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에 책임을 질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선택도 할 수 있다
최근 몇 주간, 회사에서 버티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미움받을 용기를 가지리라고 여러 번 마음을 다잡았건만, 은근하면서도 노골적인 타인의 미움을 정면으로 맞이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윗선에게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는 말이 나오지 않기 위해 숨막히게 조여지는 압박에 버티기가 버거웠다.
한동안 화기애애하면서 깊숙한 내면을 탐구해가던 상담에서도 다시금 불안과 고통을 호소하는 시간이 늘었다. 지금까지 잘 버텨내며 키워가던 마음 속 무언가가 꺾이는 느낌이었다. 비슷한 경험을 휴직 직전에 느꼈으니, 다시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더욱 엄습한다. 잠시 후퇴했었던 자기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져간다. '차라리 모든걸 내탓으로 해 버리면 마음이 편하지 않을까?'라는 충동마저 불쑥 불쑥 나타나는 시기였다.
그러던 어느날, 출근을 걱정하며 이른 새벽에 눈을 뜨고 여러가지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머리속에 '포기'라는 단어가 맴돌았다. 돌이켜보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원동력 중에 하나로 '포기하지 않는 능력'이 있었다. 모든 일이 그렇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에서는 불가능한 상황이 다가오기 전까지는 좀처럼 포기를 외치지 않았다. 옛날의 진부한 어떤 급훈처럼, 포기는 배추를 셀 때나 쓰는 말이었다.
안타깝지만 마음의 한쪽 성벽이 허물어진 지금에는 이처럼 포기할 줄 몰랐던 과거의 자신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스스로의 한계를 넘는 수준까지 도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지난 글에서 이제 벤치에서 쉬어가려는 마음을 표시했지만, 회사와 세상의 시스템은 더욱 강력한 채찍을 들고 가지 않는 사람들을 질타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길가에 남아있는 벤치를 하나 하나 뽑아가는 것 같이 느껴졌다. 이제 그만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가 불가능한 게임을 하고 있는 느낌이 들어 조금 더 서글퍼졌다.
상담시간이 돌아왔고, 이러 저러 이야기를 하던 중 '포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회사와 사회라는 거대한 피라미드 속에서 느낀 절망, 이제는 제자리에 머무는것조차 힘들지만 포기가 허락되지 않은 것만 같은 느낌을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이야기가 오가던 중 상담선생님의 말씀 하나가 다시금 마음의 호수를 요동치게 만들었다.
글을 쓰는 지금 시점에서 다시금 생각해보면, 두 단어의 차이는 상황을 맞이하는 나의 태도를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포기'라는 단어는 양자택일의 갈림길이 떠오른다. 주어진 상황에서 가능한 선택지는 나아가거나, 나아가지 않는 것 밖에 없다. 전략적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배수의 진'으로, 경우에 따라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가능하게 만드는 어마어마한 힘을 부여한다. 그러나 그 선택의 주인을 '나'로 보기는 어렵다. 스스로 손발을 묶은 상황에서, 불안과 공포의 도움을 받아 달려나가는 모습은 큰 틀에서 보면 살고 싶다는 외침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선택'의 세계에는 상황과 대응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다. 무언가 도전을 해야한다면, 도전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꼭 두 가지 선택만 있는 건 아니다. 도전을 한다면 간만 볼 것 인지 진심을 다할 것인지, 바로 지금 할 것인지 다음을 기다릴 것인지 등 다양한 선택이 함께 한다.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영영 거들떠 보지 않을 수도 있고, 아직은 힘이 부족하여 작전상 멈추는 것일 수도 있다. 심지어 '선택을 보류'하는 선택도 가능하다.
단어 하나가 바뀔 뿐인데, 마음의 무거운 짐이 조금 덜어진 것만 같다. 지난 번, 학교 선생님이 잘못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처럼,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관점이었다. 관점을 바꾸고 나니 '포기'를 하지 않았던 나에 대한 원망의 자리를, 지금까지의 '선택'을 했었던, 그리고 해야만 했던 나에 대한 동정심이 대신하게 되었다. 역시나 이번에도 필요했던 것은 '타당화'였다.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기에, 적어도 올해가 끝날 때 까지는 계속해서 마음속에 위기가 찾아올 것이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허물어지면 그 빈틈을 노린 '비난하는 자아'의 공격이 계속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공격에 대응하는 '성숙한 성인자아'의 선택이다. 선택에 대한 결과는 책임을 져야 하겠지만, 반대로 그 책임을 감당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선택도 가능하다. 지금까지는 그 선택에 대한 책임만을 너무나 크고 깊게 생각한 것만 같다. 감당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선택이든 기꺼이 할 수 있다. 적어도 포기를 할지 말지에 대한 고민보다는 감당해야 할 무게감이 현저하게 적어보인다.
세상이 계속 등을 떠밀고, 의자도 그늘도 모두 치워버리고 있다. 너무 힘들어서 이대로 주저앉아버리려고 하니, 삶이라는 레이스를 '포기'하는 것만 같아 두려웠다. 포기하거나 계속 달리거나, 그 무엇도 하기 싫어 갈팡질팡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레이스에 임하는 나를 '선택'하려고 하니, 다른 방식의 '선택'들이 보인다. 달리기를 계속한다면 속도를 조절해서 달릴 수도 있고, 걸을수도 있으며, 힘들면 잠시 서있을 수도 있다. 달리지 않고 주저 앉더라도 잠시 후 일어날 수도 있고, 그냥 '이번엔 여기까지'라며 누워버릴수도 있다.
단어 하나 바뀌었는데, 참 많은 것이 달라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