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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Apr 30. 2021

숨차 멈추고 싶을 때

중년의 마라톤, 아버지를 찾습니다.



두리번두리번 애타게 찾는다. 

나의 페이스메이커는 어디에?


안동 마라톤 대회. 

헉헉 달리는 중이다. 달리는 길 곁에는 낙동강이 나란히 흐른다. 돌아보니 시퍼런 강은 넘실넘실 아무런 말이 없다. 말없이 그저 함께할 뿐 하소연할 데가 마땅치 않다. 강바람이 불어와 머리칼을 날린다. 얼굴을 살랑살랑 어루만진다. 것도 모르고 나는 내리쬐는 햇볕을 견디지 못해 여전히 허우적거린다. 아아 힘들어 죽겠어. 나 좀 어떻게 해 주세요. 더는 못 견디겠어요.     


누구라도 의지할 이가 필요해. 

어디 누구라도 제 님이 되어 주세요. 나는 황급히 님을 찾는다. 앞서 뛰는 흰 모자를 따르다가 이번엔 검정 모자를 따른다. 점점 속도가 빨라진다. 나를 두고 어찌 그리? 보는데 하염없이 멀어진다. 가버린 님이여. 내 맘대로 님을 정하고 '남겨짐'을 반복한다. 이미 망가진 몸. 벌써 이렇게나 지치다니? 이상하다.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내가 이 정도밖에 안된단 말인가. 오늘따라 왜? 아까부터 의심이 든다. 정상이 아니다. 정상? 듣자니 이 동네 이름이 정상동, 정하동이라 했다. 나는 정상에서 정상 아닌 상태로 정상 아래 정하로 달리는 처지. 가만가만 목이 따끔거린다. 어쩐지 출발 전 목이 케이더라니. 그때 케일 때 물 마실 걸. 괜히 참았다. 물 한 모금이 간절하다. 날씨가 더워 땀이 줄줄 흐른다. 땀이여 너의 원천은 무언데 이렇게 끊임없이 샘솟는 거니? 


힘이 없다. 어젯밤 마신 맥주 탓일까? 늦게 잔 여파? 기력이 벌써 다 소진된 것만 같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힘이 나지 않는다. 아직 반환점은 한참이나 남았는데. 위기다. 절체절명의 시간대. 절박. 숨차. 위태롭다. 어떡하지? 내가 이러려고 안동까지 온 게 아닌데, 갈등이 깊어진다. 포기할 구실 뭐 없을까? 이대로라면 그냥 걸을 수밖에 없다. 걸으면 그냥 끝. 지금 이 순간만 버티면 될 텐데. 지금은 너무 일러. 포기하고 싶지 않아. 정녕 걷지 않으려면 방법은 하나뿐. 신체 중 믿고 맡길만한 구심점에 기대 보는 것. 앞서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구심점이 있다. 마음이든 몸이든 신념이 담긴 중심이 있을 터. 저 앞에 남자는 두꺼운 다리 근육 하나를 믿어 몸통이 다리에 질질 끌려가는 모양새다. 어떤 이는 풍성한 가슴 근육을 앞세워 다리가 졸래졸래 따라가고, 어떤 이는 뚝심 있게 팔뚝을 휘둘러 신체의 나머지를 따라오게 만든다. 저기 앞 머리 긴 청년은 커다란 머리를 냅다 던져(앞으로 숙여) 머리 아래 전체가 같이 가자 친구야, 하며 그저 넘어지지 않으려 엎어지는 달리기다. 저기 옆에 아가씨는 이어폰 속 노래를 따라 부르며 노래에 이끌려 간다. 부럽다. 모두가 꾸역꾸역 간다. 믿고 맡길 데에 믿고 맡기면서 잘도 간다. 그렇담 나는 어딜 믿을까. 다리를 믿을까? 아니 아니 이미 흐느적거린다. 팔을 힘차게 흔들까? 에이 팔만 더 힘들 뿐이다. 머리를 숙일까? 뱅글뱅글 땅이 어지럽다. 효율이 떨어진다. 그래 믿을 건 똥배뿐이다.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다. 일단 배를 쭉 내밀고 나머지는 따라갑시다. 어깨를 펴고 고개도 들어. 배가 앞장서 먼저 가니까 나머지 몸뚱이가 자동으로 따라간다. 아아 그나마 버틸만하다. 뱃살이 나를 이끈다. 그렇담 뱃속에는 뭐가 들었나. 엊저녁 아버지와 먹은 간고등어가 들었다. 고등어에는 단백질과 탄수화물 등 기타 유기물 따위가 아니라 오랫동안 숙성 숙고된 아버지만의 애착이 들었다. 애착은 뱃속에서 잉태되어 아들에게는 어떤 구심점이 된다. 그래, 고등어를 믿자. 나는 힘차게 발을 구르지만 어느 순간 꼬르륵, 고등어는 진즉 소화가 다 된 지 오래라고 답한다. 많이 좀 먹지? 이제 어쩐다? 어서 찾아야 한다. 믿고 따를 페이스메이커를.




헉헉!


숨 가쁘게 뛰어간다. 왜 이렇게 숨이 차나? 아뿔싸 그랬구나. 군중 대열에 섞여 있다가 착각한 것이다. 수많은 이들 속에 끼어있지만 나는 수많은 이들과 같은 개체가 아닌 즉 다른 사람이다. 저 앞에 앞에 사람이 달려 나가니 앞에 사람이 가고 옆에 사람도 가고 그 옆에 나도 가고 뒤에 사람도 따라오고 또 그 뒤에 사람도 따라오는 식이다. 이들은 그저 보통 사람이 아니다. 어쩌면 죄다 선수들만 모아 놓았는지도 모른다. 이른바 달리기 선수. 보통 사람들 중에 솎고 솎아서 전국 각지의 1등들을 여기 대회에 모아 놓았다. 나는 멀리 자그마한 도시에서 보통 사람인 주제에 1등들만 모인 여기에 어리둥절 그 사정도 모르고 서 있다가 탕! 총소리와 함께 같이 뛰었다. 


이것은 간격의 문제, 시각의 마법이다. 처음 출발선에 다닥다닥 붙어서 앞사람의 뒤통수가 코앞에 붙고 옆사람의 팔꿈치가 곁에 스치는 거리. 빽빽한 군중 속의 심리. 마치 나도 선수가 된듯한 이 기분. 선수들 곁에 있으니 어느새 선수가 되어 있구나. 선수가 아닌데 선수 같은 이 느낌. 늘 그렇듯 출발 전에는 자신감이 최고조에 이르러 이번만은 다르다, 이번만은 다를 것이다, 어쩌면 신기록을 세울지도 몰라, 선수가 되었는지도 몰라, 달리다가 힘들어도 내 몸속 어디선가 미증유의 잠재력이 폭발하겠지, 어떻게든 되겠지, 라며 그 정도(定道)를 망각한다. 그렇게 또 속는다. 언제나 그런 식이다. 결국 몇 배로 돌려받는다. 톡톡히 그 값을 치른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한여름의 안동 마라톤. 

나는 선두권에서 힘차게 출발했다. 양쪽으로 경찰이 띄엄띄엄 간격을 지킨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농악대는 꽹과리와 북을 친다. 출발하는 마라토너의 가슴이 한껏 벅차오른다. 나는 다리를 쭉쭉 뻗어 페이스를 올린다. 운동장을 벗어나 우르르 달려갈 때의 쾌감. 촘촘한 간격에서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빠른 속도로 질주한다. 마치 주변 이들과 일부러 발맞춰 뛰는 것처럼 내딛는 보폭이 질서롭구나. 왠지 느낌이 좋다. 어쩐지 예감이 좋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착각은 자유. 현실은 금세 이상을 무너뜨리고, 꿈을 날려버린다. 주위를 인지하지 못하던 시간. 낭만은 퍽이나 짧다. 이내 강변도로에 내리막이 끝나고 평지가 나타나더니 오르막이 시작되고 덩달아 고뇌도 시작되었다. 햇볕이 쨍하니 내리쬐자 간격은 차츰 벌어져 어느새 무리는 제각기 개인으로 전환되어버린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는 모두 출발선이 같았다. 같은 교복을 입었고 같이 밥을 먹었다. 그러다 시험을 치고 저마다 다른 진로를 선택하고 노력하고 질주했다. 정신없이 포기하거나 점프하거나 어느새 다른 지점에 서서 멀리 떨어진 친구를 바라본다. 야! 너 왜 그렇게 멀리 갔어? 네가 43번이고 내가 44번이잖아. 그러면 내 앞에 서야지. 왜 내가 따라갈 수도 없는 곳에 서 있어? 어, 45번은 어디 갔어? 보이지도 않아. 나 여기 있다고!  목소리 들려? 내 뒤에 서야지! 안 따라오고 뭐했어? 어디까지 간 거야? 왜 다른 곳으로 갔어? 지금은 대체 누구 뒤에 선 건데? 내가 여기 있는데, 라고 중얼거리는 동안 모르는 얼굴들이 속속 내 앞과 뒤를 채운다. 

속도와 페이스 조절을 모두 홀로 감내해야 하는 시각. 낯선 줄의 세상. 어른으로 버텨내려고 발버둥 치는 세월. 오버페이스로 인해 점점 숨이 찬다. 초반에 무리를 했을까. 이상하다. 아직 중반인데 난데없이 위험한 신호가 가슴 저 밑에서부터 올라온다. 쿵쾅쿵쾅 심장이 뛴다. 뛰는 중 섬찟, 통증이 스며든다. 어서 페이스메이커를 찾아야 한다. 43번과 45번을 놓친 나 44번이 줄을 찾는다. 저기 앞에 헐떡이는 남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힘겨운 레이스로 인해 시커메진 그의 얼굴에 내가 겹쳐 보인다. 나도 저럴까? 아 모르겠어,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냐.




안동은 아버지의 고향.


아버지는 늘 기다리는 편에 서서 아들 내외를 기다린다. 전화도 기다리고 문자도 기다리고 명절까지 내내 기다린다. 어제저녁, 아버지를 따라 식당에 갔다. 메뉴는 간고등어구이. 평소 아버지는 말이 없는 편이다. 마주 앉아 맹숭맹숭 멀뚱멀뚱 기다린다. 나는 정적을 깨려 말 걸어보지만 죄다 불필요한 말 뿐이다.

아버지는 타인이 서두를수록 느지막이 움직인다. 안동에 가면 도로가에 '양반의 도시, 정신문화의 수도'라는 푯말이 있다. 아버지는 특유의 안동 사람답게 어떤 상황에서도 기품 있는 여유를 잃지 않는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결코 먼저 말 꺼내지 않는 지조를 지킨다. 가끔 내가 어찌 지냈는지 먼저 고하지 않으면 떠날 즈음까지 기다린 후 "안녕히 계세요" 인사할 때 뒤늦게 어찌어찌 지냈느냐? 하면서 자신의 기다림을 (계속 궁금했는데 왜 빨리 말하지 않고 있어?) 인지시킨다. 기다리고 계셨구나. 나는 뒤늦게 알고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한다.


늘 기다리는 아버지는 특이하게도 생선구이 앞에서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인다. 


다급해진다. 간고등어 구이가 식탁에 놓인다. 그러면 누가 건들세라 바삐 젓가락을 놀려 고등어를 해체한다. 가시와 살점을 깔끔히 분리한다. 그때는 내가 지켜보는 입장이 되어 기다린다. 탱글탱글 짭조름한 살점. 보면서 침을 꼴깍 삼킨다. 나는 맨 밥을 으적으적 씹으며 지켜본다. 딱 하나 좋아하시는 음식. 평소와 대비되는 정열을 존중한다. 아버지는 구이를 크게 네 부위로 쫙쫙 찢어 가시를 바른다. 이를테면 전문가의 작업시간. 그리고는 큼직한 덩어리를 접시에 덜고는 "이건 너네 몫이다" 하고 본인의 작업에 오롯이 열중한다. 먹기 좋게 살점만 있는 부위는 퍼뜩 내주고 당신은 고등어 대가리와 가시에 끈끈히 붙은 것만 훑는다. 생선의 진정한 진미는 여기에 있노라 라 꼭 덧붙인다. 미처 고깃덩이에 딸려가지 못하고 가시에 붙어서 남은 딱딱한 부분. 번개 같은 젓가락질로 탁탁 벌려 쪽쪽 흡입하는 동안, 나는 덩어리를 한 점 떼어내 딸아이의 숟가락에 얹어준다. 딸아이는 밥 먹는 걸 잊고 고등어 살점만 옴싹 옴싹 먹는다. 가시 마디를 후비는 할아버지를 보고 딸아이가 묻는다. 

"할아버지, 근데 간 고디가 뭐예요? 고동이에요?" 그러자 아버지는, "고디가 고디지 고동이 뭐야?" 말하며 웃는다. "고디는 원래 조리할 때 기름이 많이 나온단다. 그래서 너무 많이 익히면 육질이 딱딱해지고 설익히면 몽글몽글해서 잘 부서지지. 딱 적당하게 익으면 먹을 때 육즙이 팡팡 터지거든. 사실 물컹한 아랫배보단 가시에 붙은 바삭한 쪽이 훨씬 맛나단다. 가시를 빨아보면 짭조름하지." 아버지는 내게도 들려준 적 없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내게는 보여준 적 없는 미소를 손녀에게 보여준다.    


자 먹어라 하면 그제야 젓가락을 든다. 아버지는 바삐 드신다. 밥 한술 뜨자마자 고등어 한 점 두 점 슥삭. 성질이 급해 잡히자마자 죽어버리는 고등어. 상대가 상대니만큼 급히 소금 뿌려 간을 하는데, 그 열기가 아직 남아서 말랑말랑할 때 먹어야 맛난다. 그런데 먹는 젓가락질까지 빨라질 건 뭐람. "난 다 먹었다" 하고 당신의 식사가 끝나면 곧바로 일어나 나가버리는 품새. 아들과 멀리 떨어져 사는 형편인지라 자주 만나지도 못하는데, 세월은 갈수록 빨라서 함께하는 시간은 휘리릭 지나가는데, 그럼에도 젓가락의 속도는 죽지 않는다.




멈출까 말까.


속도가 느려진다. 쾌지나 칭칭 나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농악대가 연주하며 마라토너들을 응원한다. 언뜻 아버지가 취미로 농악대 활동을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러면 혹시 저 중에 섞여 계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멀리 농악대가 보일 때마다 하나도 힘이 들지 않은 척, 아직 얼마든지 달릴 수 있다는 과도한 자신감을 내보이며 (뜻밖의 만남을 준비하며) 뛰었다. 그 때문인지 농악대를 지날 때마다 더더욱 오버페이스를 할 수밖에 없었다. (어제까지 그런 말씀이 없었지만 깜짝 이벤트로 나타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농악대를 지날 때마다 기대하고 실망하기를 반복했다. 페이스는 급격히 떨어졌다. 평소보다 힘들다는 느낌. 이러다 진짜 걸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무작정 수많은 페이스메이커를 찍고 그 뒤를 따랐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나를 배신하고서 멀리 러너들 사이로 사라져 갔다. 

이번엔 누굴 따를까? 돌연 몸에 딱 달라붙는 검은색 타이츠 아가씨가 눈앞에 나타났다. 바람과의 마찰력을 제로로 만들고 오직 달리기에만 신경 쓰겠다 하는 옷차림. 선정적이지만 날 끌어 줄 수만 있다면 가릴 처지가 아니다. 동글동글 흔들거리는 엉덩이. 하지만 역시 얼마간 쫓아가다가 놓쳐버렸고 버거운 상태가 되어 다른 자극을 찾고 찾았다.


안동이라 그런지 농악대가 유독 많다. 

혹시 몰래카메라처럼 아버지가 날 지켜보고 있을까? 인파에 섞여 언제 갑자기 나타날까 싶어 나는 힘의 부침에도 불구하고 상체를 빳빳이 세워 계속해서 손 흔들 준비를 했다. 점점 힘이 빠지고 속도가 떨어졌다. 그럼에도 어디선가 파이팅 소리가 들리면 반사적으로 돌아보며 파이팅을 외쳤다. 뛰고 있는 건 맞는데 뛰는 사람 중 가장 느렸다. 속절없이 추월당하다 마침내 가장 두려워한 갈등이 찾아왔다. 이제 걷느냐 마느냐의 순간. 이렇게 천천히 뛰는 것도 버티지 못하다니, 마지막 스퍼트를 위해 남겨둔 힘은 대체 언제 쓸 것인가, 지금 페이스를 끌어올려 달린다면, 달리고 난 뒤는 또 어쩔 것인가. 고민에 빠지다가도 저 앞에 농악대 소리가 들리면 어김없이 고개 돌려 살폈다. 한 사람 한 사람 세세히 얼굴을 살펴 궁극의 미소를 지어 보이나 아버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이라도 아버지가 저 속에 계신다면 나는 해맑게 웃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달리는 고통이 무겁게 심신을 짓누르지만 아버지가 보인다면 즉각 '파이팅!' 소리치며 웃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와 마주 보며 웃었던 때가 언제였던가 생각나지 않다. 그런 적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걸을까 말까 갈등 속에서 발걸음을 겨우겨우 움켜잡아 앞으로 나아갔다. 

뭐 때문에 이렇게나 버티는 걸까? 식수대의 음료가 담긴 종이컵을 잡다가 놓쳐버렸다. 이온음료가 담긴 종이컵. 마셔야 하는데. 한 모금 마시지도 못하고 지나친 식수대. 그냥 갈까 말까, 원망하며 돌아보는데 나처럼 놓친 이들 몇몇 굳이 돌아가 다시 음료를 마셨다. 나도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그러기엔 조금의 에너지 낭비도 허용할 수 없다는 절체절명의 순간이라 마른침을 삼키며 뛸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의 임계점을 드나들다 드디어 그토록 그리워했던 운동장 결승점에서 마지막 질주를 했다. 의아하지만 생각보다 괜찮은 기록으로 장렬히 통과했다. 그러고는 푹 쓰러져 주위를 살폈다. 아버지는 없었다. 물을 마시고 몸이 편해지니 문득 찾아오는 의문. 나는 왜 아버지가 기다릴 거라 생각했을까?    




운동장을 벗어나 아버지 집으로 갔다.


자주 만나지 못한 할아버지와 손녀는 여전히 어색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의 벌겋게 상기된 얼굴을 본 아버지는 “씻어라!” 하고 수건을 내주었다. 샤워하고 돌아와 한숨 돌리는데 아버지는 손수 커피를 타서 내밀었다. 이윽고 점심 메뉴에 관해 말하다가 아버지는 “마라톤을 하고 왔는데 고기를 먹어야지”라고 말했다. 나는 슬쩍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늙으셨구나. 전에는 몰랐다. 아버지가 이렇게나 늙었는지 전혀 몰랐다. 왜 몰랐을까. 아버지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찬찬히 바라본 적이 없었다. 밥을 다 먹은 딸아이가 할아버지의 핸드폰을 보다가 아주 옛날 시대 사람이 보인다면서 "누구예요?" 하고 물었다. 아버지는 핸드폰에서 당신의 농악대 차림을 보여주었다. 선비처럼 갓을 쓰고 해맑게 웃는 아버지의 미소. 나는 낯설어 당황스러웠다. 때마침 농악대 응원단들이 식당에 단체로 들이치는데 저마다 아버지와 알은척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마라톤 응원단이었다. 아버지가 아들이라며 소개하여서 나는 일어나 인사하고 파이팅, 말하며 주먹을 내밀었다. 아버지에게 어필하고 싶었으리라. 아직 파이팅이 살아있음을, 포기하고 싶지만 포기하지 않았음을, 끝까지 달렸다는 결과를 인정받고 싶었으리라. 어린아이처럼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어렴풋이 다리가 멈춰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 속에서 위급함 속에서 당신을 찾았노라고, 두리번두리번 애타게 찾았노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 마음은 뛸 때만 알고 뛰지 않을 때는 모른다.   


식당을 나서, "이제 헤어질 시간인가" 하고 아버지가 돌아섰다. 나는 "안녕히 계십시오" 말하고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순간 마주 보는 아버지의 얼굴에서 온화하고 편안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래. 잘 내려가거라.” 


다정한 목소리였다. 순간 흠칫 놀랐다. 바로 내가 그리도 원했던 페이스메이커의 얼굴이 아닌가. 가슴이 뛰었다. 나는 왜 지금껏 모르고 살아왔을까 하는 후회가 들었다. 드문드문 응원해줬던 농악대처럼 아버지는 늘 내게 밥 먹자, 과일 먹자, 차 마시자, 산책하자며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함께하려 했음을 나는 왜 보지 못했을까. 오래전 아버지와 떠나 살 때부터 나는 혼자 고민하고 결정하고 그렇게 나보다 더 빨랐던 아버지의 기대를 외면하고서 다른 이만 찾아 뒤쫓았다. 그들은 저마다 느려지는 나를 버렸다. 버리고 사라져 갔다. 44번인 나는 43번 친구와 45번 친구를 잃었지만 대신 늘 머리 위에 떠 있는 번호 1번을 발견했다. 언제부터 있었을까. 저기 앞에서 오래도록 기다리는 아버지의 시선을 지금에야 발견하다니.


안동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 내내 생각했다. 편하게 바라보던 아버지의 미소. 결코 먼저 말하지 않는 당신의 말을 이제야 알아듣는다. 기다리는 사람. 내가 저를 발견해주길 인내하고 인내하며 한없이 기다리는 존재.


어쩌면 아직 달리기 중인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뛰고 있구나. 완급 조절. 페이스가 꼬이지 않으려나. 막연히 짓누르는 불안감. 알람을 놓쳐 늦잠 잘지도 모른다는 공포. 포기하여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이 등허리에 매달린다. 그러나 동시에 버틸 수 있다는 마음, 결승점에 걸어서 통과하지 않을 거라는 어떤 안도감도 든다. 내게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페이스메이커가 있으니. 고개 돌리면 언제나 날 응원하는 그가 보일 테니까.


차마 하지 못했던 말.

아버지, 다가오는 어버이날 찾아뵙겠습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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