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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발이 Jun 23. 2020

파강회 & 초고추장

엄마의 레시피


“참 신기해. 어렸을 땐 이게 참 싫었는데, 요즘에는 이게 왜 이렇게 맛있니!”
술 자리에서 아저씨들이 자주 하는 대화 내용이다. ‘이거’에는 사람의 어릴 적 입맛에 따라  참 많은 단어들이 자리잡곤 하는데

‘이거’ - 보리밥, 상추, 깻잎, 파김치, 갓김치, 홍어회, 청국장, 미역무침, 개불, 굴 등등등

사람 따라 입맛 따라 십인십색의 ‘이거’ 중에 나의 넘버 원 ‘이거’는 이거다.  파강회.

파강회 레시피
슴슴한 소금물을 끓인다(실파 색 파랗게)
실파를 끓는 소금물에 넣다 바로 꺼낸다(거의 순간)
찬물에 식힌다
새끼 손가락 정도로 파란 잎으로 쪽파 머리를 감은 후
꼬리를 살짝 집어 넣으면 매듭 완성

어릴적 삼단같은 머리를 곱게 빗은 기녀처럼 잔치상 한켠에 늘 자리잡고 있던 파강회가 난 한 번도 곱게 보이질 않았다. 불고기, 갈비찜, 잡채, 오징어 숙회, 동그랑땡, 수육 등등 기라성 같은 육체파 녀석들 사이에 교교한 푸른색 자태로 곱게 또아리 틀고 있던 파강회는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아니 범접하기 싫은 묘한 기운을 발하는 존재였다.
촉촉히 젖은 파란색으로 하얀 머리를 감싸고 있는 조그마한 몸은 서투른 젓가락질로는 잡기도 힘들었고, 씹을 때 느껴지는 미끌한 식감도 싫었다. 씹을 때 쭉하고 빠져나오는 끈적한 파즙도 싫었고, 혀를 살포시 적시는 가녀린 단맛도 싫었다.
곱게 매듭 짓느라 힘만 들었을 파강회를 매번 잔치상에 올리는 엄마가 이해가 되지 않았고, 술 안주로는 최고라며 맛있게 자시는 어른들은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에게 파강회는 교교한 푸른색을 머금은 잔치상 위의 요물일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나의 잔치상 위 주연들은 여럿 바뀌었고 그 동안 요물은 어느 새 자취를 감춰버렸다.

나의 잔치상(주안상) 연대기

1977~1982년. 유년기. 

소시지, 불고기, 갈비찜 보다 위대한 주연은 없던 시기.  
잔치상에 끊임없이 파강회 등장

1983~1986년. 사춘기. 

미제 전자프라이팬에서 구워주던 로스구이가 혜성처럼 나타남 
오징어 숙회의 파트너로 파강회 꾸준히 등장


1987~1988년. 성장기. 

오뎅탕, 대합탕, 똥집, 오돌뼈, 꽁치구이 등 마이너의 제왕들과 만남 

외삼촌, 이모부 오시면 파강회 간간히 등장

1989~1992년. 대학기. 

런던호프 골뱅이, 형제집 닭곱창, 실포 머릿고기, 고려호프 떡튀김,

싸리골 제육볶음 등 가성비 끝판왕들 영접 

집에 들어오는 시간이 극도로 적어지면서 파강회도 어쩌다 만남

1993~1995년. 군대기. 

광주 진짜 홍어회, 광주 육회, 담양식 갈비, 여수 회, 강진 백반-오리탕,

팥칼국수, 해남 황석어젓-굴국, 터미널 짬뽕 등 본격 남도 음식 훈련 

파강회 본 기억이 나지않음


1996~1997년. 청년기. 

무교동 낙지, 여의도 주신정 비빔밥, 단란주점 콩탕 등 도시 중심가 음식과 조우


1998~2006년. 암흑기. 

IMF 이후 자금난으로 맛의 달인, 식객 등 만화로만 음식 이론 숙지


2007~2018년. 중년기. 

[찾아라! 맛있는 tv]와 운명적 만남. 

평양냉면, 진미 간장게장, 회찾사 모듬회, 천지양꼬치 등 각종 미식으로 가산 많이 탕진     

2019~현재. 장년기.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과 사랑에 빠지다. 전국의 맛집 기행 중 요물과 우연한 재회  


1993년 이후 내 기억 속에서, 내 주안상 위에서 사라졌던 파강회를 다시 만난 건 순천의 대원식당 30첩 반상 위에 서다. 백반기행 순천 촬영 첫번째 집이었던 한정식의 명가 대원식당은 맛깔스러운 남도 반찬이 푸짐하기로 유명한 집이다.


실제로 상이 휘어져 있는 곳


직화 돼지불고기와 주꾸미는 본연의 재료맛 위에 불맛을 더했고, 도시에서 맛보기 힘든 백조기와 금풍쉥이는 짭조름한 고소함이 입맛을 돋군다. 알싸한 묵은지 맛은 흰쌀밥과 어우러지고,굴젓, 전어밤젓, 갈치속젓, 황석어젓 등 직접 담근 젓갈의 곰삭은 맛은 농후한 감칠맛이다. 남도 맛의 올스타들이 밥상이라는 피치 위에서 힘자랑을 하고 있는 와중에 푸른 요물이 교교한 빛을 발하고 있다. 파강회다.
푸른 요물을 순천 맛의 강호들 사이에서 만날 줄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 아니 예상하기에는 파강회를 맛본 기억이 너무 오래전 일이다. 가까운 경험이라도 있어야 예상이라도 하고 마음의 준비라도 하고 있을 텐데 그러기엔 파강회는 너무 많은 세월을 떨어져 있었다. 25년만의 만남.
인연이란 것이 이런 것일까?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든 대원식당의 맛깔나는 반찬들을 핑계로 외면하면 그만일 푸른 요물을, 어릴적 단 한번도 맛과 존재의 의미를 찾지 못했던 파강회를 순천 밥상에서 젓가락으로 집고 내 입으로 넣고 있었다.
이런!
미끌했던 식감이 부드러움으로 느껴지고, 데친 쪽파의 육즙이 촉촉하게 혀를 적시며 은은한 단맛을 낸다. 맛있다! 원더풀! 순천 한정식의 모든 반찬이 천일염의 좋은 짠맛에 기초하고 있지만 파강회는 다르다. 스스로 품고 있는 녹진하고 순한 단맛이 있다. 이 녀석 진짜 요물이다.



흔히들 음식을 음악에 비유하고는 한다. 나에게 순천 한정식은 헤비메탈이다. 맛이 강하고 현란하다 . AC/DC 앵거스 영, 딥퍼플 리치 블랙모어, 블랙 사바스 토니 아이오미, 메탈리카 커크 해밋, ,속주 달인 잉베이 멈스틴 등이 밥상 위에서 기타 대결을 벌이는 것 같다. 메탈 기타 거장들의 강한 리프와 현란한 속주의 찬란한 기타 사운드에 젖어있다가 에릭 클랩튼의 원더풀 투나잇을 들으면 이건 새로운 장면이다.

원더풀 투나잇에서 클랩튼의 기타는 강하지도, 빠르지도, 현란하지도 않지만 느릿느릿한 그의 가녀린 기타에는 사람을 매혹시키는 힘이 있다. 강한 사운드에 긴장된 근육을 이완시키는 부드러움이 있다. 격앙된 감정을 달래주는 달콤함이 있다. 순천 한정식 속에 자리잡은 파강회가 그런 맛이었다. 원더풀 파강회. 왜 이 맛을 어렸을 적엔 몰랐던 걸까?
쪽파는 재배 특성상 농약을 많이 치는 작물이 아니여서 과거와 현재의 맛이 크게 다르지도 않을 거고, 양념이 전혀 없기 때문에 지역에 따른 맛의 차이도 없을 거다. 게다가 엄마의 파강회는 진짜 초고추장과 늘 함께 했기에 구성으로도 완벽했다.    

초고추장 레시피
집고추장  수저 3
  수저 1, 식초  수저 1, 통깨 티스푼 1, 다진 마늘 약간, 다진  약간
너무 묽지 않게 만든다

새콤매콤의 진수가 엄마의 초고추장이다. 단맛은 살짝 스쳐지나가고 식초의 신맛이 집고추장의 매운맛과 어우러진다. 다진 마늘과 파의 풍미가 곁들여저 최고의 초고추장이 된다. 뭘 찍어먹어도 맛있는 엄마의 수제 초고추장이 파강회 옆에 빠진 적은 없었다. 그래도 나는 파강회를 어렸을 적에 안먹었다. 왜 그랬을까?
술자리를 빌려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늘 한결같은 대답이다.


“나이 먹어서 그래”

파강회가 중년의 입에 맛있어진 이유가 몰까 스스로 물어본다.
많은 음식을 접해서 혀가 단련이 돼 몰랐던 맛을 찾은 걸까? 모르겠다.
나이가 들다 보니 식탐이 더 늘어서 맛있다 생각하는 걸까? 모르겠다.
세월의 힘을 빌려 푸르른 요물을 대적할 용기가 생긴 걸까? 모르겠다.
예전에 엄마가 파강회 요리를 잘못했던 걸까? 아니다.

조만간 진천에 가서 엄마에게 파강회와 초고추장을 내달라고 조를 참이다. 내가 진지하게 맛을 느껴보고, 대학 입학한 아들을 데리고 실험을 해보면 답이 나오겠지.

2019년에 20세 아들이 파강회를 먹은 느낌은 무얼까?  20년 후인 40살에 먹였을 때 아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또 20년 후 60살에 아들에게 파강회는 어떤 맛일까? 재밌겠다. 흥미진진한 프로젝트가 계획됐다. 신난다. 20년만 기다리자. 그리고 20년만 더……..기다릴 수 있을까? 이게 더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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