른 비탈을 올라 백운대와 공주봉을 잇는 능선에 섰다. 그때 산의 남쪽에서 ‘따다다 따다다’하는 사격 소리가 끊이지 않는 지진파처럼 울려 퍼졌다. 아버지는 천삼백 년 전 원효가 아니었다면 소요산이 아파치 헬기의 훈련용 과녁쯤으로 사용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귓전을 거슬리게 한 그 소리도 할머니의 자궁 저만치 들어가 웅크리고 있는 유구한 소요의 시간을 산 바깥으로 내몰지는 못했다.       

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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