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PD의 맛있는 이야기
2025년 12월 4일.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지더니 하얀 눈이 세상을 덮고 겨울이 왔음을 선포했다. 추워진 날에는 팔팔 끓는 국물이 제 격이다. 꽁꽁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녹이는 데 따뜻한 국물 이상인 것을 아직까지 난 알지 못한다. 한국에서 수 많은 국물 중 언 몸을 덥히는 데 내가 으뜸으로 손꼽는 건 깨장어탕이다. 잘잘한 새끼 장어로 끓이는 탕이라고 해서 깨장어탕이다. 장어탕의 고장인 여수에서도 만나기 흔치 않은 음식이다. 다 자라지도 않은 비실비실한 장어로 끓이는 탕이라서 그런지 값도 싸다. 일 인분에 7,000 원. 그렇다고 깨장어탕의 맛이 값에 비례하진 않는다. 내가 이 지면을 통해서 소개하는 대부분의 음식처럼 깨장어탕도 가성비가 으뜸이다. 그리고 이제는 가심비도 으뜸이다. 소박한 깨장어탕 한 그릇이 호사를 누리는 법이었음을 깨달았다. 방송작가로 유명한 오유선 작가의 신작 에세이 [맑은 날도 궂은날도 모여, 인생이 꽃피리] 때문에.
계절의 설렘은 밥상에서 시작된다.
찾아온 계절을 입으로 먹노라면
절로 건강해지는 기분이다.
봄 햇살에 말린 취나물,
여름 햇볕에 말린 가지,
가을 햇살에 말린 고추,
겨울 햇빛에 말린 시래기.
- 오유선 작가의 에세이 '호사를 누리는 법' 중에서
깨장어탕은 기본적으로 시래기 된장국이다. 뚝배기 안에서 팔팔 끓던 거품이 주저앉으면 검푸른 시래기와 갈색 된장국이 모습을 드러낸다. 뚝배기 안의 국을 한 국자 퍼서 그릇에 담으면 비로소 하얀 속살을 드러낸 깨장어가 보인다. 귀엽고 앙증맞다. 썰어 놓은 고추 몇 점 툭툭 털어 넣고 뜨거운 국물 후후 불어가며 한 입 한다. 개운하다. 고소하다. 구수하다. 내 속에 켜켜이 쌓여있던 낡은 때가 한순간 정리된다. 밥을 말아먹으니 쌀의 단맛이 더해진다. 국밥이 술술 넘어간다. 어느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얼었던 몸은 이미 훈훈하게 풀려있다. 일 년 내내 항아리 안에서 곰삭은 집된장이, 겨울 햇빛에 말린 시래기가, 깨장어와 만나 개운하고, 고소하고, 구수한 맛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깨장어탕을 처음 접한 때도 6년 전 겨울, 백반기행 여수 편 촬영 때였다. 허영만 선생의 고향인 여수를 프로그램 제작 이후 처음 가는 곳이었기에 무척 신경을 썼었다. 그때 첫 촬영 아이템으로 방문한 집이 깨장어탕의 '남원식당'이었다. 여수 편 게스트였던 엄홍길 대장도, 여수가 고향인 허영만 선생도 굵은 땀방울이 맺혀가며 만족스러워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촬영 후 6년 만에 만난 깨장어탕은 변함없었다. 소박하고 따뜻한 맛. 반찬으로 회무침까지 내어주는 푸짐한 인심이 더해지는 깨장어탕 한 뚝배기 속엔 호사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뻔하디 뻔한 일상의 재료인 시래기와 된장. 그리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B급 장어로 만들어 낸 맛있는 하모니. 그 맛이 호사를 누리는 법이었다.
가는 시간이야 막을 순 없지만,
말린 취나물에 가지에 고추에 시래기에
봄도 있고, 여름도 있고, 가을, 겨울도 있다.
흘러가는 계절을 그냥 보내지 않고
내 밥상에 담아 다시 꺼내 보는 삶.
이렇게 하루를 맛있게 살아 내는 것이
소박하지만 가장 진짜인 호사다.
- 오유선 작가의 에세이 '호사를 누리는 법' 중에서
깨장어탕을 먹으면 입이 즐겁다. 몸이 따뜻해진다. 속이 편안하다. 하루를 힘차게 보낼 수 있는 기운을 얻는다. 오유선 작가의 표현대로 소박하지만 가장 진짜인 호사가 국 한 그릇에 담겨 있다. 흘러갈 수 있는 계절의 맛 시래기와 지역의 맛 깨장어를 집된장으로 맛나게 매듭지은 깨장어탕. 탕 한 그릇으로 호사를 느낄 수 있게 해 준 '남원식당'의 사장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덕분에 나는 호시탐탐 여수에서 진짜 호사를 누리려는 소박한 욕망에 사로 잡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