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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발이 Jun 19. 2020

무말랭이

엄마의 레시피


당혹스러움은 두가지에서 비롯된다. 낯섬 혹은 다름.
인도 뉴델리 공항을 가본 사람들은 이해할 것이다. 출국심사를 통과하고 뉴델리 공항 출입구 문을 여는 순간 느껴지는 당혹스러움. 쾌적한 도로와 여유있는 여행객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여행자의 관성을 한방에 날리는 낯선 풍경. 차와 오토바이와 릭샤와 사람과 소가 뒤섞여 4차선 도로를 가득 메운 낯선 모습. 빵빵과 부릉과 음메가 뒤섞여 나마스떼 하는 낯선 소리. 일 순간 여행자의 혼을 날리는 낯선 풍경. 당혹스럽다.
하지만 이런 류의 당혹스러움은 점차 사라진다. 낯섬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낯익음으로 바뀌고 때문이다.  차와 오토바이와, 락샤와 사람과 소에 개까지 합세하여 외치는 나마스떼가 시간이라는 필터를 거치면 일상이 된다. 소심한 걸음을 만들던 거리에 가득 놓인 소와 개와 어쩌다 사람의 똥도 소나기라는 필터를 거치면 진흙이 되고, 자포자기, 대범해진 나를 만난다. 인도 촬영 14일의 경험이 증명한다. 낯섬에서 비롯된 당혹스러움은 그런 것이다. 적응이 된다. 하지만 다름에서 오는 당혹스러움은 적응이 안된다. 경험에서 오는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무말랭이가 그렇다.  30년 째 당혹스럽다.

나에게 본격적인 외식은 대학 입학과 시작됐다. 기껏해야 화양리 주점의 김치찌개나 포장마차 똥집에 소주나 찌끌이던 고등학생이 대입과 더불어 엄마 도시락과 이별을 한다. 적어도 한 끼는 밖에서 시작하게 된 것이다. 20년 음식 인생에 변혁의 시기가 온것이다. 대학 문장이 찍힌 파일을 옆구리에 끼고 밥을 사먹는다. 상상은 멋졌고 현실은 무말랭이와 함께 질겼다.
89년 학교 구내식당 밥은 600원. 내 첫번째 구내식당 밥은 떡만두국에 반찬은, 세가지 였던 반찬은 단 하나만 기억이 난다. 무말랭이.

질기고 질겨 어떤 맛도 느낄 수 없고, 씹으면 씹을 수록 짜증만 배어나오던 구내식당 무말랭이. 학교 앞 무려 1000원 밥상의 무말랭이도 마찬가지. 질기고 달았다. 학교 부근 어디서나 무말랭이는 심심치 않게 제공됐지만 약속이라도 한 듯이 질기고 달고 어째꺼나 맛이 없었다. 이후 30년간 지속된 나의 외식 라이프에서 무말랭이는 늘 질기고 달다. 엄마의 무말랭이와 다르다. 그래서 당혹스럽다.   

무말랭이 레시피
단단한 가을 무 깨끗이 씻기
새끼 손가락 굵기로 썰어서 굵은 소금을 ‘아주 살짝’ 뿌려 절인다
실로 꿰서 빨래줄에 널거나(소량) 채반에 널어서 고들고들하도록 햇볕에 말린다
(좋은 햇빛에는 약 2주간 말린다. 무가 서로 닿으면 썩는 수가 있다)

나에게 무말랭이는 맵싸한 사랑이다.

진한 향기와 자극적인 식감 그리고 매콤한 감칠맛으로 꾸민, 화려하지만 천박하지 않고 도톰하지만 질기지 않은, 맛있는 사랑이다.

무말랭이의 첫 맛은 식감에서 시작된다. 식객 허영만 선생은 식감은 맛과는 다른 영역이기 때문에 맛을 논할 때 식감을 말하면 안된다고 하지만 무말랭이만큼은 씹는 맛-식감에서 맛이 시작된다고 단언한다. 좋은 햇볕에 정성스레 말린 무말랭이는 우선 도톰하다. 건조실에서 열풍에 말린 비쩍 마른 무말랭이와는 외모부터 다르다. 두껍지도 마르지도 않은 적당한 볼륨감의 무말랭이를 씹는다. 순간 ’오도독’ 소리와 함께 농축된 무의 맵싸한 맛과 향이 배어나온다. 자극적이다.      
30년간 수 많은 무말랭이를 씹어봤다. 말라 비틀어져 씹는 순간 어떠한 유혹도 없는 질긴 무말랭이. 짜증이다.
쉬운 사랑은 사랑이 아니듯 쉬운 맛은 맛이 아니다. 순식간에 열풍으로 말려진 무말랭이가 보름간 좋은 햇살 받으며 숙성된 무말랭이와 대적하는 건 세상사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무말랭이에서 가장 중요한건 향기롭게 잘 말린 무다. 하지만 그게 다면 재미없다. 재미진 맛을 위해 엄마는 무말랭이에 무에게는 부족한 감칠맛을 더했다. 살짝 구운 오징어다.
 
무말랭이 레시피 2
말린 무를 찬물에 한시간 정도 불린 후 면보로 물기를 짠다
고운 고춧가루로 버무려 놓는다
마른 오징어를 불에 살짝 구워 먹기 좋게 썰어 고운 고춧가루로 무와 버무려 놓는다
(때에 따라 삶아 말린 고춧잎을 섞는 경우가 있다)
쪽파, 찧은 마늘, 맛난 새우젓 약간, 생강즙 약간, 통깨, 멸치젓 약간, 찹쌀풀 약간
(무 양에 따라 ‘적당히’ 양을 조절하신단다..어렵다)
고춧가루로 버무려 놓은 무와 버무린다
다 버무린 후 조청을 넣고 마지막으로 버무린다

’왠 구운 오징어?’라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그건 편견이다. 무말랭이에 더하는 대부분의 레시피가 고추잎을 더해서 무치는 거에 반해 엄마의 레시피는 살짝 구운 마른 오징어를 더해 줌으로써 새롭고 재미진 맛을 더했다.
갖은 양념이 더해져 무말랭이와 함께 잘 무쳐진 마른 오징어는 시간이 더해질 수록 맛을 더한다. 남도 김치가 조기를 갈아넣고 이북 김치가 생 돼지고기를 김장에 넣어 감칠맛을 배가시키듯 구운 오징어를 보태 자칫 단순해질 수도 있는 무말랭이에 촉촉한 식감과 감칠맛을 보태어 준다. 여기에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살짝 굽는 레시피. 살짝 구워서 쿰쿰한 마른 오징어 특유의 향을 날려 무말랭이 특유의 향을 해치지 않게 한다. 매콤한 양념에 무쳐진 구운 오징어와 함께 저온에서 일주일 정도를 지낸 무말랭이는 풍부한 매력을 지닌 요염한 맛으로 숙성된다. 오도독한 식감으로 시작해서 무의 알싸한 매콤함에 구운 오징어의 숙성된 감칠맛이 있고 조청의 좋은 단맛도 있다. 엄마의 무말랭이는 밑반찬으로 불려지기에는 아까운 하나의 완결된 요리다. 좋은 막걸리 한잔에 오도독 씹히는 무말랭이 한점은 참 좋다. 아주 좋다.

대학 구내식당에서 당혹스러웠던 무말랭이와의 첫 경험 이후 30년이 지났다. 얼마전 모교 입학 30주년 홈커밍 데이라며 89학번 동기들의 한 판 축제를 즐겼다. 밭에서 막 캐낸 싱싱한 무같던 녀석들이 어느덧 50줄에 들어서서 고래사냥을 부르고 있다. 어떤 녀석은 맵싸한 놈이었을 테고 어떤 놈은 달달한 놈이 였을거다.. 딱딱한 녀석도 있었고 육즙 많은 녀석도 있었을게다. 30년 전에는갓 캐낸 무처럼.  
나는 30년 전에 어떤 무였을까, 30년이라는 세월 속에서 나는 잘 말라져 왔을까?
씹었을 때 오도독하며 좋은 향이 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엄마의 무말랭이를 먹으면서 자라왔는데,

말라 비틀어진 무말랭이 같은 인생일까 당혹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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