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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Sep 08. 2020

독수리가 나타났다

우리는 서로 놀라서



자전거는 북쪽으로 향한다. 


자전거 길을 따라간다. 폭풍우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하늘. 놀란 공기가 깜짝깜짝 놀란다. 강물이 가득가득 흐른다. 하늘은 청명하고 나무는 보다 색이 선명하다. 이파리가 곳곳에 떨어졌다. 아직 해가 나지 않아서 지금이 저녁인지 아침인지 분간되지 않는다. 오랜만에 타는 자전거라 그런지 다리가 저릿하다. 무릎마저 아프다. 페달에서 발을 떼 툭툭 털어본다. 기어를 돌려 느리게 간다. 바람이 천천히 와 닿는다. 이제 괜찮아. 많이 놀랐지? 길에는 드문드문 사람이 보이다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나 혼자다. 자전거는 혼자서 간다. 풍경 속으로 파고들어간다. 오른쪽은 남강이고 왼쪽은 비닐하우스들이 그득하다. 그 경계에 있는 둑길. 높다랗게 불쑥 솟았다. 자전거 길을 따라 가는데 저 앞에 좌우로 높다란 나무들이 터널을 만든다. 여름 내 자랐구나. 비바람에 어린 잔가지가 수없이 떨어져 길 위에 얼기설기 빼곡하다. 




나는 엉금엉금 천천히 가는데 돌연 찬 바람과 함께 시커먼 그림자가 머리 뒤에서 나타났다. 어둠은 갑자기 머리 위를 드리웠다. 나는 화들짝 놀라 지켜봤다. 그림자 위에 새. 커다란 날개. 생각보다 너무 커서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 마치 까만 구름이 번쩍 눈앞에 나타난 것만 같다. 움직이니 구름은 아니고 파악하니 모양새가 새다. 온통 새카만 색을 보니 까마귀? 아니다. 그보다 몇 배는 크다. 놈은 날갯짓도 없다. 그저 유유히 떠다닐 뿐. 처음 본 큼직한 몸집. 날개 이쪽에서 저쪽 날개까지 너무 길다. 날개를 펴니 내가 팔을 편 것보다 더 넓을 것만 같다. 까매서 눈도 보이지 않아. 놈의 눈을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나는 보는데 가슴이 콩닥콩닥. 저기요? 저 못 보셨나요? 저는 지나가는 사람입니다. 아아, 독수리구나. 내가 독수리라고 깨닫는 순간, 놈도 내가 사람이라고 인지해주길 바랐다. 놈은 머리 뒤에서 쓱 날아오르더니 휙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어디로 갔나? 


그래, 전부터 이 동네는 독수리가 많은 동네였다. 올 때마다 하늘에서 빙빙 원을 그리며 날아다녔다. 독수리 떼가 사는 곳. 높은 곳에서 가끔 먹이를 낚아챌 때만 하강하는데. 어째서 지금 내게 나타난 거지? 설마 날 먹이라 생각하는 건가? 내가 먹이라고? 그러고 보니 낌새가 아무래도 반원을 그려 내게 돌진할 것만 같았는데 딴에는 한번 더 숙고한다고 뒤로 물러섰는지도. 


먹이인가 아닌가. 나는 퍼뜩 내가 입은 옷을 봤다. 밝은 색의 운동복. 야광 효과까지 있어서 번쩍거린다. 아뿔싸, 아내가 너무 튄다고 입지 말라고 한 건데. 한없이 가볍고 가벼운 색. 사람이 너무 가벼워 보인다고. 내가 그 따위 색 당신한테 안 어울린다고 했어 안 했어. 얼굴도 시커먼 주제에. 장롱 안에 꼭꼭 숨겨뒀는데 어째 그리 잘 찾아 꺼내서 입는지 원. 


그래서 일부러 주말에만 입는데. 아무래도 놈은 나를 가벼운 존재라 여긴 게 틀림없다. 아직 안심할 때가 아냐. 나는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자꾸만 뒤돌아 봤다. 고개를 왼쪽 오른쪽으로 번갈아 돌려서. 빠른 놈이니. 어느 순간 낚아챌지 몰라. 한 순간도 긴장을 놓지 않고 봤다. 놈은 나뭇가지 뒤에 숨어서 나를 봤다. 아직 재고 중이다. 공격할까 말까. 사람인가 먹이인가. 말이 통한다면 전해주고프다. 네가 볼 때 다소 헷갈리겠지만 나는 분명 사람이라고. 다시는 이 옷을 입지 않겠다고. 


분명 까마귀와 다르다. 까마귀는 사람을 보면 멀찍이서 까악 울 뿐 다가오지 않는다. 사람이 움직이는 한. 그에 반해 독수리는 날갯짓도 없이 너무도 스무드하게 날아와 금세 내 머리 위를 휭 스치며 지나갔다. 보는 거보다 훨씬 빠른 움직임. 이렇게나 가까이? 결코 자전거 따위로 벗어날 수 없는 속도. 나는 자전거에서 내려 꾸물꾸물 갔다. 혹시 강아지처럼 달려가면 쫓아올까 봐 살금살금 갔다. 갈까 말까. 있잖아요. 사람입니다. 사람입니다요. 읍소해본다. 저는 사람이라구요. 사람에게 이러면 안 되잖아요, 라고 항변하듯. 그제야 놈은 슝 하고 하늘 위로 유유히 떠올랐다. 작별을 고하듯. 어쩌면 독수리는 가을의 정령일지도. 나는 천천히 가는 척 마구 달아났다. 밝은 색 가볍고 가벼운 티를 원망하면서. 



집으로 돌아와 딸아이와 함께 산책한다. 바람이 머문 강변. 머리칼이 날린다. 두런두런 얘기 소리가 거닌다. 


추워요. 감기 걸리겠네. 나는 딸아이의 손을 꼭 붙잡는다. 딸아이가 목욕하고 남은 물. 이윽고 욕조에 들어선다. 미지근하다. 그래도 괜찮다.  


가을 독수리가 내 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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