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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발이 Jun 20. 2020

동묘에서 청계8가를 본다

2019년 9월 13일 금요일 오전 12:49


백반기행 동묘촬영 덕분에 오랜만에 청계8가를 둘러본다.


중 3인가 고등학교 1학년 이후 청계8가는 나에게 일종의 노스텔지어이자 다른 녀석들과 나 스스로를 구분지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녀석들이 화양리나 천호동, 왕십리를 기웃대고, 큰 맘 먹고 명동을 헤매일 때 소위 수준있는 록을 듣는다는 고독한 리스너들만의 은밀한 공간. 어설프게 본조비를 듣는 녀석들이 영상물 수집차 세운상가를 서성일 때, 진지한 리스너들의 음반밀림 청계 8가. 30분에 한번씩 541 버스가 들르는 곳.

동네에서 LP판 한장에 2500원 할 때, 청계8가 연탄 때는, 한 때 박통의 자랑이었다는 청계아파트 ‘충남사’ 간판을 끼고 골목으로 들어가면 LP 천국이 펼쳐진다.

지금 동묘에 가면 중고cd도 만날 수 있다

.


모퉁이에는 지게꾼 아저씨들을 위한 똥튀김- 지금은 동묘의 명물이 되었다. 여전히 기름지고 맛은 없다- 기름 냄새가 자욱했고, 중고 작물 가전제품이 수북히 쌓여있는 가게 중간중간 포진해있던 LP판 가게들은 나만의 공간, 내가 녀석들한테 자랑할 수 있고, 아는 체 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라이센스 2000원, 빽판 600원. 지금도 이해못할 공과 유케이에서 아이언 메이든에 이차저차 관에서 듣지말라하여 듣기 힘든, 심지어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까지. 희귀 앨범 모두가 단 돈 600원이면 오케이. 정식 수입된 라이센스 희귀 음반도 잘만고르면 무조건 2000원. 왕복 버스비 200원 빼고도 엄청 남는 장사.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용을 득하기 위해 한시간을 까치발 들었다, 쪼그렸다, 쭈그렸다를 반복하다 만나게 되는 나의 베이비들. AC/DC, Uria Heep,  Moody Blues, BJH, Leonard Cohen 등등등. 전영혁 25시 데이트에서 겨우 들을 수 있었던 베이비들을 내 손에 쥐었을 때의 감정, 그것은 홀로 느낄 수 있는 궁극의 희열, 플라타너스적 오르가즘.

LP판, 중고가전, 카메라, 만년필 등 밑도 끝도 없는 골동품에서 소라, 고동, 가물치에 잉어까지 도심에서 유통할 수 있는 모든 물건이 값싸게 서식했던 곳, 청계 8가라는 밀림. 이 치열한 생명력의 공간에서 난 대학이라는 공인된 문명사회에 입성함과 동시에 멀어지게 된다. 밀림을 향유할 돈을 술과 담배에 써버리고 음악으로 나를 타인과 구별짓기 보다는 맑스로 구별지으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멀어지길 20년 후 청계8가라는 밀림은 전소되고, 재만 남은 비옥한 땅에 튼튼한 스카이라인이 들어서고, 청계 8가도 소위 문명화 된다. 하지만 밀림의 생명력은 끈끈했나 보다. 당시 청계8가에 줄곧 서식하던 생명들을 가락동 가든 파이브에 강제 이주시키려던 정권의 노력은 그저 노력으로 돌아가고, 8가의 값싼 유통을 책임졌던 생명들이 길건너로 자생적 이동을 시작한다. 그곳이 동묘시장이다.

동묘 뒷골목. 이곳에서 옛 청계 8가를 엿본다


청계8가에서 황학시장으로 이어지는 중고정글이 청계천 넘어 동묘로 넝쿨째 넘어와 새롭게 뿌리를 내리고 2019 현재에 이르러 백반기행을 비롯한 수많은 매체와 사람들이 이곳을 명물이라고 찾아와 주말이면 사람으로 넘쳐나는 밀림이 만들어졌다. 그 덕분에 1년 반을 기다렸다가 동묘로 넘어온 기름진 똥튀김도, 각종 장물아비들에게 물건을 받아왔던 근본없는 중고상회도, 골동품 가게도, 음반가게도 동묘에 있다. 동묘. 골목 어딘가에 있다. 시간이 흐른만큼 골목은 더 복잡해졌고, 물건도 더 많아졌고, 사람은 더더 많아졌는데 청계8가라는 밀림의 시대와 참 다르다.

골동품과 빈티지 사이 어딘가에 동묘가 있다


80년대 청계 8가는 까까머리 10대의 호기심이나 20대의 어설픈 열정만으로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빽빽하고 치열한 진짜 어른들의 공간이었다. 살아야 하기에 훔쳐온 장물부터 넝마가 들고온 고물까지 모든 물건을 사고파는, 생존의 자본주의가 밑바닥에서 형성된 공간. 합법과 불법이전에 생존이라는 단어가 우선하는, 진짜 생명의 공간. 10대의 호기심과 달라보이고 싶었던 치기어린 까까머리에게는 경외스럽게 느껴졌던 도심속 밀림이었다. 청계8가는. 반면 동묘시장은 거대한 동물원이다.

그 때 그 물건은 여전하고 그 때 그 사람도 여전하지만 그 때 그 시간은 흘러버렸다. 어차피 낡은 물건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흘러 낡아 봤자 개낀도낀이지만 그 때 그 사람은 시간이 흐르니 낡음을 넘어 늙어버렸다. 모든 늙은 사람들이 추억의 맛에, 싼 맛에, 신기한 맛에 흘러흘러 넘쳐온다. 낡아버린 옛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키치적인 밀림의 법칙을 젊은 친구들은 신기한 듯이 둘러보고 구경한다. 그들만의 패션 문화를 접목시켜 마치 동물원 사파리 투어하듯이 관찰한다. 젊은 친구들의 시선에서 경외심과 두려움은 없다. 재미와 신기함만이 있다. 청계8가와는 달리 동묘는 생존의 치열함이 빽빽한 밀림이 아니라, 생존한 것들을 모아놓은 동물원 사파리같다. 남아있어서 행복하지만, 음미할수록 씁쓸한 변질된 술같은 맛. 동묘시장. 내가 낡아버려서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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