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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일 만나 Jul 29. 2021

낭독의 온도

시작은 낮술 낭독회였다.


어느 독서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친구가 함께 하기로 한 친구가 갑자기 일이 생겼다며 너도 책을 좋아하니 같이 가자고 했다. 내가 아는 독서 모임은 모두 같은 책을 읽고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는데, 이 독서모임은 낮에 다양한 종류의 막걸리를 마시며, 돌아가며 같은 책을 '낭독'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름은 낮술 낭독회. 그날 선정된 책은 '거기, 당신?'이라는 윤성희 작가의 소설이었다. 개인적으로 한국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그 음울한 느낌. '한'이라고 해야 하나? 너무 현실적이라 가끔 불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은근히 내 정서를 건드리는 그 흐름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 오늘 읽게 될 책은 평소라면 절대 선택하지 않았을 거라, 많이 생소했다. 오랜만에 한국어로 표현되는 글자였다. 그 글자를 각자 다른 목소리와 호흡으로 읽어 내려가는데, 혼자 읽을 때보다 한 글자 한 글자에 더 집중되었다. 눈으로 같이 읽어 내려가며 소리로 생동감 있게 들으니 물 흐르듯 자연스레 그 흐름에 따라가게 되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 낯선 사람들 앞에서 소리 내어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 많이 부담스러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한 번도 여러 명의 사람들 앞에서 무언가를 소리 내어 읽어 본 적이 없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목소리가 떨릴 것 같았다. '언제 끊어 읽어야 잘 전달될까?' 눈으로 읽어야 할 글자를 미리 커닝하며 읽었다. 발음에도 끊어 읽는 부분도 또 높낮이에도 신경이 쓰였는데, 무엇보다 글의 내용이 더 신경 쓰였다. 어릴 때 쌍둥이 언니를 잃은 한 여자의 이야기였다. 제목은 "유턴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 덤덤히 태어난 과정부터 성인이 되는 과정의 우여곡절이, 아주 담담히 풀어져있었다. 그 담담함이 나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눈물이 많은 편이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잘 울지 못하는 성격인데도 말이다. 나는 첫 참석의 배려로 가장 마지막 부분을 읽게 되었는데, 그저 주인공이 취미생활처럼 가끔 목적지 없이 차를 몰고 달리다가 맘에 드는 휴게소에 들러서 어묵 한 그릇을 먹는 장면이었다. 처음 나온 장면도 아니고 몇 번 나왔던 내용이었다. 그저 주인공이 생일인 날에도 갔을 뿐이다. 이미 중반부에서 눈물을 흘릴뻔한 고비는 몇 번을 넘겼다고 생각해서 방심했을까. 주인공의 말 한마디에  눈물이 터져 나와 남은 서너 줄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저 자기 생일이 몇 분 남지 않은 시점에 나지막이 중얼거린 한마디였다. "생일 축하해, 언니." 태어남과 동시에 어머니를 잃었을 때도 쌍둥이 언니를 잃고 초등학교에 혼자 입학했을 때도, 부유했던 집이 망해서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기차 안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도, 실패하고 괴로웠을 때도,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던 사람이. 그 괴로움을 꾹꾹 눌러 담아 놓기만 했을 뿐이지. 늘 마음 한편에, 늘 항상 곁에 달고 다녔던 거라고 생각하니. 너무 슬펐다. 너무 가여웠다. 글이 거의 끝나가서야 겨우 한 줄로 표현했던 그 마음이 말이다. 낯선 사람들 앞에서 책을 읽다가 울다니'' 감정이 진정되고 나서 조금 부끄러웠다. 연신 죄송해하는 내게,  이 독서모임의 주최하신 분이 실은 이 책의 작가가 학교 선배신데, 담담하게 슬프게 만드는 게 특기라며, 오늘 이야기를 해드리면 오히려 뿌듯해하실 거라고 괜찮다고 위로해주셨다. 새로운 경험을 했다. 그 무엇보다 내가 책을 읽으며 그 글에 집중해서 그 감정을 참지 못하고 표현했다는 게, 나는 너무 신기했다.  '낭독'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처음 느꼈다. 그래서 일 년 반이나 지난 일인데도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글이라는 게 단지 종이 위에 잉크로 인쇄된 아무런 온도도 느껴지지 않지만, 글에서 때로는 많이 위로받는다. 마음에 드는 문구를 발견하면 필사를 하는데, 그 이후로는 소리 내어 읽어 본다. 내가 쓴 글도 읽어 보고 녹음해서 들어 보기도 한다. '낭독'의 매력을 발견했다랄까. '낭독'에 대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랄까. '낭독'에 대한 문턱이 좀 낮아졌다랄까. 무튼 얼마 전에 독립 책을 출간한 동기분들끼리 온라인으로 낭독회를 했는데, 그때의 생각이 많이 났다. 독자가 읽는 낭독은 작가의 의도대로 되기도 또 독자 나름대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내가 쓴 글을 다른 사람 앞에서 읽는 건 확실히 다르다. 목소리의 톤, 끊어 읽기에 따라서 그 글의 온도가 정확히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럴까.  요즘은 TV를 틀어 놓고 핸드폰 하기도 하고, 음악을 들으며 운동하기도 한다. 뭔가 한 가지만 행동하거나 그 행동 하나에만 집중해본 적이 없는데, 이날은 그저 음성으로 들었을 뿐인데도, 그저 허공에 귀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글을 다 읽고 나서도 낭독이 끝났다는 걸 잠시 잊을 정도로 잠깐 딴 세상에 갔다 온 것 같았다. 생생하게 그 글이 펼쳐지는 공간에, 그 작가의 마음 어느 한구석을 잠시 엿보고 온 기분. 이게 낭독의 온도? 가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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