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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0원의 충격: 왜 원화만 홀로 무너졌는가

글로벌 '위험 회피'의 직격탄, 관성으로 굴러가는 환율 경제의 현실

by 무딘날

2025년 11월 7일, 대한민국 외환시장은 불과 몇 시간 만에 공포의 도가니로 변했다. 원·달러 환율이 장중 1,458원을 돌파하며 7개월 만의 최고치를 경신했다.


이 모든 혼란의 진원지는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 전해진 '고용 쇼크'였다. 미국 정부의 공식 실업률 통계가 셧다운 여파로 혼선을 빚는 가운데, 챌린저, 그레이 & 크리스마스(CG&C)가 발표한 10월 감원 보고서는 시장의 허를 찔렀다. 이 민간 보고서에서 미국 기업들의 해고 계획이 2003년 이후 22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는 소식은, 공식 데이터의 부재 속에서 가장 강력한 '신호'로 작용하며 글로벌 금융시장을 강타했다. 세계 경제의 엔진인 미국이 예상보다 훨씬 빠르고 깊은 경착륙(Hard Landing)의 수렁으로 빠져들 수 있다는 공포가 순식간에 번져나갔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전 세계 금융시장은 기이한 분열을 일으켰다. 미국 경제가 나쁘다는 소식은 통상적으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조기 금리 인하' 기대를 부추겨 달러 가치를 떨어뜨린다. 예상대로 유로화와 중국 위안화는 달러 대비 강세를 보였다. 심지어 전통적 안전자산인 일본 엔화는 달러 대비 급격히 가치가 상승했다.


그런데, 왜 원화(KRW)만 정반대의 길을 걸었는가? 왜 유독 원화만 7개월 만의 최고치로 폭락하며 '나 홀로' 무너졌는가?


이 현상은 단순한 환율 변동이 아니다. 이는 글로벌 자본 시장이 한국 경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냉혹한 거울이자, '안전자산'과 '위험자산'을 가르는 보이지 않는 선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이 글에서는 11월 7일의 환율 급등 사태를 중심으로, 안전자산의 역설적 메커니즘과 한국 경제가 가진 구조적 취약성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운명이 갈린 두 개의 시장:

위험 회피와 거시 경제


11월 7일의 미국 고용 충격은 시장에 두 가지 상반된 신호를 동시에 보냈다. 투자자들은 이 두 신호 앞에서 정확히 두 개의 진영으로 갈라졌다.


하나는 '거시 경제' 논리를 따른 시장이었다. 이들은 "미국 경기가 침체하면, Fed는 내년 초에 금리를 인하할 수밖에 없다"라고 판단했다. 미국 금리가 낮아진다는 것은 달러의 매력이 떨어진다는 뜻이므로, 이들은 달러를 팔았다. 그 결과 유로화, 위안화 등 주요 교역국 통화 가치가 상승했다.


다른 하나는 '시장 심리' 논리를 따른 시장이었다. 이들은 "미국발(發) 글로벌 경기 침체가 온다. 당장 위험한 자산을 팔고 안전한 곳으로 도피하라"는 '위험 회피(Risk-off)' 스위치를 켰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금리 전망이 아니라 당장의 '생존'이었다. 이들은 즉시 '위험자산(Risk Asset)'으로 분류되는 자산을 팔아치우고, '안전자산(Safe Haven Asset)'을 사들였다.


이날 원화는 이 두 번째 논리의 직격탄을 맞았다. 글로벌 투자자들은 원화를 '위험자산'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간주한다. 경기 침체라는 공포가 확산되자, 이들은 가장 먼저 한국 주식(KOSPI)을 팔아치웠고, 이 원화를 달러로 환전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달러 자체의 매력(금리)과는 무관하게, 단순히 '안전한 현금(달러)'을 확보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결국 '안전자산'과 '위험자산'의 구분 기준은 "위기 시 투자자들이 사들이는가, 아니면 팔아치우는가"이며, 이날 원화는 전 세계 투자자들로부터 '가장 먼저 팔아야 할 위험자산'으로 낙인찍혔다.


엔화의 역설:

침체가 빚어낸 '안전자산'의 지위


이날 가장 극적인 대비를 보여준 것은 일본 엔화(JPY)였다. '잃어버린 30년'으로 불리는 장기 침체, 막대한 국가 부채, 쇠퇴하는 산업 경쟁력. 일본 경제의 펀더멘털은 결코 강하지 않다. 그런데 왜 위기가 닥치자 투자자들은 엔화를 사들였는가?


이는 엔화의 안전자산 지위가 일본 경제의 '성장성'이 아닌, 아이러니하게도 '구조적 침체' 그 자체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이 역설은 두 가지 강력한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


첫째는 '엔 캐리 트레이드(Yen Carry Trade)'의 청산이다. 1990년대 버블 붕괴 이후, 일본은 디플레이션(물가 하락)이라는 만성 질환에 시달렸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일본은행(BOJ)은 금리를 0%에 가깝게 낮추는 '제로금리' 정책을 수십 년간 유지했다. 이 제로금리가 엔화를 '세계에서 가장 빌리기 싼 통화(Funding Currency)'로 만들었다. 평상시 전 세계 투자자들은 이자가 없는 엔화를 대출받아(엔화 매도), 금리가 5%인 미국이나 브라질 채권에 투자해 그 금리 차이를 수익으로 챙겼다. 하지만 11월 7일처럼 글로벌 위기가 닥치면, 이들은 투자한 위험자산을 즉시 팔아치우고 '빌렸던 엔화 빚을 갚기 위해' 시장에서 엔화를 다시 사야 한다(엔화 매수). 위기가 터질 때마다 전 세계 투자자들이 빚을 갚기 위해 엔화를 동시에 사들이는 '숏 커버링(Short Covering)' 수요가 폭발하면서, 엔화 가치는 자동적으로 폭등한다.


둘째는 '자본의 본국 송환(Repatriation)'이다. 제로금리는 일본 국내 투자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은행에 돈을 맡겨도 이자가 0%이니, 일본의 거대 연기금, 보험사, 심지어 개인('와타나베 부인')들까지 수익을 찾아 막대한 자금을 해외 주식이나 채권에 투자했다. 그 결과 일본은 30년 넘게 '세계 최대 순채권국'(전 세계에서 받을 돈이 가장 많은 나라)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평상시에는 이 자금이 해외로 빠져나가지만, 글로벌 위기가 닥치면 이 해외 자산이 위험해진다. 일본 투자자들은 즉시 미국 주식 등을 팔아 현금화한 뒤, 가장 안전한 '본국(일본)'으로 돈을 가져온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달러/유로를 팔고 엔화를 대량 매수한다.


결국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이라는 국내 경제의 침체는, (1) 엔화를 세계에서 가장 싼 조달 통화로 만들었고 (2) 일본을 세계 최대의 채권국으로 만들었다. 이 두 가지 구조적 요인이 위기 시마다 엔화를 사들이는 거대한 수요를 창출하며, 엔화를 역설적인 '안전자산'의 왕좌에 앉힌 것이다. 이는 스위스 프랑(CHF)과 함께 '성장'이 아닌 '대차대조표'와 '역사적 신뢰'에 기반한 안전자산의 지위다.


'하이 베타' 원화:

방패 없이 맞이한 글로벌 충격파


그렇다면 한국은 왜 정반대의 위치에 서 있는가? 엔화가 '침체의 관성'이라는 방패를 가졌다면, 원화는 왜 모든 충격을 맨몸으로 받아내는가?


이는 원화가 글로벌 시장에서 '하이 베타(High-Beta) 자산', 즉 세계 경기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산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의 구조적 특성은 위기 시 변동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가장 큰 이유는 한국 경제가 수출 중심이며, 그중에서도 반도체라는 단일 산업에 대한 의존도가 절대적이라는 점이다. 반도체는 글로벌 경기가 좋을 때 가장 먼저 수요가 폭발하지만, 경기가 꺾일 때 가장 먼저 주문이 끊기는 '초(超) 경기민감산업'이다. 원화는 '글로벌 경기의 바로미터' 또는 '탄광 속의 카나리아'로 불릴 만큼 경기에 민감하다. 11월 7일, 투자자들의 머릿속은 "미국 고용 쇼크 - 글로벌 경기 침체 - IT 기기 수요 급감 - 반도체 불황 - 한국 수출 직격탄 원화 매도"라는 단순한 연상 작용으로 가득 찼다.


이러한 경제적 민감도는 '완충재의 부재'로 인해 더욱 증폭된다. 미국이나 유로존은 GDP의 70%를 차지하는 '탄탄한 내수 시장'이 완충재 역할을 한다. 수출이 무너져도 내수가 버텨준다. 일본이나 스위스는 '안전자산'이라는 '구조적 관성'이 완충재다. 위기 시 오히려 돈이 들어온다. 하지만 한국은 이 두 가지 완충재가 모두 부족하다. 내수 시장은 수출 쇼크를 감당할 만큼 크지 않으며, 원화는 안전자산은커녕 위험자산의 최전선에 노출되어 있다.


이 경제적 취약성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완전히 개방된 한국의 금융시장 구조와 결합해 변동성을 폭발시킨다. 특히 '역외선물환(NDF) 시장'의 존재는 원화의 변동성을 키우는 핵심 요인이다. 서울 외환시장이 닫힌 시간에도 뉴욕과 런던의 NDF 시장에서는 24시간 원화가 거래된다. 이곳에서 글로벌 헤지펀드들은 한국의 펀더멘털과 무관하게, 글로벌 경기 침체에 베팅하는 수단으로 '원화 매도' 포지션을 잡는다. 이러한 투기적 거래가 더해져 하락 압력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방패막 뒤에 선 이웃들:

대만과 독일은 어떠한가


한국과 경제 구조가 유사한 수출 강국들은 어떨까?


대만이 대표적이다. 대만 역시 한국처럼 반도체(TSMC) 의존도가 높고 중국이라는 지정학적 리스크를 안고 있다. 하지만 대만 달러(TWD)는 이번 쇼크에서 원화보다 훨씬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는 대만 경제가 튼튼해서라기보다, 대만 중앙은행이 외환 시장에 매우 적극적이고 강력하게 개입하며 환율 변동 자체를 '통제'하기 때문이다. 한국이 외환위기 이후 시장 자유화를 택한 것과 달리, 대만은 여전히 '관리되는 안정성'을 유지하고 있다.


독일은 또 다른 사례다. 독일도 자동차, 기계 등 제조업 수출 강국이지만, '유로(EUR)'라는 공동 통화 뒤에 숨어 있다. 만약 독일이 '마르크화'를 계속 썼다면 글로벌 경기에 따라 원화처럼 극심한 변동성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유로화의 가치는 독일 경제가 아닌 유로존 20개국의 평균값으로 결정된다. 독일은 '유로존'이라는 거대한 공동 방패막 뒤에서 충격을 분산시키고 있다.


반면 한국은 (1) 경기 민감 산업에 의존하면서 (2) 자본 시장은 완전히 개방되어 있고 (3) 안전자산 관성도, 공동 통화의 방패도 없다. 즉, 글로벌 충격파가 닥쳤을 때 아무런 방패 없이 모든 파도를 정면으로 맞는 유일한 선진국형 개방 경제인 셈이다.


딜레마에 빠진 당국:

물가와 신뢰, 두 마리 토끼의 무게


지금처럼 급격한 환율 급등은 '수출 지원'이 아니라 '경제 위기'의 신호탄이다. 환율이 급등하면 원유, 가스, 원자재, 식료품 등 한국이 생존을 위해 수입해야 하는 모든 것의 가격이 폭등한다. 이는 즉각 '수입 인플레이션'을 유발해 국내 물가를 자극하고, 가뜩이나 취약한 내수 소비를 완전히 얼어붙게 만든다. 또한, 외국인 자본의 급격한 유출은 '패닉'을 유발하며 국가 신용도 자체를 위협한다. 정부와 한국은행은 이 상황을 그 누구보다 심각하게 인지하고 있다. 문제는 '개입의 딜레마'다.


정부가 쓸 수 있는 카드는 한정되어 있다. 첫 번째 카드는 '구두 개입(Verbal Intervention)'이다. "쏠림을 경계한다", "예의주시한다"는 메시지로 시장에 경고를 보낸다. 하지만 지금처럼 거대한 글로벌 쓰나미 앞에서는 효과가 미미하다.


두 번째 카드는 '스무딩 오퍼레이션(Smoothing Operation)'이다. 한국은행이 보유한 달러(외환보유고)를 시장에 직접 팔아 원화 가치를 방어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실탄'을 소모하는 일이다. 지금의 환율 급등은 한국 내부의 문제가 아닌, '미국발 글로벌 위험 회피'라는 거대한 흐름이다. 이 흐름을 거스르기 위해 어설프게 실탄만 낭비하고 방어에 실패한다면, 시장에는 "한국 정부는 환율을 방어할 능력이 없다"는 최악의 신호만 주게 된다. 이는 1997년의 악몽처럼, 오히려 더 큰 자본 유출과 투기적 공격을 부를 수 있다.

결국 정부가 기댈 수 있는 최후의 보루는 미국 등 주요국과의 '통화 스와프(Currency Swap)'지만, 이는 상시적인 정책 수단이 아니다. 당국은 국민 경제(물가 안정)를 지켜야 하는 절박함과 한정된 실탄(외환보유고) 사이에서 고통스러운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성장의 대가'를 넘어 '안정의 구조'를 향해


11월 7일의 1,450원 쇼크는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 아니다. 이는 한국 경제가 글로벌 시스템 속에서 차지하는 '구조적 위치'를 재확인시킨 '현상'이다. 우리는 '하이 베타 경제'로서, 글로벌 호황기에는 가장 뜨겁게 성장하는 '수출 기적'의 과실을 누렸다. 하지만 그 대가는 글로벌 불황기에는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고통스럽게 충격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번 사태는 우리에게 냉정한 질문을 던진다. '안전자산'이라는 특권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일본은 '침체'를 통해 그 지위를 얻었고, 미국은 '패권'을 통해 누리고 있으며, 독일은 '연합'을 통해 확보했다.


한국은 지난 수십 년간 '성장'을 통해 모든 것을 이뤄왔다. 하지만 이제 시장은 우리에게 '안정성'을 증명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1,450원의 환율은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경고를 보내고 있다. 단기적인 환율 방어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경기 민감 산업에 편중된 수출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고, 취약한 내수 시장의 체력을 근본적으로 키워야 한다.


나아가, 원화 자체의 위상을 높이는 장기적 노력이 필요하다. MSCI 선진국 지수 편입 등을 통해 변동성이 큰 '핫 머니(Hot Money)'가 아닌, 안정적인 '스티키 머니(Sticky Money)'가 국내 시장에 머무를 수 있는 제도적 신뢰를 구축해야 한다. '성장의 대가'로 치부해 온 이 변동성을 제어할 '안정의 구조'를 설계하는 것. 그것이 1,450원의 충격이 우리에게 남긴 진정한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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