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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아 Oct 04. 2017

플라톤은 어떤 인간이 바람직하다고 보았을까

플라톤의 이데아론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


동굴의 가장 깊은 깊고 어두운 곳에는 죄수들이 쇠사슬에 묶여 막다른 곳을 마주하고 있어요. 죄수들 뒤로는 너머를 볼 수 없게 벽을 세워 놓았죠.


벽 뒤엔 망토를 쓴 사람들이 항아리와 새, 나무의 모형을 들고 있어요. 입구 쪽의 빛과 불 때문에 죄수들의 막다른 곳에 그림자가 비치게 돼요.


사람들이 항아리와 새, 나무에 대해서 얘기해요. 죄수들은 그림자를 보며 실재의 항아리와 새, 나무라고 믿게 되는 것이죠.


그러다 한 명이 쇠사슬에서 풀려나게 돼요. 용기를 내어 뒤의 벽을 넘고 모형을 넘어서 입구에 다다르게 돼요. 풀려난 죄수는 눈이 너무나 부셔서 괴로워해요. 그렇지만 그 고통을 참고 빛을 마주하고 입구 밖으로 나오게 되죠.


죄인은 항아리와 새, 나무의 그림자가 아닌 실재를 보게 돼요. 너무나 놀라워서 다시 동굴 깊숙이 들어와 죄인들 앞에서 실상을 얘기해줘요. 진리라는 것이죠. 하지만 죄인들은 믿지 않고 오히려 바보 취급을 당해요.


이것이 플라톤의 이론 중 하나인 이데아론이에요.


쇠사슬에 묶인 죄수는 일상에 매몰돼 참다운 실재를 보지 못하는 우리를 말해요. 우리는 왜 참다운 실재를 보지 못할까요? 플라톤에 의하면 당연하다고 믿고 있는 감각이나 정해진 관습에 대한 맹신 때문이죠. 그것이 쇠사슬이고요.


쇠사슬에서 해방하는 방법은 교육이라고 보았어요. 영혼의 전향! 쇠사슬에 풀린 죄수가 깨달음을 구하려는 자, 구도자라면, 동굴로 돌아온 사람은 철학자인 것이죠.


소크라테스의 죽음


플라톤이 동굴로 되돌아와 실재를 말하는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은 죽음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라고 했던 것은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재판을 떠올린 것이에요.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을 거짓된 세계에서 참된 세계로 이끌려했지만 시민들은 오히려 소크라테스가 청년을 선동한다며 죽음으로 이끌게 되었죠.


노예로 살아가느냐 구도자로 살아가느냐 선택이 필요해요. 막다른 곳에 비춘 그림자를 실재라며 믿던 대로 살아가느냐, 쇠사슬을 벗어던지고 두려운 동굴 밖의 세계로 나아가느냐. 모사된 사물에서 감각적 세계를 지나 이데아로 나아가는 행위.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구도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나아가 다시 동굴 안에 결박된 이들을 풀어주는 철학자가 된다면 그 삶은 얼마나 가치로울까요.


제가 딱딱한 철학에 관한 글을 적는 이유는 한 명이라도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사회는 조금씩 긍정적 방향으로 변해간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에요. 플라톤이 말한 영혼의 전향을 바라는 것이죠. 그리고 계속해서 다시 동굴로 되돌아올 사람까지도 바라는 것이에요. 무엇이든 멈추면 후퇴하잖아요. 저는 부족한 구도자이지만 저보다 깊숙한 동굴에 있는 다른 사람을 위해 철학자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죠. 영혼의 전향에 만족하지 말고 다시 동굴 속을 기꺼이 들어가는 존재가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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