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먹갈기 좋은날 Sep 24. 2021

생명이 처음 만나는 세계, 엄마와 아이

삶과 죽음의 경계, 물의 문화적 상징성에 대하여


     아이가 가장 먼저 만나는 세계는 엄마다. 아이는 엄마의 뱃속에서 세상으로 나올 때까지 엄마의 자궁이 온전한 세계다. 세포분열을 할 때부터 태반에 있는 영양소를 먹고 신체기관이 발달함에 따라 엄마가 먹는 음식을 탯줄을 통해 공급받는다. 청각기관이 발달하면서 엄마의 목소리와 아빠의 목소리에 반응한다. 인간의 신체기관이 완성되어갈수록 세상을 향한 몸짓을 하며 엄마는 아이의 태동을 느낀다. 아빠는 엄마의 배 위에 귀를 대보기도 하고 손을 대보기도 하면서 아이를 느낀다. 아이는 엄마라는 매개체를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엄마의 자궁은 양수로 가득하다. 아이가 태어나서 본능적으로 물속에서 헤엄을 칠 수 있다는 실험 결과를 봐도 물과 인간은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다. 더욱이 인간의 몸은 수분이 70% 이상이라고 한다. 

    물은 서양과 동양 모두 세상을 구성하는 물질로 보았는데 서양의 경우, 그리스 고대 철학에서 세상의 모든 물질이 4원소로 구성되어있는데 이는 불, 물, 흙, 바람이었다. 각각의 원소들은 정령이 깃들어 있다고 보았다. 이들 각 원소가 서로 조합되면서 만물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그리스의 4원소 설이다. 과거 사람들이 물질에 생명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 상상은 하나의 판타지 장르가 되어 문화콘텐츠에 자주 활용되는 소재다. 동양의 경우도 음양오행설이라 해서 세상을 바라본 사상이 있는데 오행은 우주 만물의 변화가 다섯 개의 기운으로 설명하는 사상이다. 다섯 개의 기운은 각각 나무, 불, 흙, 쇠, 물인데 서양의 4원소와 비교되면 물, 불, 흙이 겹친다. 다만 서양은 보다 물질적 차원에서 접근했고 동양은 기운으로 해석했다는 점이 큰 차이점이다. 영화 <제 5원소>를 보면 5번째 원소를 밀라 요보비치, 즉 미래인간, 외계인이기는 하지만 사람의 형상을 한 존재로 보았는데 동양적 철학관과 조화를 이룬 결과가 아닐까 싶다. 이미 오염된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지구를 그나마도 파괴하려고 다가오는 절대악에 대항할 존재인 밀라요보비치는 엄청난 능력을 지닌 여성이다. 그리고 그녀는 5번째 원소로서 지구를 구해낸다. 비범한 여성에 비해 평범한 남자인 브루스 윌리스의 보호가 함께 했지만 말이다. 릴루(밀라요보비치 役)는 “난 사랑이 아니라 보호를 위해 만들어졌어.”라는 대사를 하는데 씁쓸하기도 하면서도 생명경시 풍조에 대한 경고로 보인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남녀의 사랑이 주는 생명에 대한 철학을 담고 있기도 하다. 영화를 보지 못한 분들을 위해 자세한 결말은 영화를 직접 관전하시기를 추천한다. 

    물에 대한 문화적 상징성이 예술 작품 곳곳에 적용이 되어 그려지는데, 물은 엄마의 자궁속 양수에 아이라는 생명을 잉태했다는 생체학적 원리를 봐서도 알지만 생명과 죽음의 경계다.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에 나오 듯, 강을 건넌다는 것은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경계다. “‘요단강’을 건넜다.”라고 요단강이라는 고유명사로 죽음에 대한 표현을 보면 죽음의 세상으로 떠났다는 표현이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서양과 동일하다. 서양에서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는 ‘스틱스’ 강이 자리하는데 망자들은 이 스틱스강을 건너기 위해 뱃사공 카론에게 뱃삯을 지불한다고 한다. 

    강이라는 이미지가 죽음을 상징하는 전설들을 대표하지만 물은 우선적으로 생명과 직결된다. 수라는 단어가 수많은 동음이의어를 가지고 있지만 물 수(水)와 목숨을 뜻하는 수(壽)와 같은 것은 이런 원초적인 동일성에서 기인하지 않았을까 한다. 더욱이 생수를 돈 주고 사먹는 날이 올 것이라는 예언에 코웃음 쳤던 것이 오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집집마다 정수기 없는 집이 없고, 탄산수와 생수를 골고루 사먹고 있다. 더욱이  대한민국이 물 부족 국가로 물의 소중함에 경종을 울리는 시대, 지구에 땅보다 물이 더 많다는 지질학적 차원에서 봤을 때는 넘치는 것이 물이지만 생명을 유지시킬 물이 부족하다는 것은 사실이니 말이다.  

    이렇듯 인간은 물을 통해 삶을 이어갔다. 인간의 4대 문명이 강을 중심으로 발생하고 발전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비록 지리학적으로 외부와의 관계를 통해 문명이 서로 다른 양상으로 발전되었지만 발생의 원리는 같다. 넘치는 물이 땅을 비옥하게 했고 기후도 알맞았고 작물을 키우고 수확할 수 있었던 축복을 누린 것이다. 더구나 이집트의 경우에는 지리적으로 외부와 단절되어 2000년간 문명이 전쟁 없이 유지될 수 있었다. 이집트의 문명이 외계인과의 소통으로 일궈졌을 것이라고 할 정도로 지금도 감탄해 마지않는 문화의 역사를 가진 것을 보면 축복받았던 조건을 가졌던 것이 맞다. 

    생명과 죽음의 경계라는 점과 문면의 발생지에 물이 개입한 것은 동일하지만 동양과 서양은 세계관이 분명 차이가 있다. 이는 물이라는 근원적인 물질마저도 다르게 해석하기 시작했다. 김하늘 워터소믈리에는 한 기사에서 동양과 서양의 물에 대한 관점을 비교했는데 가장 큰 차이점이 동양은 물을 통해 철학적 사유를 했고 서양은 과학적 사고를 했다는 것이다. 광천수라는 개념만 봐도 서양은 광(鑛)이라고 하는 측량 가능한 미네랄, 즉 영양을 중요하게 여기고 동양은 천(泉)이라고 하는 생명력 가득한 물의 생리 기능에 주목했다고 한다. 신혼여행 때 유럽은 물이 생수와 탄산수 두 종류가 있어서 구분해서 주문해야 하고, 석회질이 섞여있어 수도에서 나오는 물을 그냥 마시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물론 스위스에서는 산에 흐르는 물을 그냥 받아 마시기는 했지만 수도에 나오는 물로 머리를 감고 나서는 지독하게 뻣뻣해진 머릿결에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사고관 아래 체계가 잡힌 물에 대한 서양의 관점은 물을 구성한 원소들의 성질을 분석했고 물에 담긴 의미를 사유하기 보다는 사물 자체로 보았던 것 같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물에서 헤엄을 칠 줄 안다고 하고 물을 가지고 노는 것을 즐기기도 하지만 동시에 물에 빠져 죽을지도 모르는 공포도 느낀다. 첫째는 물을 끔찍이도 싫어해 수영을 보냈을 때 강사님이 애를 먹었다고 한다. 아이는 나와 말이 잘 통하지 않을 때였지만 무섭다는 표현과 죽을 것 같다는 표현을 정확하게 했었다. 잠수를 하지 못한다는 문제였는데 물  속에 고개를 넣지 못하니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물은 동시에 죽음과 연계된 공포도 상징한다. 사실 이 부분은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를 넘어 생물학적으로 인간이 물속에서 살 수 없는 신체를 가졌음에 주목한 사고관에서 기인한 것 같다. 물은 인간이 폐라는 기관을 통해 호흡을 할 수 없게 해 숨을 단절시킨다. 인간은 물속에서 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과 직결되고 이는 공포로 연결된다. 일본의 영화 <검은 물 밑에서>를 보면 물이 저승의 존재가 이승의 존재를 위협하는 통로로 이용된다. 물속에 사는 존재들이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인간은 죽을지도 모르는 극한의 환경에서 식인물고기나 악어, 아나콘다, 죠스 등을 대면하며 이들을 벗어나야 한다. 물론 둘째는 수영을 배우지는 않고 있지만 물에 대한 거부감이 첫째에 비해 덜한 편이다. 모든 아이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사항은 아닌 듯 하다. 

     한 가지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물이 생명과 죽음의 경계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점은 엄빠들의 세계에서 “술이 웬수지.”라며 술이라는 액체를 마시고 인연이 되거나 생명이 잉태되는 잉태설화가 흔한 것이다. 술이라는 것이 이성과 감성의 끈을 끊어놓는 역할을 하니 말이다. 그 결과가 당신일 수 있고, 당신이 아이를 가지게 된 경위가 될 수도 있다. 술은 마시고 음주운전을 하면 죽음으로 이르는 가장 위험한 요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생명을 잉태시키는 생명수이기도 하다. 

 * 덧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 는 말은 자식을 향한 부모의 장난 어린 마음에서 던져지는 농담과 같은데 넌 친 자식이 아니라는 은유의 표현이다. 하지만 여성의 출산과정을 보면 친자식이 맞다는 뜻이다. 더구나 다리가 물처럼 생명과 죽음의 공간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을 보면 더욱 문화적 상징성이 다분하다. 키우던 강아지가 죽으면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고 말하고는 하는 것과 같다. 

    다리에 대한 죽음과 생명의 경계의 역할이 잘 그려진 작품이 2017년 개봉한 애니메이션 ‘코코’다. 가족들이 조상을 기리기 위해 제단을 만들고 특정 기념일이 되면 제단에 사진이 놓인 조상들은 후손들을 만나러 다리를 건넌다. 그러나 자신이 기록되어있는 제단이 없으면 다리를 건널 수 없고 더욱이 더 이상 이승에서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마저 이승의 삶을 다해 더 이상 자신의 존재를 기억하고 전달할 사람이 없어지면 저승의 영혼마저 사라져버린다. 가슴이 미어지는 일이다. 

    ‘다리’는 단절된 공간에 대한 연결이라는 상징어다. 부모와 자식을 연결하는 의미로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이 기원한 것은 아닐까 한다.      


이전 04화 온라인 카툰, 일상을 그린 현대풍속화
brunch book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문화콘텐츠 썰 "내가 엄마라니"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