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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Apr 28. 2021

경주 최 씨의 경주 나들이

기억을 믿어도 될까요?




고개 돌렸다.

여기저기.


경주에 입성하고 시선은 분주히 돌아갔다. 익숙한 듯 낯선 풍경. 주변에 보이는 거리는 어디선가 본 듯하면서도 하나하나 낯설고 새로운 거 투성이. 그러다 차창 너머로 언뜻 첨성대가 보였다. 아아 첨성대구나. 네가 바로, 아직 맞닥뜨릴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보인 첨성대. 서울에서 남대문을 보고서야 서울에 온 걸 실감하듯 나는 첨성대를 보면서 경주에 온 걸 실감했다. 보자마자 첨성대가 첨성대인 줄 알았는데 한편으로 진짜일까? 모형이 아닐까 일순 의심이 들었다. 생각보다 아담한 크기. 애걔 저렇게 작았던가? 그래 작았구나. 작았어. 보는데 순간 가슴 한쪽이 찌릿해졌다. 이 느낌은 뭐지? 첨성대가 진짜라는 걸 인지하는 순간 급격히 밀려오는 반가움? 반가움은 금세 감동으로 변했다. 어찌하여 감동까지? 처음 본 것도 아닌데. 감동은 소나기가 내리듯 갑자기 찾아왔다.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할머니를 우연히 길에서 만나는 것처럼 뭉클 감격적인 느낌이었다.


진주에서 한참을 달려 고속도로 벗어나 반복되는 신호등에 지칠 무렵이었다. 

대체 경주가 뭐라고, 내가 왜 뜬금없이 경주의 호텔을 예약했을까, 후회하는 와중에 첨성대를 만났다. 재작년 여름, 어디라도 주말을 맞아 갈 곳을 찾다가 카드 할인을 많이 받는 호텔 체인 몇 군데를 검색하다가 선뜻 찍었으리라. 지리산 호텔은 가봤으니 다음으로 가까운 곳 어디가 좋을까, 궁리 중에 부산 호텔은 차가 밀리고 자주 갔으니 그나마 가까운 곳으로 선택한다는 것이 바로 여기 경주가 되었음이다.  


첨성대를 가까이서 보려고 이리저리 돌고 돌아서 겨우 주차하고 땡볕에 칭얼대는 딸아이를 다독이며 어렵사리 코앞까지 갔다. 나는 첨성대에 다가가 사진을 찍었다. 그리 높지도 우람하지도 않지만 누렇고 짙은 벽돌이 하나하나 아기자기하게 모여 절묘한 매력을 이룬다. 그 옛날 선덕여왕이 지은 첨성대. 드라마 선덕여왕 하면 이요원이 떠오른다. 나는 문득 아내를 돌아봤다. 돌아보면서 선덕여왕을 연기한 이요원은 늙지도 않는데 이요원과 닮은 당신은 왜 그리 늙었냐고 물으니 별안간 아내의 핸드백이 들썩거렸다. 왜 그래? 어어? 하는데 핸드백이 붕 날아와 내 뺨을 철썩 때렸다. 아내는 젊을 적에 이요원과 닮았다는 얘기를 왕왕 들었다.(주로 내가 주장했다)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내 기억 속의 자태란, 귀엽고 예쁜데 아직 아이 같았다. 아이가 나이만 먹어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아이의 인상을 간직했다. 순수해 보였다. 아이가 말하길, 자신은 이미 다 컸다, 지금 이 아름다운 여성의 얼굴을 보라, 고 했다. 나는 여성과 아이를 번갈아 보며 당신은 참 아이처럼 순수한 여인이야, 라고 했다. 작고 섬세한 이목구비 때문에 또래보다 동안인 아내. 그랬는데 어느샌가 아내에게서 아이가 사라졌다. 아이는 아내가 밤에 잘 때만 가끔 나타난다. 나타나 말하길, 나의 젊을 적 아름다웠던 얼굴을 기억하는 남자 당신 하나이기에 당신과 산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지금의 얼굴에 과거의 얼굴을 덧대 봐주세요, 라는 바람. 그래, 예전에는 그랬었지 하면서 나는 드문드문 자는 아내의 얼굴을 평화로이 내려다다.

그리고 지금 나는 얼얼한 뺨을 어루만지며 첨성대를 보았다. 이름마저 거룩한 통일신라시대. 무려 천 년이 넘은 세월. 마치 그 시절이 보이는 듯하여 감했다. 어쩌면 그 시절 찬란했던 문화를 기억하기 때문에 지금도 감동적으로 보이리라. 비록 당시를 살아보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책이든, 드라마든, 영화든 나는 보았었기에.


여행지로 경주를 택한 두 번째 이유는 이 곳이 바로 내가 태어난 곳이어서 어떤 아련한 그리움이 묻어났기 때문이다. 그리움이라. 그리움은 태곳적 어디서부터 피어났을까. 나도 모른다. 여하튼 경주는 내 고향일까? 물음에 나는 늘 아니라고 말한다. 태어났다고 모두 고향이라 지칭하기엔 역시 무리가 따르니까. 태어나기만 했을 뿐 유년의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아버지의 말과 특유의 분위기를 유추하여 보건대 굳이 경주에서 태어난 이유를 종합하자면, 내가 바로 자랑스러운 경주 최 씨 관가정공파 31 세손이기에 비록 당시에 부모님은 대구에서 살았지만 시조 최치원 선생의 후손임을 특별히 기념한다는 차원에서 일부러 경주까지 달려가 경주에 있는 산부인과에서 응애응애 낳기만 하고 곧장 대구로 돌아온 것으로 분석이 되는데, 이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다가오는 어버이날에 찾아가 한번 여쭤볼 생각이다.

                       

첨성대를 보고 나서 어렵사리 주차한 노력이 아까워 첨성대 인근 대릉원으로 향하였다. 

작은 산처럼 커다란 고분들. 다들 잘 깎아 놓았다. 분명 어릴 때 태어난 곳이고 부모님과 친지 손에 이끌려 무던히도 왔던 곳이다. 외할머니가 영천에 살아 경주에 자주 드나들었고 이모도 경주에 살았다. 그럼에도 나는 대릉원 속에 천마총이 있는 줄을 몰랐다. 신기하게도 천마총은 발굴된 단면을 깎아 적나라하게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 무덤 안을 들어갈 수 있게 해 놓았다. 그 모습은 천마총이라는 이름을 좀 더 극적으로 빛나게 하려는 의도인 듯 보였다. 바깥과 달리 천마총 내부에서는 에어컨을 가동한 것처럼 찬바람이 돌았고 시원함을 너머 으스스하기까지 했다. 우리는 휘리릭 둘러보다가 어이쿠 춥네, 하면서 총총 나왔다. 너른 잔디밭에는 아기자기하게 꾸민 호수가 있고 언덕처럼 커다란 고분도 산재했다. 커다란 고분마다 그 안쪽에 뭐가 있을까 괜스레 궁금해졌다. 고분들이 천마총까지는 아니더라도 성골, 진골 왕족의 귀중품들이 한가득 나올 것처럼 보였다. 그들이 무수한 세월 에 무사했을까. 나는 어떤 짐작만 할 뿐 그 내역을 자세히 알지 못한다. 다만 도굴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얼마나 수고로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웃음이 났다.




경주 보문단지 안으로 들어가자 오래되어 보이지만 나름 이름값있는 호텔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오래된 관광지 거리. 그중에 한 곳, 내가 예약한 호텔로 들어가 짐을 풀었다. 이윽고 저녁을 먹으 바깥으로 나 어슬렁거렸다. 맛집을 찾으려고 폭풍 검색에 들어갔다. 레이더에 보쌈집이 등장했고 곧장 찾아갔다. 맛집이라는 평에 비해 손님보다 빈 테이블이 많았다. 화장을 얼굴에만 한 아주머니가 다가왔다. 화장을 얼굴에 하지 그럼 몸에도 하나? 라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정말이지 너무 얼굴에만 치중한 화장이었다. 목과 완전히 차별화된 색의 아주머니가 주문을 받았다. 목이 보통의 살색이라면 얼굴은 하얀 마스크를 씌운 것만 같았다. 마스크의 아주머니는 얼굴의 미세한 신경마저 모두 굳어버렸는지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주문을 기다렸다. 조금 무서웠다. 아내가 우선 보쌈 2인분을 말하고는 단 몇 초 간의 정적을 견디지 못하고 슬며시 “아이 것도 시켜야 하나요?”라고 물었는데 마스크 아주머니는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은 채 대답 없이 돌아서버렸다. 아아, 정말 으스스했다. 인형인가 사람인가. 어쩔 수 없이 떡갈비를 추가 주문하였다. 그제야 마스크 아주머니는 마스크를 움직이며 그것이 마스크가 아니고 제 얼굴임을 증명하듯 반가이 히죽거렸다. 우리처럼 어린아이를 동반한 부부는 늘 눈치를 본다. 2인분을 시켜야 하나 아니면 3인분을 시켜야 하나. 정작 아이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데 단지 세 사람이라는 이유로 3인분을 시켜야 한다. (단, 많이 먹는 아이는 다르다) 아내와 나는 전투적인 태세로 쌈을 싸 먹었고 목소리도 우렁차게 쌈채소를 더 달라 소리쳤다. 고작 떡갈비 하나에 보무도 당당한 손님으로 변했다. "밑반찬도 더 주시구요. 여기 마늘도 좀 주세요." 마스크 아주머니는 처음과 다르게 어찌나 공손한지, "뭐 더 필요한 거 없으세요?"라며 목소리마저 곱상하게 곰실거렸다. 맛집 맞구나 했다.


당당 만찬을 마치고 우리 가족은 산책 겸 경주월드 쪽으로 발길을 옮겼는데, “뭐 필요한 거 없으세요?” 하고 주위 상인들이 하나 둘 말을 걸어왔다. 이 집 저 집으로 지나갈 때마다 상인들은 멀리서부터, 그러니까 내가 그들을 인지한 시점보다 훨씬 앞서 지켜보고 주시하면서 우리가 다가오면 마치 거미가 먹이에게 "지금 거미줄 앞까지 와서 거미줄에 안 걸리고 그냥 가시려구요?" 하듯 “뭐가 필요하세요?” 하면서 헌팅을 했다. 관광지의 호객행위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데 가벼이 관광이나 하자는 우리 입장에서는 조금 불편했다. 저들도 모두 천년의 수도 신라의 후손일진대 조상님들이 보기에 자신의 까마득한 후손이 낯선 이를 줄곧 바라보면서 기어이 따라가 “뭐 필요한 거 없으세요?”라고 말 거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까. 역시 필요한 게 없다는 걸 이미 알면서 굳이 그래야 하냐며 타박할지도 모른다. 나의 후손이여, 아주 봉사 정신이 투철하구나, 타지에서 온 이들에게 친절히 전기자전거를 대여해줌으로써 그들이 아픈 다리를 부여잡고 터벅터벅 일그러진 표정으로 관광단지를 헤매지 않게 하는 공덕을 쌓는구나,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속으로 살며시 고해 본다. 

아시나요? 저는 사실 경주와 인연이 깊답니다. 호객하는 상인들이여, 저는 오리지널 타지 사람이 아니올시다. 그러니 지금부터 잘 들어 보시오. 나는 그 옛날 경주의 F6, 여섯 명, 즉 6대 촌장 소갈머리의 24 세손인 최치원 선생의 31 세손이며 이 곳 경주에서 출생했음이오. 비록 지금은 경남 진주에서 오래도록 살고 있음으로 인하여 경남의 환경에 다소간 영향을 받아서 후천적으로 유전적 형질이 경남형 인간으로 변형되었을 수도 있지만 불과 몇 시간 전부터 경주의 고유한 환경이 소리 없이 반기며, 어서 오너라 후손이여, 하고 나의 유전자를 다스려 근본적인 경북 사람만의, 그러니까 경북 사람과 경남사람이 뭔가 다른 기질이 있다는 가정 하에, 경북의 환경적 요소가 경남 특유의 지역 병에 걸린 후손을 약으로 다스려, 경북형 인간으로 원래대로 돌아와라, 공기로써 치료를 하는 중에 있는 사람이라고 당신네 상인들에게 고하고 싶다 이 말씀이오.


해가 졌다.


저녁에 아내의 술 심부름을 나온 김에 소화도 시킬 겸 해서 홀로 산책길에 나섰다. 나는 저녁을 먹고 나갔다 올게, 며 곧잘 산책을 빙자한 방황을 하곤 하는데, 이는 경주 최 씨의 시조 최치원 선생님이 말년에 전국 각지를 유랑한 것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감히 유추해본다. 유랑과 산책은 같은 라인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이쯤에서 정리하자면 산책은 곧 방황이요, 유랑이며 역마살인 것과 동시에 딱 혼자 살아야 편할 팔자, 그렇게 혼자 다니는 것이 좋으면 혼자 살지, 가정은 뭐 하러 만들었나, 아직도 지가 총각인 줄 아나, 라는 말을 십중팔구 아내로부터 듣기 좋은 유전자라고도 할 수 있다.


어둠이 내리자 신라 밀레니엄파크의 유등에 빛이 들어왔다. 여기에도 유등이 있다니? 유등은 내가 사는 경남 진주의 특산물이다. 가만히 보니 어쩐지 유등의 빛이 약해 보였다. 수많은 관광객의 왁자지껄이 유등을 더 빛나게 하는데 비해 지켜보는 이 없는 외로운 유등 은은히 빛을 죽인다. 경주의 유등은 진주의 유등에 비해서 어딘가 건조함이 느껴졌다. 나는 경북 사람들이 보기에 경남 병이 걸린 환자가 분명했다.


다음날, 우리 가족은 불국사로 향했다. 

불국사는 역시 불국사였다. 그곳은 관광객으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우리는 어떠한 사명감으로 불국사만큼은 샅샅이 둘러보겠다며 천천히 입장했다. 불국사의 유명한 예의 그 계단 앞에 이르자, 여기저기서 이런 말이 들려왔다. “책에서 보던 거하고 똑같다.” 이 말은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기도 하다. 책에서 보던 거하고 똑같은 계단을 사람들이 오르지 못하게 막아놓았다. 이어서 다보탑과 석가탑을 가까이서 보는데, 어릴 적 기억과는 다르게 다보탑의 크기가 석가탑이랑 비슷한 것이 아닌가. 석가탑은 남성의 이미지로 비교적 크고 다보탑은 여성의 이미지로 작고 세세한 면이 풍부하지 않나, 라고 기억했었다. 돌이켜보면 과거 내가 경주에 셀 수 없이 방문한 것이 과연 진실인가를 의심하게 만들 정도였다. 기억이란 정말 단순하다. 내가 경주에 온 적이 있다, 라는 것만 기억한다. 그러나 이처럼 경주에 오니 익숙한 것은 책에서 본 사진뿐. 기억을 어렴풋이 헤아리고 아스라이 더듬어 보지만 그 뿌리를 잡고 있지는 못한다. 늘 새로이 발견할 뿐이다.


이번엔 석굴암이다. 

어쩌면 석굴암이 불국사보다 더 큰 감동을 가진 건지도 모른다, 라는 리뷰를 보았다. 꼬불꼬불 토함산 정상을 향해 올랐다. 석굴암을 가기 위해서는 불국사 옆으로 난 산길을 올라야 하는데, 산길은 불국사의 정문 주차장으로 가는 시작 길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차가 밀렸다. 불국사 주차장으로 한 대가 들어가면 딱 그만큼의 거리가 당겨지고 또 기다렸다가 한 대가 들어가면 한 대분의 거리만 올라갔다. 기다림을 못 참는 우리네 현대인들. 불국사야 다음에 올게, 석굴암아 네 앞에 다가설 용기가 부족하구나 하고 우리 차 앞뒤로 여러 차들은 비상 깜빡이를 켜고 차를 돌려 내려가 버렸다. 그럼에도 우리는 버텨서 불국사 주차장을 뚫어 본격적인 산길 주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을 달려서 도로의 회전반경이 워낙 커 어지러워 멀미가 나올 것만 같다고 다 같이 노래 부를 즈음 석굴암 주차장에 도착했다. 어디선가 타종 소리가 들렸는데 가까이 살펴보니 1인 1타 1천 원이라는 안내판이 보였다. 마침내 석굴암으로 올라가는 길, 이라는 표지판이 보여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올랐는데 건너편으로 그러니까 불과 십 미터 앞에 내려가는 길, 이라는 표지판이 보이는 게 아닌가. 이제 막 올라왔는데 벌써 내려가는 길이 보이다니 어쩐지 이상하네, 하면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유리창 너머 석굴암이 빙긋, 따사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생각보다 작았고 심지어 귀엽게까지 보였다.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토함산의 깊은 산중에 이처럼 규모 있는 부처님이라니. 감동보다는 놀라움? 아마도 걸어서 오르지 않아서이다. 불국사에서 걸어서 등산하면 1시간 거리라고 했다. 땀 흘려 오르지 않았기에 고생한 만큼 보이는 법이 아닐까. 수행한 만큼 보이는 건 다르다고 했다. 오랜 수행자가 보는 것과 짧은 수행자가 보는 것은 다를 수밖에. 내려오는 길. 아내와 나는 주머니를 온통 뒤져도 천 원짜리를 찾을 수 없어 1인 1타 1천 원의 타종을 건너뛰었고 그만 이 정도면 되었지, 하고 경주를 벗어나 고속도로에 올랐다.


내게 경주는 처음 온 것처럼 낯설었다. 

기억은 기억하고 있다고 내게 말하지만 실은 그뿐일지도 모른다. 어느덧 중년이다. 웬만한 도시는 멋대로 이미지를 만들어 기억한다. 도시뿐이 아니라 세상 물정을 대개는 조금이나마 했기에 새로운 것을 배움에 주춤한 것이 사실이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닥치면 생각과 다른 일이 어디 이뿐이겠는가. 다시 한번 기억이란 놈에게 경종을 울리겠다. 경주는 내가 태어난 곳. 유년시절 외가와 이모가 있었기에 무던히도 방문했던 곳. 학창 시절 수학여행도 왔었고 그러고 보니 오래전 할머니를 보내드린 곳도 여기 경주다. 지금 기억하건대 그 옛날 B. C 57년 서라벌의 여섯 마을 촌장이 모여 신라를 세웠을 때 그중에 소갈머리라는 촌장이 있었다. 소갈머리는 최 씨의 기원인데 바로 경주 최 씨의 시작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최 씨들이 바로 여기서 갈래갈래 흩어지고 떨어져 나가 경주 최 씨가 아닌 각지의 최 씨가 되었다고 한다. 즉 세월이 흐르면서 사고를 치거나(의견이 다르거나) 말을 잘 듣지 않은 후손을 멀리 쫓아버렸는데(버림을 당한 건지도 모른다) 그들이 울며 도망가 전주 최 씨의 기원이 되었고 어쩌다 위쪽 지방으로 흩어져 간 후손이 해주 최 씨, 강릉 최 씨가 되었다고 했다. 사방팔방으로 멀리도 쫓겨갔나 보다. 삭녕 최 씨, 화순 최 씨, 영천 최 씨, 수원 최 씨, 충주 최 씨, 원주 최 씨 그렇게 갈라진 갈래가 모두 159개의 최 씨 본관을 만들었고 현재는 56개의 본관이 남았다고 한다. 이 말을 나는 경주에 있는 친지로부터 정확히는 아직도 제사 때 두루마기와 갓을 쓰고 제례를 치르는 어른에게서 들었기에 그 진위여부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아아 이럴수가, 지금 확인한 건데 소갈머리가 아니라 소벌도리라고 한다. 어쩐지~


역시 기억은 확실히 믿을게 못된다.





한여름의 고분 사이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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