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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발이 Jun 20. 2020

동그랑땡 vs 산적

엄마의 레시피

 

제사 음식의 양강을 뽑으라면 단연 동그랑땡과 산적이다. 이유는? 당연히 고기이기 때문이다.

우리 집 제사상에 고기가 주연으로 역할을 하는 음식은 동그랑땡과 산적이고, 육식파인 나에게 이 두 녀석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맛의 용쟁호투이다.

제사상의 용인 동그랑땡. 노릇노릇한 달걀 옷으로 무장한 요 녀석은 갓 부쳐냈을 때 가장 위력적이다. 따끈따끈한 동그랑땡을 한 입 베어 물면 먼저 육즙이 확 혀를 적셔온다. 감칠맛 가득한 동그랑땡 육즙에 이어 엄마 동그랑땡 특유의 매콤함이 입안에 퍼지면서 기름진 감칠맛의 단점을 잊게 해 준다. 이어서 느껴지는 기름진 고소함의 향연은 내 손가락이 동그랑떙 하나 더 집어 들게 만들고, 잠시 후에는 동그랑땡을 부치는 전기 프라이팬 옆에 쭈그려 앉게 만들고, 결국에는 한 접시 곱게 받아 들고 청주 한잔을 곁들인다. 이럴 때면 내가 장손인 게 고맙다. 아무 일도 안 하고 제사음식 맛 평가만 할 수 있는, 시대착오적이지만 일 년에 몇 번 꼭 누리고 싶은 행복한 순간. 노릇노릇 따끈따끈 동그랑땡에 청주 한잔 걸칠 수 있으면, 까짓 게으르고 눈치 없고 심지어 재수 없는 장손이라 욕먹는 것도 그리 두렵지 않다. 엄마의 손맛과 든든한 빽이 아직까지는 유효하니까.


동그랑땡 레시피
간 돼지 목살 2근                      
두부 1모 반 (면포에 물기 빼서)  
양파 2개 (중간 크기)
쪽파 10 뿌리
간 마늘 12쪽
소금 2t / 참기름 2t / 깨소금 2t
후추 약간
다진 청양고추 7개 (중간 크기)

먹고 맛보는 행위야 리액션만 충분히 하면 하등에 힘들게 없는 일이지만, 동그랑땡을 맛나게 부치는 일은 차원이 다른 영역이다. 특히 엄마의 동그랑땡처럼 갈색 딱정이 하나 없는 곱디고운 노르스름함을 입기 위해서는. 가끔 전집에서 전을 먹다 보면 종종 두 가지 경우를 맛보게 된다. 기름에 니글니글 해지는 경우와 달걀옷이 타버려 갈색 상흔을 입고 있는 경우. 기름에 잠수를 시켜 튀겨내는 니글니글한 전은 그나마 순간의 고소함으로 일시적 만족은 있지만, 타버린 달걀옷은 이내 육즙과 수분 빠진 퍽퍽함으로 이어지기 십상이어서 참 난감하다. 물론 밖에서 먹는 전이라는 게 대부분 술안주기 때문에 술기운에 넘어가긴 하지만, 어쩌다 상처 입은 기름진 전을 만나면 양파 간장만 먹다 오곤 한다.
하지만 엄마의 동그랑땡은 다르다. 본질 자체가 두텁기 때문에 부치는 기술이 최고 난이도인 동그랑땡임에도 엄마의 그것은 늘 완벽한 노르스름이다. 그리고 가장 맛있는 달걀옷을 입히기 위해서 엄마는 말 그대로 ‘기름땀’을 흘린다. 동그랑땡에 순수한 노르스름함을 입히기 위해서는 ‘적당량’의 신선한 기름에, 딱 발열점까지만 열을 높인 두꺼운 주물팬에 은근히 긴 시간 동안 부쳐주어야 한다. 팬에 깔린 기름 위에 달걀옷을 입은 동그랑땡을 뒤집고, 또 뒤집 고를 반복하며 속 뒤집어지는 기름 냄새를 제법 오래 참아주면 요 녀석이 서서히 ‘볼록’해진다. 속까지 완벽히 익어졌다는 신호다. 이 신호가 올 때까지 엄마는 기름 냄새를 끊임없이 맡아가며 한 손은 뒤집개로 동그랑땡을 뒤집고, 한 손으로는 달걀옷을 입힌다. 맛을 위한 완벽한 타이밍을 잡으러 기름과의 은은한 신경전을 벌인다. 동그랑땡 약 300여 개가 노란 옷을 입기 시작한다. 그 결과가 완벽히 노르스름한 맛이다.

동그랑땡 레시피 2
달걀물에 소금 약간 후추 약간
밀가루 옷을 입히고 달걀물 묻혀서
납작한 고기가 볼록하게 올라오면 다 익은 것

은은히 익혀진 엄마의 노란 맛은 오래간다. 냉동실에 꽁꽁 얼려 놓았다가 필요할 때 식탁 위에 따뜻하게 데워 노면 늘 촉촉하니 맛있다.

술안주로도 그만이고, 밥반찬으로도 그만이고, 그냥 먹어도 그만이다. 찌개 안에 섞여 들어가도 그만이고, 볶음밥에 으깨져 들어가도 그만이고, 케첩으로 졸여져도 그만이다. 곱디고운 노란 옷을 입은 자태에 이렇게 융통성 있는 맛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동그랑땡은 친근하다. 오랜 시간 공들여 볼록하게 맛을 채웠지만, 티 내지 않고 늘 곁에 있다. 굳이 비교하자면 맛의 홍길동이라고나 할까. 노르스름한 옷 속에 무지막지한 내공의 육즙을 가득 품고 있는 서민의 맛. 무리 속에 잔잔히 섞여 있지만 끝내 주연으로 활약하는, 변화무쌍한 홍길동 같은 동그랑땡.   


내 사진은 맛을 온전히 표현 못한다. 원통하다


제사상은 한국인에게는 최고의 푸드코트이다. 조상님들에게 대접하는 음식을 모든 며느리들이 빚을 져서라도 최상의 재료를 준비하고, 온갖 정성으로 지지고 부치고 끓여서 만든 음식 20여 가지가 상위에 펼쳐진다. 제삿날만큼은 가문의 손맛을 버라이어티 하게 즐길 수 있는 날이다. 산해진미가 버라이어티 하게 펼쳐지는 제사상 위에 홍길동 같은 동그랑땡에 맞서는 최강의 캐릭터가 있다. 제사상의 임꺽정, 산적이다.

산적 레시피
꽃등심에 칼집을 촘촘히 낸다 (고깃집에서 해줌)
꽃등심을 강판에 간 배즙과 양파즙에 적당히 재워둔다
간 마늘, 다진 파, 깨소금, 후추, 통깨에 참기름과 샘표간장을
한 근에 수저 세 개 반 정도 넣는다
양념을 재워둔 꽃등심에 겹겹이 바른다 (있으면 레드와인 한번 확)



갈색의 넙데데한 외모에 뜨끈한 육감을 풍기며 제사상 좌측에 떡하니 자리 잡은 산적은 말 그대로 산적이다. 사전적 의미로도 아래와 같다.
1. 생선이나 고기 따위를 양념하여 ‘대꼬챙이에 꿰어’ 불에 굽거나 지진 음식
2. [북한어] 통닭이나 통꿩, 족 따위를 양념하여 구워서 잔칫상이나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

사전적인 공식화된 표현에도 ‘대꼬챙이’, ‘꿰어’, ‘통’이라는 범상치 않은 단어가 툭툭 나온다. 심지어 엄마의 산적은 다진 파를 필두로 갖은 양념이라는 수북한 수염을 기르고 육즙까지 뚝뚝 흘리고 있으니,  쩌렁쩌렁 호통만 지른다면 산적은 영락없이 임꺽정이다. 달달 짭조름한 양념으로 무장한 꽃등심이 미디엄으로 구워져 3겹으로 쌓여있으니 그 압도적 위용에 제사상에 모여있는 손들은 임꺽정의 수하로 순순히 투항할 수밖에 없다.



맛의 깡패다


 
다른 집의 산적은 소고기의 경우 퍽퍽한 홍두깨나 우둔살 부위를 뭉텅하게 썰어, 단순한 간장 양념으로 구워낸 것이 보통이다.

반면 엄마의 산적은 고기 양념 기교의 종합체이다.
간설파마후깨참. 탈북 요리 연구가 윤선희 씨가 남남북녀의 양은 커플에게 알려준 양념의 기본 암기법이다. 간장, 설탕, 파, 마늘, 후추, 깨소금, 참기름. 요 7가지만 잘 배합하면 모든 양념 맛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엄마의 양념 레시피도 거의 동일하다. 특히 산적 양념에는 간설파마후깨참에서 ‘설’만 빼고, 모든 기본양념이 촘촘히 다 들어간다. 요 녀석들이 배합되어, 꽃등심이 구워지며 흘리는 육즙과 섞이는 향기는 실로 임꺽정이다. 강력하다.  


90년으로 기억된다. 당시에는 데모의 기억들이 매월, 매주 이어지던 시기였다. 데모도 일종의 퍼포먼스다. 사람들에게 인지가 돼야 하고, 각인이 돼야 한다. 그래야 인식의 공유가 시작되고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 가끔은 학생 신분으로 할 수 있는 몇 가지 퍼포먼스를 취하곤 했는데  그중 하나가 단식이었다.

나도 나름 진지하게 고민하는 대학생의 삶이란 부채 의식에 눌리곤 했다. 하지만 삭발을 하기에는 여자 친구를 만나야 했고, 혈서를 쓰기에는 파상풍과 감염의 위험이 너무 컸다. 반면 단식은 흔적이 남지도, 아프지도 않았다. 물론 아버지에게 유전적 식탐을 물려받은 나로서는 배고픔이라는 공포를 극복해야 했지만, 내가 일주일씩 단식을 해야 하는 고위 간부도 아니고 기껏해야 이틀 정도의 단식은 해볼 만했다. 실제로 그랬다. 산적만 만나지 않았으면.
하룻밤만 버티면 되는 어설픈 투사가 굶주린 위를 꾹꾹 참으며 집에 들어가는 순간을 산적은 놓치지 않았다. 저녁시간에 학교에 어슬렁 거리면 왠지 막걸리의 유혹을 참지 못할 거 같았고, 함께 모여 단식투쟁의 의지를 모으고 있기에는 허기졌던 그 날. 잠이라도 일찍 청하려 집으로 너털거리며 향했던 그 날. 집에서 나를 가장 먼저 반긴 건 산적 향기. 산적 굽는 냄새였다. 이틀 전 제사 지내고 남겨뒀던 산적을 맛나게 구워서 ‘막’ 아버지 저녁 반찬으로 등장하던 그 순간 내가 현관문을 열었던 것이다.


“와서 저녁 먹고 들어가라. 너 좋아하는 산적 있다”
괜찮다고 했다.
“산적 있다니까”

배와 양파즙에 연육 된 꽃등심이 간파마후깨참의 양념 옷을 입고 팬에서 구워지며 흐르는 육즙의 향은 달달하고 고소하다.
참았다.
“웬일이냐 산적인데”
그러니까요. 그만하세요 엄마 아빠. 산적이 풍기는 냄새만으로도 미칠 지경이에요.
“조금이라도 먹어”


조금만 먹었다. 미디엄 레어로 잘 구워 잘라 놓은 산적 세 쪽을 선 채로 손가락으로 홀랑 집어 먹었다. 이틀간 단식으로 사수하려던 민중민주 학도의 허기진 신념은 산적 세 조각으로 붕괴됐다. 어쩔 수 없었다. 아마도 박달재 고개에서 산적을 만나 순식간에 보따리를 빼앗긴 허기진 나그네가 그랬을 거다. 불가항력.
산적이란 그런 놈이다. 진짜 ‘산적’ 같은 위압적인 맛을 가진 제사상의 임꺽정. 흰쌀밥과 만나면 맛의 위력이 배가가 되는 그런 놈.

흰쌀밥이 가장 맛있는 순간은 단연 제사상 위에서다. 조상님에게 드릴 공덕으로 최상품의 쌀을 맑은 물에 잘 불린다. 최상의 불 조절 타이밍으로 고슬고슬 반지르르하게 지은 솥쌀밥이 젯밥이다. 게다가 잘 지은 밥이 제사가 끝날 때까지 시간을 가지면서 특유의 쌀밥 향이 휘발되고 적당히 식게 되면서 단맛이 증가한다. 먹기에 최상의 흰쌀밥으로 거듭나게 된다. 최상의 흰쌀밥에 고소달달 육즙 풍만한 산적이 더해지는 순간은 황홀하다. 엄마의 레시피로 무장한 산적이 부드럽고 촉촉하게 흰쌀밥과 치명적인 맛의 어우러짐을 보여준다. 산적이 진정한 임꺽정으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변화무쌍한 변신술의 귀재 홍길동이나 어머어마한 괴력의 털보 임꺽정이 동시대에 한 판 승부를 겨뤘다면 누가 이겼을까?‘

별 의미는 없지만 재미는 있는 상상을 가끔 해본다. 뭐 그런 상상 있지 않은가 조자룡과 관우가 한 판 붙고, 이소룡과 성룡이 맞짱을 뜨면 누가 이길까라는 류의 유치해서 재밌는 상상. 홍길동과 임꺽정의 맞짱은 근데 좀 슬픈 싸움이었을 거 같다. 서자라는 한을 가진 길동과 백정이라는 한을 가진 꺽정의 싸움이 한 판 축제가 되기에는 많이 아프다. 홍길동과 임꺽정은 자발적인 싸움꾼이 아니라 시대의 한이 내몬 도적꾼들 이어서 더 슬프다.

하지만 밥상 위 홍길동과 임꺽정의 한 판 승부는 축제다. 치열할수록, 승부가 계속될수록 기쁘다.  
정종 안주로 최고인 노르스름한 동그랑땡이 안다리를 걸면 흰쌀밥 위에 포개진 산적이 되치기를 한다. 동그랑땡이 두부와 어우러진 돼지 목살 육즙이 달걀 옷을 적시며 교태를 부리면 갖은양념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산적이 치명적 도발을 한다. 내 입안은 행복한 대결의 무대가 된다. 맛난다. 신난다.  
곧 있을 아버지 제사에도 이 둘은 당당한 주역으로 한 판 승부를 벌일 것이다. 맛있게, 멋있게.
엄마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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