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쪽이 회사원으로 살아가기

'성장' 대신 '수용'을 선택하기로 했다.

by 민트초코숲

2025년이 아직 절반이 지나지 않았는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받았던 지적과 비판(또는 비난)보다 더 많이 받고 있다. 항상 중간 이상은 한다고 자부하면서 살아왔는데, 지금은 비판의 목소리만 듣는다면 일을 제대로 하기 힘들 정도로 못하고 있는 상황. 언뜻 외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아프기 직전의 상황보다도 훨씬 더 비난받고 버티기가 힘들어 보인다.


우습게도 지금 이렇게 나를 지적하는 부서장은 작년 다른 부서에서도 같은 부서장이었고, 구체적인 업무 피드백 이외에 그렇게까지 많은 지적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본인은 지금도 업무에 대한 피드백만 하고 있다고 가끔 이야기하지만, 떨리는 몸과 분노의 눈빛은 작년과 확연히 다르게 느껴진다. 업무가 달라졌으니 요구하는 것도 달라진 것이지만 '그때는 괜찮고 지금은 틀렸다'라는 지적에 100% 동의하기는 어렵다.




나에게 있어 '100% 동의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쓸 수 있게 된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타인의 지적을 여과하여 수용하는 힘이 생긴 것이다. 피드백과 직장 내 괴롭힘 사이의 아슬한 경계 속에서 무엇을 받아들이고 고칠지, 무엇을 '저 사람만의 생각'으로 치부하여 넘길지를 이제 구분하니 한결 마음이 편하다.


또 하나 달라진 점은, '업무로 인정받지 못하는 나'를 나 전체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상담선생님과의 많은 연습 덕분에 부서장 앞에서 느꼈던 공포심도 많이 옅어졌다. 지금까지의 삶을 지탱하던 인정욕구를 내려놓는 작업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오히려 회사에서 버티는 힘이 되어줄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닫고 있다.

마음 속 '정신승리'에 의존하고 있는 것 만은 아니다. 정신없이 털리고 자리로 돌아오면 위로하고 격려해주는 다른 직원분들이 있어, '다른 사람이 봐도 내가 그렇게까지 민폐인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정말 소위 '폐급'이 되었다면 나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될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친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대충'하는 정도는 절대 다른사람이 '대충'하는 수준이 아니라는 아내의 말도 큰 위로가 된다.


입지가 약해진 '비난 자아'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지적의 수위가 강해지는 날에는 다음날 출근이 두렵기도 하고, 새벽에 깬 뒤에 출근까지 남은 시간을 계산하며 두려움을 느낀다. 다만, 예전에는 두려움을 느끼는 나의 모습을 부정하고 싶었다면, 이제는 두려움을 느끼는 나를 동정하고 수용하려고 노력한다. 말과 글로 계속 들었지만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바뀔 수 없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바뀔수 있는 것에 집중하자'는 내용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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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길 끝만을 바라보며 달린다. 지난 30여년간 나도 그랬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일어서는데 1년이 걸렸다. 자세를 잡으려는데, 옆에 벤치가 하나 있다. 잠시 앉아 주변을 구경한다.


여러갈래로 갈라진 다른 많은 길들이 보인다. 어떤 길에는 내가 더 좋아하는 것들이 길 옆에 쌓여 있고, 또 어떤 길에 끝에는 너무나 가지고 싶었던 것이 먼발치에 보인다. 조금 씁쓸한 마음이 든다. 돌아가기엔 너무나 먼 길을 와버렸다.


그런데, 내가 가는 길의 주변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아보인다. 보기 싫은 쓰레기더미와 길 곳곳에 장애물도 있지만, 예쁜 꽃들도 있고 달리기 편한 포장도로도 있다. 정 이 길이 싫으면 돌아가지 않고 울타리를 넘어 다른 길로 질러갈 수도 있겠다.


고민 끝에 일단 조금 더 앉아있기로 했다. 계속해서 달리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지만 별로 개의치 않는다. 너무나 멀리 달려왔다. 여기서 달리기를 멈춰도 그다지 아쉽지 않을것만 같다.(죽는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돌부리에 걸리면서 얻게 된것은 자유였다. 아무도 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스스로는 절대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자유의 정체는 바로 '달리지 않을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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