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자아'를 직면하고 받아들이는 의미
휙 휙 바뀌는 업무, 원하지 않는 성장의 기회와 채찍질(?)덕에 이대로 가다가는 다시 회사를 등질것만같아 시작한 심리상담을 시작한지 반 년이 흘렀다.
약 20회기 정도의 상담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을 떠올려본다. '타당화'. 나의 생각과 감정, 행동은 당연했고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상담선생님의 말이 이어진다. 이것은 수용받지 못하고 숨어있던 '아이 자아'와 친해지기 위한 노력이다.
휴직 시절, 처음 맛본 심리상담에서는 내 안에 몇십년 넘게 감금되어있던, 그래서 존재조차 깨닫지 못했던
아이 자아와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힘들었다는걸 인정하는 것, 떨어지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었다는 것
그렇게 나만의 안전망을 만드는데 온 신경을 쓴 나머지 뒤를 볼 생각도, 여유도 없었고, 심지어 뒤를 보면 죽는다는 신념까지 있었던 '어른 자아'의 뒤에서 아이는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이제서야 발견한 그 울부짖음에 함께 공명하면서 상담실에서 흘렸던 눈물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 한 편이 먹먹하다.
두 번째 상담은 뒤늦게 알게 된 이 아이 자아의 슬픔을 달래주는 시간이었다. 스스로를 책망하고 원망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상담선생님은 항상 한 발 뒤에서 진짜 나의 잘못인지를 생각해보도록 도와주었다.
언젠가 점심시간에 있던 일로 상담의 화두를 던졌다. 나를 앞에 두고 연차가 높은 선배가 낮은 선배를 눈앞에서 지적하는 것을 보았다. 보고서를 못쓴다느니, 내가 봐줄테니 한 번 써서 달라느니.. '선배라는 자리가 상사를 의미하지는 않는데 도대체 왜저러지?'라는 의문이 들어 몹시 당황스러웠다. 여러가지 생각 중 굳이 내가 보는 자리에서 책망하는 이유는 나 역시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고, 비슷한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하고싶냐는 선생님의 질문에, 나는 '다음에는 그런 이야기를 듣더라도 동요하지 않고 그러려니 하고 넘기고 싶다'고 답했다. 그러자 선생님이 말했다.
"그 자리에서 당황스럽고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게 당연한 것 아닐까요? 오히려 그 자리에서 태연한 감정을 가지는 것이 더 이상한것 같아요"
부처님이나 스토아 철학자들마냥 모든걸 무던하게 넘기는 이상향을 만족하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어린 아이가 떠올랐고, 또다시 보듬는 어른 대신 채찍을 드는 모습이 보였다.
때로는 과거로 돌아가 어른 자아가 아이 자아의 학부모 역할을 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때 모든 남자 아이들이 수업을 마치고 남아 무릎을 꿇고 반성의 시간을 가진 적이 있다. 내 차례가 되었을때, 당연히 아무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같은 반 아이들이 지적하는 내용인 "잘난 척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을 했고, 그 말을 들은 담임선생님은 "문제를 잘 알고 있구나"라고 이야기했다. 학교 선생님이 인정할 정도로 내가 정말 못난 사람이라는 관념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마음 어딘가에 박혀버렸다.
이 말을 듣고, 먼저 상담선생님은 상황을 다르게 보자고 했다. 그 때 잘난척을 한다는 말을 들은 이유는, 책을 좋아했어서 수업시간에 아는 지식이 많아 그걸 많이 이야기하는 모습 때문이었는데, 그게 선생님이 뭐라고 해야 할 수준의 문제인가?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런식으로 말하고 넘어가는 모습은 사실 학생에 대한 관심이 없던 것은 아닐까?
학교선생님이 틀렸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기에, 잠깐 어안이 벙벙해졌다. 설사 당시의 내가 잘난척 많이 하고 다닌다고 하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타일러야지 다른 친구들 앞에서 진짜 '잘난척 하는 인간'으로 낙인을 찍어버리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스스로를 '수용'하는 상황을 만들고 나서, 잠시 눈을 감고 과거로 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지금의 내가 20여년 전 학교로 돌아가, 울고 있는 어린 초등학생 앞에서 담임을 만나고 있다. 부적절한 훈육방법에 항의하고, 부적절한 표현에 항의하고 있다. 그 때 혼자서 화를 삭이고 스스로를 공격해야했던 어린 아이를 도와주고 싶었다. 가슴 한편에서 무거운 무언가가 떨어지는걸 느낀다. 아이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진 듯 하다.
언젠가 공책에다 책에서 읽은 감명깊은 문장을 적어둔 기억이 있다. 다른 문장들은 이제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문장이 있다. "자신을 동정하는 건 비열한 인간이나 하는 짓이야"
어느 책에서(지금 검색해보니 '노르웨이의 숲'에 나온 문장이다) 나왔는지,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항상 스스로에게 채찍만을 들었던 모습을 합리화다보니 잊혀지지 않았나보다.
그러나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스스로를 동정해야만 할 때도 있음을 배우고 있다. 도덕교과서와는 정반대의 내용이지만, 자라오면서 결핍되었던 '수용'의 욕구를 회복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어른이 된 자의 수용을 받아 줄 사람은, 자신 뿐이다. 스스로의 감정에 대해 '변호사'가 되어야 한다는 한 정신과 선생님의 말씀을 다시금 새겨본다.
네 탓이오
네 탓이오
너의 큰 탓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