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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발이 Jun 19. 2020

11월, 한 밤의 소주에는 두부찌개

엄마의 레시피

11월. 바람이 차가워지면서 추워지는 계절이다. 어두움을 앞세워 밤이 일찍 찾아오며 찬 바람과 함께 속삭인다. ‘술 한잔하기 좋은 계절이다’


누군가와 딱 한잔도 좋고, 혼자서 음악과 함께 술 한잔도 좋다.        

따뜻한 대포가 혀에 감기고, 서늘한 올드 라스프틴도 쌉싸레하니 좋고, 따끈한 물에 섞은 밸런타인 17년은 아주 좋다. Tom Waits의 Time만 곁들이면 요놈들은 안주 없이 홀로 마셔도 썩 훌륭하다. 이 장면 자체가 멀리서 보면 배 나온 중년의 쓸쓸하기 짝이 없는 궁상 떨기로 보일지 몰라도, 나 스스로에게는 외로움도 아름다워지는 궁극의 멋짐이 폭발하는 순간이다. 중년도 가끔은 나르시시즘에 빠질 수 있다. 11월이니까. Tom Waits의 노래가 안주고 라스프틴이 맥주니까.    


11월 한 밤, 집에서 마시는 소주의 파트너는 근처 편의점에 엄청 많이 진열되어있다. 닭발에서 편육에 곱창은 물론 각종 찌개까지 없는 게 없다. 맛도 있다. 가장 대중적인 조미료 맛을 가미했기에 입에 착착 감긴다. 심지어 전자레인지 한방이면 오케이니까 편하기까지 하다. 근데 개운하지가 않다. 홍등가 붉은 불빛 아래 곱게 차려입은 파트너를 선택해 하룻밤의 사랑을 나누는 느낌. 욕구 해소에만 급급한 일방적 사랑. 개운치 않고 죄짓는 듯한 하룻밤. 소주의 편의점 파트너들이 그렇다. 인스턴트 어거지 러브. 그래서 편의점 안주를 파트너 삼아 마시는 11월 한 밤의 소주는 궁상맞다.

요즘 젊은 친구들에게 가게 맥주집-일명 가맥집이 인기다. 황태구이와 갑오징어로 유명한 전주 전일갑오는 이미 전국구의 반열에 올라섰고 목포의 보리마당, 구례 청천슈퍼, 서산 광진상회, 을지로 나드리 식품, 서울식품 등등 근근이 명맥을 이어오던 전국의 가맥집들이 성황인 이유는 뭘까? 거리를 배경으로 한잔하는 멋도 이유가 될 것이고, 싼 값에 한잔 할 수 있는 돈도 이유가 될 테지만, 맥주 한잔, 소주 한 모금을 마시더라도 제대로 된 따뜻한 안주 한 젓가락과 하고 싶은 솔직하고 젊은 욕구가 반영이 된 것 아닐까?

어릴 적 우리 집도 아버지가 거나하게 취하셔서 친구 분을 모셔오면 전일갑오의 갑오징어, 보리마당의 깨두부처럼 엄마가 소주 안주로 내오시던 요리가 있었다. 3분이면 오케이지만 따뜻하고 맛있는 진짜 안주. 두부찌개.


두부찌개 레시피(두부 한 모 기준)

뚝배기에 집고추장(큰 수저 2수저) 푼 물을 팔팔 끓인다 (계량컵 5개 기준)

두부 한 모를 썰어 넣는다

대파, 마늘을 끓는 두부 위에 송송 썰어 넣는다

파 숨이 약간 죽으면 완성


두부찌개의 시작은 엄마의 “아들~” 부름과 함께한다. 옆집 두부가게에 가서 두부 남아 있으면 한 모 사 오라는 지시와 함께 뚝배기에 물이 올려진다. 우리 동네에서 싸움 제일로 잘하던 아저씨네 두부가게에 가는 시각은 대체로 8~9시 정도. 다행히 한 모 정도가 남아있다. 아주아주 공손히 “두부 한 모 주세요”(두부 아저씨 싸움 정말 잘했다)하면 문신 팔뚝으로 물통에서 두부 한 모를 꺼내 준다. 마무리도 공손히 “안녕히 계세요”라며 두부 한 모 사들고 집에 오면 뚝배기에 집고추장을 푼 빨간 물이 끓고 있다. 그럼 거진 끝. 두부 썰어 넣고 대파, 마늘 넣고 파와 마늘의 단맛이 국물에 베일 정도로 조금만 더 끓이면 된다. 빠알갛고 따스하고 맛있는 소주 안주가 3분 만에 뚝배기에 자리 잡고 있다. 자작한 국물을 머금고.

소주 특유의 달콤쌉싸름한 풍미 덕에 웬만한 안주는 무난하게 궁합이 맞다는 것이 소주의 미덕이라지만 11월의 소주에는 국물 안주다. 소주 한잔에 건더기와 국물을 한 수저에 떠서 후루룩 집어넣어 소주에 젖은 달콤쌉싸름한 혀를 달래 주는 순간이 11월의 낭만이다. 이 순간 안주를 위한 최고의 찬사는 “어우 칼칼하다!”

엄마의 두부찌개는 아주 칼칼했다. 간과 양념이 집고추장이 전부이니 특별한 맛이 있을 리가 없다. 두부의 담백함에 매콤, 칼칼한 맛만 더할 뿐이다. 심플하지만 그만큼 두부 맛을 살려주고, 취객의 흥을 살려주는 맛도 없을 것이다. 이미 일차 하셔서 얼큰하신 아버지와 일행분들이 산해진미가 안주로 나온 들 큰 감흥이 있었겠는가. 밤에 쳐들어오신 분들인데 부담만 더해지셨겠지. 그런 의미에서도 두부찌개는 만점이다. 재료비라고 해봐야 동네에서 싸움 제일 잘하는 아저씨가 만든 두부 한 모가 전부이니 만드는 엄마도 먹는 음주객들도 부담이 없다. 게다가 심플한 칼칼함이 혀를 자극하니 소주가 술술 넘어간다. 한 뚝배기가 금방이다. 딱 좋다. 더 먹고 추태 부릴 일 없이 자리를 깔끔하게 일어서기 좋다. 안주가 없으니. 요 타이밍에 안주 더 달라고 하면 진상이다. 여하튼 두부찌개는 3분 만에 오케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소주 안주였다. 하지만 나 조차도 못 먹은 지 족히 30년은 된 거 같다.

물자가 풍부해지면서 냉장고에 동그랑땡이나 오뎅 등 간단한 안주가 될만한 고기류가 상주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더 지나면서 인스턴트의 대량 공습과 배달 문화까지 발전하면서 두부찌개는 우리 집 밥상에서도 점차 사라지게 됐다. 술 문화 역시 급작스럽게 남의 집에 찾아가는 게 ‘몰상식’ 한 짓이 되면서 두부찌개의 3분 오케이라는 장점도 묻혀버린다. 밤에 술 먹자고 느닫없이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까.


11월이다. 소주 한잔이 생각나 냉장고를 열어봐도 마땅한 꺼리가 없다. 뭘 시키자니 한잔 술에 곁들이기에 양이 많다. 동네 편의점에 가니 동네에서 싸움 제일 잘하는 아저씨가 만든 두부는 없고 대한민국에서 돈 제일 많은 아저씨들이 만드는 두부가 있지만 집어 들고 싶지가 않다. 그 옆에 전자레인지 3분 오케이 인스턴트 한 파트너들이 즐비하다. 까짓것 두부 한 모 들고 가서 물만 팔팔 끓이면 끝인데 나는 노란 바구니 하나 들고 인스턴트한 파트너들의 요사스러운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궁색하다. 궁색한 모습은 게으름에서 시작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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