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 반, 두려움 반
태풍예보가 뜬 그 날. 술집에서 나는 구슬님과 만났다. 빗소리는 간결하지만 빗물은 땅을 박차고 넘쳐 물줄기로 흘렀다. 인근 하천이 불어 새로 난 우레탄 길에 침범했다. 사람 따로 자전거 따로 바닥 표시가 물에 잠겨 보이지 않았다. 내가 가게 문을 열고 한쪽에 우산을 꽂자 저쪽에서 구슬님이 손을 들었다. 내 얼굴을 보고서 딱 손만 들었다. 웃거나 놀라거나 하지 않고 멍하니. 나는 마주 앉아 반가운 마음에 그녀의 얼굴을 봤다. 환한 표정으로 보니 환한 얼굴이 보였다. 표정은 환하지 않지만 피부가 어떤 환상을 자아냈다. 하얀 피부가 이국적으로 보였다. 너무 하얘서 눈빛 같다. 눈빛 속 실핏줄이 창백하다. 가련하다. 청순하다. 가냘프다. 보호해주고프다. 예쁘다. 여기까지 생각하는데 문득 벚꽃이 떠올랐다. 아주 옅게 물든 색. 순백에 가깝지만 자세히 보면 아주 곱게 베인 홍조. 금방 떨어져 버릴 것만 같은, 떨어지기 전 가장 하얀, 화장이 특이해서 그리 보이나 생각했다. 금방 사라질 것만 같은 존재. 그녀를 만날 수 있는 짧은 시간. 그녀가 말해주지 않아도 그것을 아는 것만 같은 동정. 그처럼 호기심 반, 두려움 반이었다.
술집에서 우리는 얼굴을 맞대 이야기를 나눴다. 천둥번개가 치는 밤. 태풍이 부는 밤. 빗물이 바람과 함께 몰아쳐 가게 창문을 우수수 때리고 지나가던 밤. 때문에 폭풍 속에서 더없이 아늑한 공간. 때가 되면 나가야 하는데 언제까지고 나가지 않아도 될 것 같은 평화.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니 구슬님에게서 이북 억양과 말투가 묻어났다. 말하는 중 동작도 어딘가 절도가 묻어났다. 딱딱 끊어지는 말투. 긴장하는 움직임.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괜스레 그런 말을 꺼내면 뭔가 새로이 경계를 할 것 같아서 꺼내지 못했다. 괜찮아요, 다 이해해요, 라고 생각은 하는데 으스스한 기분이 들어 결국 괜찮지 않은 부분이나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음을 부정하지 못했다. 술에 아무리 취해도 가시지 않는 기분이란,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는 느낌. 다 이해하지 못하네요. 죄송합니다. 다 내려놓지 못하네요. 미안합니다. 그녀의 눈빛. 비쩍 마른 몸. 찰랑이는 생머리. 구슬님은 얼굴을 가리던 뿔테를 벗었다. 벗으니 짙은 눈썹과 눈이 온전히 그 자태를 드러냈다. 당황스러웠다. 그녀의 눈은 정말이지 모든 걸 꿰뚫어 보는 듯했다. 거짓말하지 마라. 낱낱이 알고 있다 하는 눈빛.
"혹시 간첩입니까?"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간..."
술김에 질문했다. 취중 농담이었다. 그 질문에 그녀가 뿔테를 벗은 것이었다. 이제 얼굴을 가리는 건 없다. 가까운 거리. 오롯이 서로를 마주 보는 시간. 별안간 힘을 주고 보는 느낌. 우리는 어찌하여 이제야 마주 보는가. 지금껏 벽을 보고 얘기했던가. 무얼 보고 말했나. 서로를 자기 방식대로 만들어두고 자기 방식대로 보면서 지껄였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이렇게 아무 말하지 않아도 족한데. 그저 보고만 있어도 알 수 있는데. 정면으로 보면서 우리는 눈싸움을 했다. 눈싸움을 하면서 대화했다. 소리 없이, 노려봤다가 따뜻하게 봤다. 따뜻하게 보다가 돌연 쏘아보았다. 쏘아보다가 다정하게 봤다. 다정하다가 불쑥 찌르듯이 봤다. 찌르듯이 보다가 매만지듯 봤다. 매만지듯 보다가 빠뜨릴 듯 봤다. 빠뜨릴 듯 보다가 정말 빠뜨려 보았다. 빠뜨려 보니 옷이 다 젖는데도 옷을 벗지 않았다. 옷을 벗지 않으니 다시 꺼내서 봤다. 꺼내서 보니 다시 빠뜨려 달라 하는 것 같았다. 뭐야 당신? 그렇게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여러 시각으로 봤다.
"티가 납니까?"
나는 티가 하나도 안 난다고 대답했다. 어느 시점 구슬님은 자신이 탈북자라고 말했다.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에서 머물다가 작년에 들어왔다고 했다. 임대아파트를 받았지만 돈이 필요해 집을 비우고 보증금으로 인천에 월세방을 얻었다. 인천에서 살지만 돈 벌러 가끔 서울에 들른다고 했다.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했다. 아직 북에 남은 가족도 있고 인천에 데려온 동생도 돌봐야 한다고 했다. 어느새 자신의 사연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태곳적 이야기. 북한에서 온 여자. 신비로운 여자. 믿지 않던 설화. 마치 중세 마녀를 친히 영접하는 기분이랄까.
그녀의 이야기를 듣던 중 나는 소변을 참고 참았지만 최대한 스무드하게 이제 막 마려운 것처럼 일어섰다. 일순 확 도망 가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게와 따로 떨어진 건물 복도의 공동화장실. 카운터에서 열쇠를 받아 들고 가 열쇠를 돌려야 했다. 어렵게 소변기 앞에 서서 지퍼를 내렸다. 둑이 터졌다. 시원하게 온갖 시름이 쏟아져 나왔다. 일렬로 가지런히 곡선을 그리며 나오는데 눈높이에 작은 창이 보였다. 창은 반쯤 열려 있었다. 열린 창으로 바깥이 어찌 생겼나, 하고 지형을 살피는데 순간 방충망 너머로 구슬님의 얼굴이 보였다. 싱긋 웃으며 이쪽을 바라보는 그녀. 아니 왜 저기에? 날 봤을까? 봤으니까 웃는 거겠지? 나 지금 소변보는 중인데? 소변보는 남자의 얼굴을 보는 여자라니. 소변보고 있다는 걸 알까? 아니까 웃겠지? 왜 가게 안에서 기다리지 않고 저기에? 비도 오는데? 나는 부르르 떨면서 바삐 지퍼를 올렸다. 손을 씻는데 흐르는 찬 물의 감촉이 서늘했다. 나는 다시 가게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구슬님도 따라 들어와 내 앞에 앉았다. 내가 보니까 말없이 웃는 그녀의 표정에서 말하는 것 같았다. 도망가지 마세요. 눈가의 짙은 화장 안쪽과 피부의 옅은 화장 안쪽 맨살이 말하는 것 같았다.
당신,
달아날 수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