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은 주름
춘분이 가까운 봄날의 이른 저녁. 따뜻한 한낮의 시내 나들이에서 귀가하는 길, 지하철 안 유모차에서 모로 누워 내 손을 잡더니 잠이 든 만 세 살 남짓 딸. 집에서 두 정거장 떨어진 엘리베이터가 있는 지하철 역에서 내리니 봄날의 저녁은 한창 쌀쌀해져 있다. 아이의 코감기가 심해질까 입고 있던 긴 카디건을 벗어 자는 아이를 야무지게 덮어주고 정류장을 나서니 해가 막 진 후 하늘이 푸른에 가까운 분홍 빛이다. 옷차림이 가벼워진 김에 등받이를 젖힌 유모차를 밀며 가볍게 달려보다가, 매끈하지 않은 보도에 덜컹대어 아이가 깨지 않을까 다시 빠른 걸음으로 돌아온다. 문득 기꺼이 벗어줄 수 있는 옷이 있다는 게, 기꺼이 옷을 벗어줄 대상이 있다는 것에, 나 또한 가벼울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로 가슴이 방금 본 하늘의 빛깔처럼 벅차오른다.
아이는 오늘 책을 보다가 책에 나오는 옷이 곱다고 하고 책을 읽어주는 나에게도 엄마가 곱다고 했다. 예쁘다는 말을 자주 쓰는 아이에게 언젠가 알려준 곱다는 표현. 타국에서 다른 나라의 사람을 만나 낳은 아이는 여태 껏의 한국어를 거의 나를 통해 만났다. 모국어를 오랫동안 쓰지 않던 난 아이의 입을 통해 나오는 나의 무의식적인 언어 태도를 바라보고, 나의 유일한 한국어 대화 상대인 아이에게 다채롭고 따스한 말을 쓰려고 의식한다. 적어도 기관에 들어가기 전이라 아직 내가 만들어준 환경에서 대부분을 자라온 아이, 그렇다 보니 내가 의식적으로 함께 접하게 하는 한국적인 것들이 있다. 이 세계에선 아직 욕도 없고, 유행어도 없다, 아직 불량식품이 없는 것처럼…이 세계관에는 한복, 선녀, 호랑이, 요정, 피터팬, 병풍, 설날, 윷놀이, 가야금, 정월 대보름, 핑크퐁 등이 있다. 아이의 말을 듣고 보니 피터팬처럼 초록바지에 초록 조끼를 입은 난 그렇게 아이 옆에서 내가 되고 싶은 아이가 된다.
아직도 친정어머니가 밥을 차리는 것에 대해 가끔 붙이시는 단어는 ‘억지로‘ 차려놨더니이다. 엄마가 되어 아이를 먹여보니 일평생 식구의 끼니를 챙겨주신 어머니의 수고스러움에 감사하고 어머니의 말씀이 이해가 되는 한편, 어려서부터 그 단어에 대한 거부감이 올라왔던 기억을 아이에게 대물림 해주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 혼자라도 만들어 먹고 싶을 아침을 차리는 중이다. 아이가 먹지 않아도 속상하지 않을 정도로… 나 자신이 기꺼이 건강한 식단을 좋아한다는 게 그래도 아이에겐 다행인 점이다. 세상에 아이를 위한 아름다운 그림책들이 많다는 것도 다행이다. 내가 읽고 싶은 그림책을 설레는 마음으로 함께 읽어줄 수 있기에. 가끔 유일하게 보여주는 영상은 만화 대신 음악 공연 영상이다. 다행히 아이가 국악과 한국무용에 매료되어 있어 한 시간짜리 공연을 이제껏 세 번이나 함께 보았다. 카페에 앉아 서로의 공책을 꺼내 아이는 그림을 그리고 나 또한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거나 한다.
이렇게 아이를 돌보는 일 속에서 나를 함께 돌보는 순간을 발견하고, 찾아가는 길 속에서 내가 온전히 한 나로서 기꺼이 나와 아이를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중이다. 죽기 전에 아이에게 기꺼이 삶을 살아온 사람의 주름을 물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