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워
"엄마, 매실 타주세요."
아이가 매실 원액이 든 통을 들고와 묻는다.
'2015 매실'이라고 적힌 이름표 라벨이 눈에 들어온다.
그동안 수없이 타 마시고 요리에도 넣어 먹어서 밑 바닥을 보이는 매실이다.
"이거 할아버지가 만든신 거야. 10년 전에. 할아버지 보고싶다."
내가 말해 놓고 감정을 누르지 못한다.
설거지 핑계로 고개를 숙이고 딸그락거리는 그릇소리 물소리에 숨어
눈물을 뚝뚝 떨군다.
아빠가 가신지도 어느새 10년이다.
아빠가 남기신 매실이 바닥을 드러내니 서운하다.
그동안 아까워서 어떻게 먹었나. 이리도 무심했을까.
2015 매실이라는 라벨도 새삼 새롭다.
돌아가시던 해에 매실을 담그셨네.
58년생 개띠 그리운 우리 아빠.
아빤 자몽이나 매실 원액을 즐겨 담그셨고, 인삼을 꿀에 담가 드시기도 했다.
수영, 등산, 서예, 독서, 캠핑도 아빠가 즐기던 것들.
내가 태어나던 날엔 어린 딸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 주려고 캐논SLR 카메라를 사오셨는데, 반전인 건 공무원 월급으로는 어림 없었는지 할머니가 병원비 내라고 주신 돈으로 카메라를 사셨다는 것이다.
이후로 엄마의 잔소리를 엄청 오랫동안 들으셨지만, 그래도 난 아빠 덕분에 어린 시절 사진이 많아서 참 좋다.
술을 좋아하셨고 친구도 모임도 많으셨는데 집에선 원체 과묵했던 아빠이기에
아빠가 해주셨던 말들은 묵직하게 각인되어 잊히지 않는다.
"엄마한테 잘해야 한다. 엄마 무시하지 말아라."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
"이름 있는 큰 회사에 들어가는 것도 좋지만, 내 그릇에 맞는 곳에서 역할을 해내는 게 중요해.“
참, 부족했던 어린 시절이다.
지금 남편을 처음 집에 데리고 갔던 날 하셨던 말씀도 잊을 수 없다.
“식은 내년 가을이나 내후년에나 하면 어떻겠니?”
남편은 지금도 가끔 언급하며 서운해한다.
공무원 외벌이 참 아끼며 검소하게 사셨다. 종잣돈 모으는 재주도 있으셨는데 부동산 이야기를 꺼내자면 또 이야기가 길다.
10년이라는 세월이면 무뎌질 만도 한데
어쩜 매년 한 번씩 나는 아빠가 사무치게 그리워서 펑펑 눈물을 쏟는다.
함께했던 추억들이 떠올라, 더이상 볼 수 없음이 서러워서,
“아빠~!”하고 불러도 돌아오는 답이 없어서,
가시는 그 길 얼마나 춥고 외로웠을까 싶어,
지켜드리지 못한 미안함에,
가슴 응어리가 뜨겁게 올라와 주르륵주르륵 비처럼 멈추질 않는다.
아빠, 나는 내 아빠로서의 아빠만 알고 있어서
아빠라는 부모 역할 이외의 아빠 이름 세 글자에 담긴 아빠의 인생은 잘 몰랐어요.
아빠 삶의 무게를 몰랐어요.
아빠가 어떤 삶을 사셨든 난 아빠 딸이고 아빠를 사랑해요. 나에게 아빠는 훌륭했으니까.
매실 때문에 할아버지가 떠올라 눈물 흘리는 엄마를 보며 딸이 옆에 와서 비밀 일기를 쓴다.
뭐라고 적는 걸까.
엄마 우는 이유가 바닥을 드러낸
매실 때문이라고 생각한 딸이
이제 이거 마시지 말고 남겨두자 한다.
그래 할이버지가 만드신 매실 원액
다 먹어버리면 마치 곁에 머물던 할아버지가,
기억 하나가 사라지는 것 같아서
서글펐던 건 사실인데,
엄만 괜찮아.
엄마가 태어날 때부터 느꼈던 할아버지께 받은 사랑과 기억이 마음 속 깊은 곳에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어서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