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정류장에서 내리지 못하면

그제야 허겁지겁 당신을 찾는다.

by 머피


이게 마지막이라고?


끝인데 끝인 줄 모르겠어.


함께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 팔걸이가 없는 자리. 커플석. 당신과 나란히 앉아 바깥 풍경을 본다. 우리는 여행한다. 구도심을 지나 신시가지로 나아가는 거리. 풍경은 바뀌고 바뀌어 어느새 내릴 곳에 당도했다. 버스가 서고 문이 열리는데 나는 섣불리 내리지 못한다. 주저한다. 왜냐면 당신이 아직 자리에 앉아있으니까. 같이 내리지 않으니까. 그렇지만 여긴 내가 내려야 하는 정류장이 분명하다. 내려야 한다. 저... 여기서 내려요. 내린다구요. 제가 내리는데 왜 당신은 앉아 있어요? 설마 저 혼자 보내시려구요? 저 혼자? 정말? 네? 저 먼저 내리라구요? 그게 무슨 말이죠? 어떻게 그런 말을... 제가 뭘 잘못했나요? 잘못한 게 없다구요? 그럼 왜 이러세요? 너무해요. 왜 절 혼자 보내시려 하나요? 왜 나를 따라오지 않죠? 저라구요. 저...! 제가 내리는데, 내리면...

버스가 떠나려 신호를 보낸다. 경적소리가 울린다. 부릉부릉 엔진음이 커진다.


나는 정류장에서 내렸다.


눈물이 난다. 눈물이 나지만 어쩔 수 없음을 안다. 이게 사랑이니까. 현실이니까. 받아들여야 함을 안다. 받아들이지 못하겠는데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알지만 알고 싶지 않다. 허무하다. 아는데 너무 슬프다. 슬픔이 벅차올라 가슴이 두근거린다. 나는 어쩔 줄을 몰라 그저 발만 동동거린다.


정류장에서 내리지 못했다.


나는 내리는 문 앞 버스 기둥을 잡고 어정쩡 서 있는 상태. 당신은 우리가 함께였던 자리에 여전히 앉아있다. 내릴 정류장을 지나버린 채 버스가 달린다. 이제부터는 어쩌면 내가 보지 말아야 할 풍경인지도 모른다. 보면 안 되는 장면인데 내가 우두커니 그 장면을 본다. 당신의 표정이 어딘가 낯설다. 내가 아는 사람? 내가 알던 당신? 의구심이 들 정도다. 내게 보여주던 그 표정이 아닌 거 같아. 당신은 누구예요? 왜 내가 알던 익숙한 표정을 짓지 않고 처음 보는 얼굴로 있는 거예요? 이봐요 당신, 제가 아직 여기 있다구요. 저예요. 왜 저를 향해 보지 않고 다른 이만 쳐다보는 거예요? 저예요. 저 아직 내리지 않았어요. 제가 내리지 않은 걸 아시면서 왜 다른 이만 보는 거죠? 저라구요. 저.


사랑이 지나가버렸다.


사랑이 지나가버렸는데도 나는 떠나보내지 못한다. 억지로 사랑을 붙잡고 있다. 당신은 점점 변한다. 내가 알던 사람에서 내가 모르는 사람으로 변해간다. 그럼에도 당신을 놓아줄 수 없어요. 저는 아직 당신을 사랑하니까. 사랑이 지나가버린 것을 알지만 예전 사랑하던 나날을 잊을 수 없어요. 그날을 어찌 잊겠어요.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다정히 마주 보던 시간을, 기억을, 장면을 부디 떠올려보세요. 사랑했잖아요. 사랑하고 사랑하는 눈길로 절 쳐다봤잖아요. 왜 그렇게 변한 거예요? 믿을 수 없어요. 믿기지 않아요. 지금이라도 금방이라도 다시 돌아올 것만 같아 당신을 놓아줄 수 없어요.


정류장에서 내렸다.


당장은 믿을 수 없는 슬픔이 몰아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러다 차츰 시간이 무디게 해 주었다. 그래서 이제는 견딜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몰아치지 않으니까. 가만히 더듬을 수 있으니까. 고요하다.


정류장에서 내리지 않았다.


믿기지 않는 장면을 보고 또 보면서 몇 번이고 무너져 내렸다. 아니야 아니야 하면서 변해가는 당신을 보고 또 보았다. 견디기 힘들어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함께 나란히 버스에 앉아있는 시간.

구도심에서 신시가지로 향할 때까지.

그 짧은 새가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시간.

어쩌면 짧아서 더 아름다운 지도.

나란히 앉아 바깥 풍경을 보고 구도심에서 신시가지로 옮겨가며

변하는 장면을 보면서 슬며시 잡고 있던 손을 놓는다.


"나 이 동네에서 오래 살았어요. 어릴 때 십 대 이십 대를 여기서 다 보냈어요."

"그래요? 그럼 이 동네 토박이네요. 당신이 살았던 곳이라 하니 새롭게 보여요."

"보세요. 여기 시내도 너무 친근한 곳이에요."

"시내도요?"

"그럼요. 고등학교 시절 야자 하기 전에 시내 식당을 찾아다니며 밥을 사 먹었었죠."

"주로 어딜 갔는데요? 패밀리 하우스? 천냥 돈가스? 멘드롱 따또?"

"엇! 멘드롱 따또를 알아요?"

"네, 알죠, 저도 갔었는걸요. 거기서 친구들이랑 햄버거도 먹고 미팅도 했어요."

"하하하, 웃긴다. 저도 거기서 커피 마시고 미팅도 하고 데이트도 했어요."

"그래요? 그런데 멘드롱 따또가 어디쯤 있었더라? 저긴가요?"

"아닌데, 저기 은행 건물 뒤편에 있었잖아요?"

"아아 그래요? 제 기억엔 저기 사거리 지하였던 거 같아요."

"음, 아마도 패밀리 하우스가 있던 자리랑 헷갈리신 거 같아요."


멘드롱 따또가 있던 구도심을 벗어나 강이 흐르는 길을 지난다. 강 너머 예술회관이 보인다. 버스가 속도를 낸다. 강 너머 다시 오래된 동네를 지난다. 우리는 여기저기 변하는 풍경을 보며 옛 기억을 회상한다. 그러며 서로의 기억이 어디쯤인가 교차하면 와하하 웃는다.


옛 동네를 벗어나 동네가 아니던 곳으로 간다.


예전에는 동네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동네로 형성된 신시가지. 모든 게 새롭기만 한 오늘. 내릴 곳이다. 어? 같이 내리는 거 아니에요? 네, 우리가 같이 탔지만 같이 내리는 건 아니에요. 당신 먼저 가서야 해요. 제가 먼저 내려야 한다구요? 당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죠? 영원히 절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잖아요. 벌써 잊었어요? 지금 제가 내리면 우린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구요. 그래도 제가 내려요? 내려도 괜찮겠어요? 왜 절 따라 일어나지 않으세요? 보세요. 버스가 지금 서려고 하는데, 제가 문 앞에 서 있는데도 당신은 어찌하여 그곳에 앉아만 계시나요?


버스가 섰다.


문이 열렸다.


나는 망설이다 결국 내렸다.


버스 문이 닫혔다.


문이 닫히고 버스가 출발한다.


나는 밖에서 우두커니 버스를 본다.


버스 안 당신은 앞만 보고 있다.


어서 고개 돌려서 나를 좀...


버스가 가는데도 당신은 나를 보지 않다가...


내가 막 뒤쫓아 따라가면서 울음이 터지니...


몇 번이고 몇천 번이고 당신을 부르니...


가슴을 부여잡고 고함지르니...


그제야 당신은 고개 돌린다.


차창 너머로 나를 본다.


안돼요. 안돼요. 안된다구요. 제발 저 혼자 내버려 두지 마세요.


당신이 나를 보는데 내게는 이제 버스 뒷모습만 보인다.


그마저도 곧 사라졌다.


안녕.


많이 사랑해줘서 감사합니다. 행복했습니다. 당신이 있어서 그동안 버틸 수 있었어요. 당신 덕에 그나마 안심하고 갈 수 있었어요. 저를 만나주셔서 제 옆에 있어주셔서 그리고 제 옆자리에 같이 있어주셔서 지켜주셔서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당신이어서 당신이라는 기억을 간직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라고,


이제야 털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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