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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Sep 20. 2022

우리는 서로 지켜보고 있었다

매일 만나지만 아직 동료가 아닌




쭉 지켜보고 있었다.


언제고 한 번은 붙어야 할 상대들이다. 두 명의 남자. 매일같이 마주치는 얼굴. 나는 너를 알고 너는 나를 안다. 안 보는 척하면서 힐끔거리고 관심 없는 척하면서 주의 깊게 보았다. 평소 우리는 눈인사만 나누는 사이기 때문에 아직 말을 섞지는 않았노라. 탁구장에서 으레 만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저 고개만 까딱거릴 뿐. 실력이 엇비슷해 바로 옆 테이블에서 게임을 즐길 뿐. 아직 동료가 아니다. 


나는 9부다. 

8부는 보통 탁구장에서 레슨 1, 2년 차를 가리킨다. 나는 레슨 받은 지 두어 달이 지났을 뿐이다. 그럼에도 벌써 8부를 넘보는 것이다. 8부의 서브는 어떤 느낌일까? 보는 것과 실제 접하는 것은 천지차이. 나는 몸소 접하길 원했다. 깨지고 당하더라도 느껴보고 싶었다.




나는 탁구장에 가자마자 9부가 되었다. 

원래는 최하위 부수 10부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그나마 학창 시절, 군대, 사회에서 친 구력으로 인해 처음부터 9부 대접을 받았다. 탁구는 공식적으로 7부부터 대회가 열린다. 지방자치단체가 주최하는 공식 오픈 대회는 7부부터다. 대회에서도 7부 인원이 가장 많다. 보통 7부로 대회에 나가서 입상하려면 최소 3년은 구력이 쌓여야 할 테다. 대개 40조 이상이다. 한 조에 3명씩 예선전을 치른다. 3명 중 2등 안에 들어야 예선 통과다. 2등으로 토너먼트에 진출하면 다른 조 2위와 64강전을 치른다. 이기면 옆에서 심판 보던 1위와 게임한다. 여기서 이기면 32강이다. 벌써 두 번의 격전을 치렀다. 다시 여기서 한번 더 이기면 16강, 또 이기면 8강, 거듭 이기면 4강, 승리하면 우승. 이런 식이다. 그러나 토너먼트가 진행될수록 더 강한 상대가 오묘한 서브를 가지고 기다릴 터. 이렇게 한 대회에서 최소 4강에 들어야 입상한다. 공동 3위가 되면 승점 1점을 받는다. 2위는 2점, 우승은 3점이다. 이런 승점이 3점이 모여야 비로소 승급한다. 120명 중에서 4등 안에 들어가기란, 다들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 같은 존재이기에 선수들은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찔릴지 알 수가 없다.  


한편 여자는 6부부터 공식 부수가 시작된다. 여기서 여자와 남자 부수가 접목되는 지점이 재미있다. 보통 여자 부수에 플러스 3을 더하는 식으로 계산한다. 즉 여자가 6부면 남자 부수 기준 9부가 되어 만일 남자 7부와 게임하게 되면, 핸디 3점을 받게 되는 식이다. 따라서 남자 7부와 동급 실력이 되려면 여자는 4부까지 승급해야 한다. 그래서 헷갈리는 부수 체계는 보통 남자 부수 기준으로 계산하기 마련이다. 아무튼 결론적으로 내가 받은 부수는 9부인데 9부는 비공식 부수라 아직 대회에 나갈 실력이 못된다는 걸 의미한다. 즉 구장 부수다. 구장 부수란, 구장에서만 논하는 것으로 으레 관장님이 임시로 정해주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만약 정말로 탁구에 대해 1도 모르고 시작한다면 남자든 여자든 모두 10부부터 시작한다. 레슨을 받고 이제 게임해도 되겠다 싶을 때 '몇 부세요?'라고 상대가 물으면 '저 10분데요'라고 답하면 되는 것이다. 우스개 말로 8탁에서는 누군가가 '우리 10부 클럽 만들어요'라고 했던 적도 있다. 참고로 관장님은 1부다. 관장님은 가끔 8, 9부를 상대로 핸디 9점이나 10점을 주고 게임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 상대는 '에이~내가 설마 1점도 못 따겠어? 사람 우습게 보네?' 라면서 도전하기도 하는데, 설마가 설마가 되고 우습게 보는 것이 정말 우스운 꼴이 되는 게 다반사다.



 

나는 탁구장 출입구 앞 맨 끄트머리 7탁 8탁에서 놀면서 6탁 언저리를 살핀다. 

7탁 8탁은 9부 10부가 노는 영역이고 6탁은 8부들이 노는 영역이다. 나는 대범하게도 줄곧 8부들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안보는 척하면서 그들의 플레이를 유심히 봤다. 저들과 나의 차이는 무엇인가? 나도 8부가 되고 싶다고! 이따금 내 앞에서 탁구 치는 종환 형이 "너 나한테 집중 안 하고 왜 자꾸 저쪽을 의식하는 거냐?"라고 화내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틈날 때마다 8부들을 쳐다봤다. 내가 9부라고 무시하는 그들. 실상 그들은 나를 무시하지 않았지만 선뜻 같이 게임해 주지도 않았다. 나는 탁구장 9부들을 격파하면서 더 높은 곳을 바라보았다. 9부들이라고 해봐야 연로하신 아주머니들이나 1년 안팎 구력들 뿐이었다. 이제는 올라가고 싶다. 내가 그렇게도 의식했던 그들의 이름은 하울과 상구다. 하울은 30대 초반이고 상구는 40대 중반이다. 하울은 마치 하마처럼 크고 육중한 덩치를 가지고 있었고 상구는 꺽다리처럼 키가 컸다. 둘 다 옆으로 위로 기골이 장대했다. 그럼에도 공을 힘으로 때리지 않고 살살 달래서 굴릴 줄 아는 남자들이다. 둘 다 한창 드라이브에 재미 들린 시기였다. 하울은 뒤에서 공을 때리며 드라이브를 넣을 줄 알았다. 덩치가 컸지만 유연했다. 상구는 초보였지만 회전 많은 포핸드 드라이브를 구사할 줄 알았다. 다만 드라이브 넣을 때 라켓을 다시 한번 고쳐 잡는 버릇이 있는 게 흠이었다. 나중에는 상구가 랠리 중 라켓을 고쳐 잡는 행동만 해도 상대는 긴장하게 되었다. 아무튼 내가 열심히 실력을 연마하여 성장한다면 반드시 만나야 할 상대들이다. 나는 9부로서 도전자의 입장이고 그들은 8부로서 방어자의 입장이다. 그들도 8부에서 7부로 옮겨가는 중일 테지만 나 역시 9부에서 8부를 갈망하는 남자다. 


탁구장 분위기는 대체로 하수가 중수를 원하고 중수는 하수를 어여삐 여기기 마련. 그리 믿으며 나는 하울과 상구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제가요, 지켜보고 있습니다요. 하염없이 지켜보고 있다구요. 이제 어여삐 여겨 주세요. 서방님, 때가 왔어요. 제발 저를 상대해 주세요. 첫날밤을 치러야 하잖아요. 저랑 한판 붙어서 가르침을 주세요. 잠깐 오해하지 마세요. 저도 남자니까 남녀의 첫날밤이 아니라 탁구인으로서 첫 게임을 말하는 거예요. 누가 더 센지, 이를테면 자웅을 겨룬다고도 하죠. 손발을 맞춰 본다고도 하구요. 아무튼 어찌하여 계속 외면하시나요?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데. 자꾸만 시선이 마주치는데. 텔레파시가 느껴지지 않나요? 왜 제 마음을 몰라주나요? 너무하세요. 저도 동료가 되고 싶다구요.


그러나 한게임만 하자고 해도 매번 돌아오는 대답은, 아 제가 지금 바빠서요, 아 제가 지금 저기 저분이랑 게임하기로 약속이 돼 있어서요, 아 제가 지금 레슨 들어가야 하거든요, 등등. 피할 수 있을 때까지 피하기만 하는 낭군들. 쳇! 8부들은 8부들끼리만 돌아가며 게임하고. 이제 막 9부에서 벗어나려는 새내기들을 받아주지도 않고. 새 신부가 이렇게 애처로이 초롱불 앞에 기다리는데. 저도 알 꺼 다 안다구요. 촛농이 다 녹아 새벽 암탉이 꼬끼오 울어대는데. 어서 저를 품어주세요. 이리 가까이 와요. 더 물러날 데도 없잖아요. 당신네들이 7부로 올라가기 전에 제가 먼저 와버린걸요.





어느 날, 

늘 그렇듯 내가 흘낏흘낏 8부 테이블을 살피는데 하울과 상구 둘만 있는 게 아닌가. 둘은 게임 중이다. 심판석도 비었고 주위 대기석도 비었다. 방해자가 아무도 없다. 절호의 찬스. 나는 이 때다 생각하고 용기를 냈다. 어차피 9부 테이블에는 인원이 차고 넘쳐서 넘치는 파도가 8부 쪽으로 흘러들어 가야 했다. 그것은 만고 불변의 자연현상. 나는 파도다. 밀물이다. 기꺼이 파도가 되어 산산이 부서지리라. 어디서? 8부 테이블에서! 마음먹었노라. 드디어 도전이다.

"여기 앉아도 되죠?"

나는 하울과 상구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그들은 올게 왔구나 하며 억지 미소로 답했다.

"아, 그러세요."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이미 심판석 의자에 앉아있었다. 마침내 왔도다. 그들은 멋쩍은 표정으로 게임을 계속했다. 그들의 승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관심은 오로지 하나. 그들에게 내 실력이 통할까 어떨까, 였다. 통하지 않고 진다면 그래, 어떻게 질까? 지는 것도 잘 져야 한다. 졌을 때 세트 스코어가 3대 0인지 3대 1인 지도 궁금했다. 3대 0이면 절망과 망신과 실력의 정체일 테고, 3대 1이면 그나마 희망, 3대 2면 산뜻한 선방. 그 이상은 감히 상상도 하지 않노라, 생각하며 침을 꼴깍 삼켰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심판을 보면서 그들이 서로가 넣는 서브를 어떻게 리시브하는지 매의 눈으로 지켜보았다. 


왜 자꾸 커트를 커트로 받지? 

그 정도로 하회전이 많이 걸렸나? 어쩌면 저게 정석 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의 플레이를 보면서 생각했다. 어째서 동작들이 하나같이 조심스럽지? 공격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그러면 내 움직임은 저보다 못하단 말인가? 의문이 들었다. 정말 보는 것과 실제가 다른 신비한 탁구의 세계. 와중에 게임은 점점 정점을 향해 달리고 내 가슴은 들뜨고 있었다. 손에 땀이 다 배었다. 긴장된다. 이제 곧 나의 포지션이 결정되겠지. 역시 8부는 욕심일까? 이제 곧 게임 한판으로 이미지가 갈릴 터다. 파도가 될 수 있을까? 자칫 썰물이 될지도. 그런 생각이 들자 좀 잘해야 할 텐데, 평소 실력의 반에 반이라도 보여주면 좋을 텐데, 하는 바람이 피어올랐다. 무대 뒤 순서를 기다리는 초보 가수처럼 긴장되었다. 


이윽고 게임 종료. 하울이 이겼다. 상구가 심판석에 앉으면서 내게 자신이 서 있던 쪽으로 가 게임하라고 했다. 나는 덜덜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무대에 섰다. 하울이 공을 쳐 준다. 하울이 친 공이 움직이면서 내게로 온다. 이제 정말 랠리 시작. 감사합니다 선배님. 하울은 삼십 대 초반이다. 나보다 탁구장에 먼저 왔으니 나이가 어려도 선배님이다. 하울은 우리 지역의 커다란 교향악단 지휘자로서 유명한 음악인이다. 지난가을, 음악회를 보러 간 적이 있는데 그는 젊은 나이에 지휘자 자리까지 초고속 승진한 천재라고 사회자가 소개하는 것을 들었다. 역시 지휘자답게 뭔가 예술가적인 기운이 깃든 우아한 동작으로 공을 보내왔다. 나는 레슨 코치님에게 배운 포핸드 자세로 공을 받았다. 정직한 폼. 랠리는 고작 세 개로 끝나고 드디어 가위바위보. 내가 졌다. 선공은 하울. 젊은 나이에 벌써 지휘자라니. 그는 하회전을 잔뜩 먹여서 짧게 서브했다. 공은 네트 가까이 떨어지더니 횡으로 튀어 올랐다. 특이하다. 어떻게 받을까? 그간의 숱한 경험. 사파 구력은 내가 더 선배다. 나이도 내가 더 많다. 경험을 떠올리자. 인생도 선배. 그냥 갖다 대면 백 퍼센트 네트행이다. 들어 올리던지 상회전을 먹이든 해야 해. 마침내 선택했다. 


나는 아주 작게, 고이 들어 올려서 서브를 받았다. 다행히 공은 네트를 스치며 간신히 넘어갔다. 과연 정말이구나. 올리지 않고 툭 밀었으면 꼬라박는 서브. 엄청난 회전. 실제 서브 때 공에 하회전을 충분히 넣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것도 8부가. 그저 짧게 보내는 건 가능하다 해도 공이 돌아오거나 옆으로 휘게끔 하는 건 수많은 연습을 필요로 한다. 투 바운드로 짧게 오는 볼을 나는 원 바운드 볼로 길게 보낸다. 힘겹게 리시브를 했지만 돌아오는 공은 휭! 바람소리를 동반한 드라이브다. 육중한 하울의 몸이 들썩거린다. 움직이지 좀 말아줄래? 그의 움직임에 움찔움찔 놀란다. 공이 상회전을 잔뜩 먹어서 넘어온다. 마치 스매싱을 받는 것처럼 나는 놀라서 라켓면을 일자로 세워 받았다. 대충 맞고 넘어가라는 블록. 제발 넘어가. 그러나 공은 붕 떠서 홈런이 된다. 탁구대 엔드라인 밖으로 아웃. 순간 까먹었다. 라켓면을 숙여서 긁거나 튀어 오르기 전 빠른 박자로 밀어야 하는데. 본능적으로 경직되는 동작을 바로 바꾸기란 역시 어렵다. 머리로는 숙여서 따닥 밀어라, 하고 수없이 외치지만 손은 세워서 어정쩡 블록만 하고, 나는 당하기만 한다. 어떡하지? 위기다. 


나의 짧은 서브를 하울은 커트 드라이브로 살랑 부드럽게 받아넘긴다. 그의 드라이브는 높이 두둥실 떠올라 큰 호선을 그리며 넘어온다. 나는 당황하여 황급히 막아서다 다시 홈런을 친다. 여기서 홈런은 오버 미스. 내가 백이 약한 걸 알고 하울은 계속 백으로만 공격한다. 역시 노련하다. 젊은 나이에 교향악단 지휘자라니. 하울은 내게 플레이로 말한다. 포핸드로 칠 줄 알았죠? 이번에도 백이에요. 아쭈 어설프게나마 받으셨네요? 옛다 그럼 스매싱이나 드세요. 그것도 백스매싱입니다요. 9부 주제에 그동안 많이도 껄떡거렸지요? 뭘 그렇게 봐요? 비벼보면 비벼질 줄 알았어요? 뭘 자꾸 쳐다봐요? 그래 버릇을 고쳐줄게요. 어디서 감히 8부 테이블을 넘보셔? 8부와 9부의 차이는 하늘과 땅. 레슨 1년 차와 2개월의 차이. 드라이브의 회전수 차이만 해도 1초에 몇 백 단위일진대. 뭐라고? 세어봤냐고? 게다가 9부 테이블이 복잡하다고? 거기서는 맞수가 없다고? 캬! 건방진 사람. 그렇다고 여기로 오면 쓰나? 이 쪽도 복잡하단 말입니다. 루프 드라이브라고 들으나 봤을까요? 어디 한번 받아보세요, 한다. 나는 큼직한 하울의 움직임에 얼어 연신 아웃만 되어서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백지장인 얼굴에 눈은 초점이 풀려 점수판을 보니 세트스코어는 어느새 2대 0. 패배의 기운이 스멀스멀 드리우고. 심판석의 상구는 예상했다는 듯 하품을 하며 지켜본다. 그럴 줄 알았다고. 그는 하울의 서브만 쳐다본다. 하울의 동작만 보면서 분석한다. 내겐 관심도 없다. 


이제 곧 3대 0이 되겠지? 발이 달달 떨린다. 어쩐다? 점점 소외된다. 그래 이게 9부와 8부의 차이. 나는 왜 몰랐던가? 꼭 부닥쳐봐야 깨닫는 거니? 패배의 쓰라림. 3대 0. 여기서 0은 '떡'이란 말로 변환된다. 따라서 3대 떡의 아픔. 떡은 가끔 빵이 되기도 한다. 삼대 빵. 이른바 삼빵. 짙어가는 무력감. 힘 빠져. 배고프다. 문득 떡이 먹고 싶구나. 쫀득쫀득. 다 먹으면 외로워질 테지. 향후 며칠간 탁구장도 쉬게 될 테고. 아직 게임은 세 번째 세트 중이지만 패배감이 머리를 무겁게 휘감는다. 앞으로 8부 7부를 만날 때마다 전두엽에서 패배감이란 구렁이가 꿈틀꿈틀 기어 나올 터. 구렁이는 온몸에 똬리를 틀어 결박하겠지. 그러면 나는 움직이지 못하고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공이나 주으러 달릴 것이다. 이렇게 3대 빵이 되면? 삼빵 당하면? 아무튼 한 세트도 따내지 못한다면 뻔하다. 그렇게 될 것이다. 하울과 상구. 그들은 다시금 당당히 회피할 테지. 너 따위 하수와 놀아줄 시간이 없노라. 우리는 비슷한 상대가 넘쳐나. 넘쳐나는 8부들과 더 높이 7부랑만 놀 거야, 라고 쏘아보겠지. 나는 멀리 공을 주워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그래 어차피 3대 빵떡이 될 텐데. 마음을 비우자. 잃을 것도 없다. 패턴을 바꿔 보자. 일단 할 수 있는 건 해보자. 해보지는 않았지만 생각한 대로 시도라도 해야 돼. 다음을 위해서. 다시 도전이란 걸 하기 위해서. 


3세트 종반에 들어가서 나는 서브를 다양하게 바꾸기 시작했다. 어차피 승부다. 극도로 짧은 커트를 넣고 리시브가 뜨면 냅다 때려버렸다. 어떻게든 날려야 한다. 치기 힘들더라도. 이 짧은 3구를 위해 나는 과감히 테이블 옆을 따라 스텝을 밟았고 휘리릭 몸을 날렸다. 하울의 움직이는 서브에도 나는 확 다가가 최대한 몸 가까이에서 머리를 내밀어 공을 받았다. 정성을 들여, 때릴 듯 때리지 않고, 안 때릴 듯 날려버리는 플레이. 그러니 실수는 줄어들고 움직임은 간결, 리드미컬하게 변했다. 이른바 노가다 탁구. 많이 움직이는 플레이. 정성을 다한다. 부지런히 공을 따라가는 스텝. 나는 그동안 어째서 움직이지 않았던가. 


움직이면 하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을 주으러 달려가고 주워오는 쪽은 하수라 여겼다.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때려라 날려라 하는 말만 숭배했다. 어떻게든 네트를 넘기라고 배웠다. 아웃되어도 괜찮아. 결코 네트에 박아서는 안 돼. 공을 날리는 쪽이 되어야지 줍는 쪽이 되면 안 되는 거야. 고수는 공을 기다리고 하수는 뛰어다닌다. 고수는 코너웍 하여 공을 화든 백이든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보내고 하수는 화를 받고 백을 받으러 뛰어다닌다. 이것이 여태껏 내가 아는 상급 탁구였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움직이지 않으려고 했다. 어딜 귀하신 양반이 함부로 움직일쏘냐. 가만히 있는 게 장땡이지. 양반은 가랑이를 함부로 놀리는 게 아니라고. 머슴들이나 정신없이 뛰어다니지. 에헴! 네 이놈 어서 공 주워오지 못할까. 에헤헤 재밌구나 요놈. 더 멀리 날려주마. 나는 탁구대 중간에 박혀 이쪽저쪽 요리조리 보내는데 네놈은 무릎이 빠개지도록 몸을 날리는구나. 그래 이것이 고급 탁구지. 이른바 양반 탁구, 고수 탁구 아니겠느냐. 그렇게 생각했다. 어리석게도. 


그게 아니란 것을 지금에야 깨닫는다. 무조건 공을 따라가 가까이에서 받아야 한다. 미리 가야 해. 차이가 있다면 머슴처럼 누가 시켜서 뒤늦게 따라가는 게 아니라 상대가 시키기 전에 미리 가 있어야 해. 때리는 걸 보고 때리자마자 가장 좋은 자세로, 먼저 다리를 받쳐 놓고 라켓을 휘두른다. 다리가 먼저다. 그러자 공은 보다 안정적인 자세에서 안정적으로 날아갔다. 어느 순간부터 하울은 나이스를 외치기 시작했다. 상구도 내 점수판을 넘기면서 나이스 플레이, 라고 응원해주기에 이르렀다. 


나는 백으로 날아오는 약한 커트 볼도 상회전이 가미된 쇼트로 받기 시작했다. 커트를 커트로 보내지 않기. 그것이 이번 세트에 임한 시도 중 하나. 커다란 명제였다. 작은 동작의 백드라이브. 어차피 이것도 공을 핥아서 올리는 거야. 때리면 안 돼. 아무리 세게 때려도 다 네트행일 뿐. 생각해서 쳐야 해. 라켓이 먼저 지나가고 공은 뒤이어 나아간다. 나는 긴 커트 볼을 배꼽 아래서 올려 보냈다. 저 밑에서 긴 혓바닥으로 핥아 올려서는 앞으로 굴려 상회전을 먹였다. 그러자 하울은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는 초반의 나처럼 어정쩡한 리시브로 미스를 했다. 내가 그랬듯 그도 홈런을 치기 시작했다. 입장이 바뀌었다. 쇼트도 그동안 약하게 보내던 것을 좀 더 강하게 밀어서 쳤다. 손목 스냅을 가미한 것이다. 공은 좌우로 휘어지며 나아갔다. 그러자 스코어는 거짓말처럼 역전되고,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기어이 3대 2로 내가 이긴 것이다. 역전승! 놀라웠다. 내가 이기다니. 그것도 하울에게. 고수에게 이기다가 지던 경험은 많지만 지다가 이기다니. 


그동안 숱한 세월 비굴한 눈빛이 스쳤다. 이런 기분은 뭐야? 나는 낯선 소리를 들었다. 상구가 자꾸만 와아, 와아 하고 소리쳤다. 하울은 머리를 긁적이며 심판석에 앉았고 이번엔 상구와 붙었다. 나는 보다 과감하게 잔발로 움직였다. 네트로 확 다가가 까꿍! 하고 상구를 놀라게 해 주었다. 그리고 저 멀리 물러나서 스매싱을 부드러운 드라이브로 받았다. 또 상구의 루프 드라이브에는 카운터 스매싱을 날려주었다. 그러자 이번엔 심판석의 하울이 와아, 와아 하고 소리쳤다. 감동하는 탄성. 그러자 우쭐해진 나의 백 쇼트는 상구의 몸 쪽과 화 쪽을 번갈아 공격했다. 말 그대로 쑤셨다. 상구는 중소기업 부장님이며 나랑 동갑이라고 했다. 나랑 같은 나이인데 벌써 부장님이라니. 나는 상구에게 공을 확 밀어 쑤시거나 확 감아 드라이브를 걸었다. 어느새 세트 스코어 3대 0으로 승리. 나는 얼굴이 벌게졌다. 완벽하다. 하울과 상구가 자꾸만 우와아, 우와아 대단하다, 라며 감탄했다. 9부에서 놀던 나. 9부에서 놀았으니. 


하울이 한 게임 더하자고 했다. 애당초 핸디는 없었다. 다시 붙은 하울과의 리턴매치. 두 번째 게임. 진검승부였다. 이번에도 나는 3대 2로 이겼다. 그리고 상구는 다시 3대 빵으로. 나는 감격의 주먹을 내밀었다. 지휘자와 부장님에게.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급히 핸드폰 메모장을 열었다. 메모해야 했다. 어떤 플레이가 통했는지. 내가 어떻게 대응했는지 기록해야 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치면, 말렸을 때 말릴 뿐이다. 뱀이 똬리 틀려고 기어 나올 때 나는 주머니에서 작대기를 꺼내야 한다. 작대기로 뱀에게 다가가 후려치거나 핥아주어야 한다. 그래야 뱀이 도망갈 것이다. 



아아, 이런 기분 오랜만이구나. 

짜릿하다. 마치 응원하던 손흥민이 결승골을 넣은 것처럼 마냥 흡족한 기분. 나는 승리에 도취되어 기분 좋게 탁구장을 벗어나기로 했다. 자칫 중간에 누구라도 게임을 청해 혹시라도 진다면 이 기분 어쩔 거야? 망치면 안 돼, 여지를 주면 안 돼. 눈이라도 마주쳐 게임을 청한다면? 나는 급히 탁구화를 갈아 신고 나와 후다닥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내려간다. 그제야 안심한다. 서방님들이 따라오려나? 아녀자보다 못한 그들을 지아비로 삼을 수는 없다. 내일부터는 더 세고 더 강한 7부에게 도전해야지, 하는 도발적인 생각. 나는야 나쁜 초보다. 설령 내일 하울과 상구를 다시 만나 지더라도 괜찮다. 첫 게임을 이겼으니까. 끊임없이 탐구하고 도전하고 부딪치면 3대 0이 3대 1이 되고 3대 2가 되어 마침내 오늘처럼 역전승하리라. 


가끔이라도 괜찮다. 좋아. 제법 괜찮은 쾌감. 묵은 갈증을 해소하는 시원함. 일주일 내내 깨지더라도. 한 번도 이기지 못하던 상대에게. 우러러보던 이를 마침내 이기면?


당당히 진짜 탁구 동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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