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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Sep 26. 2022

밖에서 탁구 좀 친다고 쳤는데

나는 초보가 아니에요




어떻게 그리 잘 치세요? 


진짜 선수 같아요~ 탁구 좀 가르쳐 주세~ 네네 줄을 서세요.

직장에서 나는 이른바 탁구 선수로 통한다. 점심시간은 보통 탁구 치는 시간이다. 후다닥 밥 먹고 휴게실로 뛰어간다. 문을 닫으면 나만의 시간. 상체를 푹 숙여서 엉덩이를 쭉 내민다. 뒤에 아무도 없지? 뚜두두둑 스트레칭을 한다. 허리와 팔 무릎과 발목까지. 그리고 개인 라켓을 가방에서 꺼낸다. 편백나무 비싼 라켓. 두둥실 내공이 느껴지는 까만 러버. 일반적이지 않은 용품. 여기서 일반적이란 탁구실에 흔히 비치된 라켓을 가리킨다. 러버와 목판 일체형. 그런 것들 중 아무거나 주워다 치는 행태. 즉흥적으로 가벼이 즐기는 탁구. 반면 그들의 눈에 띄게 전용 라켓을 가지고 다니면 어딘가 전문가의 아우라를 물씬 풍기게 된다. 직장 동료가 빈손으로 와서 아무 라켓이나 골라 테이블 앞에 설 때 나는 손에 익숙한 라켓을 가지고 상대한다. 부드럽고 정확하게 따닥따닥. 그러면 동료들은 내 맞은편에서 마치 오디션에 선 초보 가수처럼 와들와들 긴장한다. 나는 판정단이다. 판정단과 오디션 참가자의 차이는 뭘까? 실력 차이? 경력 차이? 앉은자리가 단지 다를 뿐? 그러나 서로의 입장 간극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다. 나는 싱긋 미소와 함께 여유롭게 리드한다. 리드하며 코치한다. 이 보세요, 뭐가 부족한지 아직 모르겠어요? 탁구 치는 스윙에 혼이 담기지 않았잖아요. 박자도 안 맞고.  


포핸드 롱 랠리를 하다가도 나는 재빨리 자세를 바꿔 쇼트를 댄다. 동료의 화 랠리를 순식간에 백으로 받는 것이다. 정확한 박자에 공을 넘기고, 그래 그렇지, 동료는 일정한 박자로 넘어오는 리듬에 감탄한다. 이윽고 진행되는 게임. 테이블에서 조금 떨어진 중진에 서서, 내가 치는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상대 테이블로 착착 넘어간다. 길게 길게 쭉쭉 뻗어서, 슝슝 날아가는 드라이브는 테이블에 닿자마자 채찍처럼 찰싹거린다. 소리도 경쾌하다. 타악 타악. 그래서 탁구의 이름이 탁구이던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공이 테이블에 닿자마자 더 낮게 더 빨리 튀는 상회전. 지켜보는 동료들이 박수를 친다. 우와 너무 잘하시네요. 공이 살아 움직여요. 폼이 멋져요. 완전 선수시네요. 이번엔 저랑 쳐요. 내가 먼저야. 무슨 소리야? 여기 줄 선거 안 보여? 여기도 줄이야. 동료들은 서로 먼저 치겠다고 아우성이다. 거기 두 줄로 섰네요. 그 줄 한 명 치고 그다음 이쪽 줄 한 명 치면 되겠네요. 나는 테이블 반대쪽에 우뚝 서서 줄곧 탁구를 친다. 줄 선 이들은 한게임씩, 나는 혼자서 열 몇 게임을 한다. 게임은 줄과 시간 관계상 1세트씩, 스코어는 대체로 11 대 2, 11대 1 정도다. 봐준답시고 살랑살랑 실수를 실수인 척 어이쿠야, 하면서 11대 5라도 되면 난리가 난다. 어머 어떡해, 탁구선수 님에게 5점이나 뽑았어. 미쳤어. 나 천재인가 봐. 꺄! 선수 님 당황한 거 봐. 아냐 저거 일부러 저러는 거야. 능구렁이잖아. 어쨌거나 탁구는 즐거운 운동이다. 왜냐고? 내가 제일 잘하니까. 여기서는 내가 왕이니까. 




새로 생긴 탁구장. 

시설이 휘황 찬란 번쩍번쩍 깨끗하고 산뜻하다. 퉁퉁한 마룻바닥. 테이블은 일렬종대로 열 개. 굉장한 규모. 테이블마다 탁구 치는 사람과 심판 보는 사람 그리고 지켜보는 이들이 정답게 어우러진다. 간혹 멋들어진 드라이브가 꼽히면 와우, 오우, 꺄아 함성소리가 뒤따르고, 지켜보자니 왠지 신난다. 나는 어느 정도일까? 저 정도는 나도 쉽게 할 수 있겠는데? 운동화를 갈아 신고 그들의 플레이를 지켜본다. 입구에서 깊숙이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고수의 영역이고 입구에서 가까운 여기가 초보들의 공간인 듯하다. 

나는 초보들을 보며 초보인 것처럼 뒤에 앉아 있는데 관장님이 부른다. 


"어디서 탁구 배운 적 있나요?"


"없습니다." 


"몇 부 쳐요?" 


"저는 부수를 모릅니다. 그냥 회사에서 취미로 조금 쳤어요." 


"그래요? 그럼 이 분과 한번 해보세요. 이문숙 씨. 여성 4부입니다." 


상대는 오십 대 초반 아주머니다. 파마머리. 통통한 체형. 딱 달라붙는 유니폼. 뭔가 언밸런스한데? 하면서 자꾸 쳐다보게 되는 사람. 눈빛이 반짝인다. 미인이지만 어딘가 람보를 닮았다는 느낌. 문숙 씨는 여자 람보. (이 글을 실제 우리 구장 문숙 씨가 본다면 나는 죽음) 아무튼 이제 막 유니폼의 맛에 빠진 거 같은 외모. 나만의 선입감인지 모르지만 꾸밈새가 화려해 보이니 어림잡아 실력은 반비례하지 않을까? 따라서 미루어 짐작컨대 초보일 가능성이 높다. 회사에서 탁구왕으로 불리는 내게 감히? 따끔한 맛을 보여주마, 하고 나는 마음먹었다. 여자 4부는 남자 7부와 동급이다. 여자 람보 문숙 씨는 탁구를 탁구장에서만 배운 것 같은 모범생으로 보인다. 우물 안 개구리겠지. 아무래도 관장님은 나를 낮잡아 보는 게 틀림없다, 고 생각했다. 직장에서는 탁구 왕, 탁구 선생님으로 불리는 나를 초보 테이블에 있던 사람과, 우람한 아주머니랑, 그것도 나보다 연로하신 분을? 이 보세요, 관장님! 괜찮겠어요? 아무래도 어리고 민첩한 상대만이 나의 움직임을 감당할진대. 

그동안 사파(레슨 한번 받지 않은)에서 얼마나 거친 탁구를 거쳐왔던가. 뿌리 없는 탁구. 알 수 없는 계통의 회전 볼. 거기서 살아남았다. 포커페이스. 오만한 나는 여전히 겸손한 얼굴로, 눈빛이 초롱초롱한 신입처럼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최대한 초보자의 눈으로 꾸벅 


"잘 부탁합니다" 


하고 인사한다. 문숙 씨는 그저 그렇다는 표정으로 인사받는다. 수많은 게임 중 하나일 뿐 뭘 그리 사람을 아래위로 훑어보냐, 하는 눈치다. 그래요 모르겠지요. 마침내 랠리가 시작된다. 겸손은 여기까지다. 나는 알려주리라, 실력을, 그리 생각하면서 랠리 공을 받는다. 치는데 어쩐지 박자가 빠르다. 내가 생각한 거보다 더 빠르다. 이건 생각하고 치는 게 아니라 생각보다 반박자 더 빠르게 날아오는 느낌이다. 뒤로 더 물러서서 쳐야 하는가 싶어서 한 발자국 물러서는데, 문숙 씨가 앞으로 와요, 라고 말한다. 나는 움찔 물러서지 못하고 랠리를 이어가는데 어쩐지 실수가 잦다. 생각보다 빨리 오니까. 공이 네트에 걸리거나 오버되거나 몸 쪽으로 가거나, 내가 랠리에 약하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씩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아 랠리 따위 어차피 탁구는 게임 아닌가? 게임만 잘하면 장땡인데 그래도 랠리가 잘 연결되지 않으니 마음이 불편해진다. 안 되겠다 싶어 속으로 스코어를 매겨본다. 비록 랠리지만 한번 실수할 때마다 누구 실수로 랠리가 끊어지나 세어본다. 이번엔 내가 친 볼이 아웃이구나. 일대 영. 어랏 또 네트행이네. 이대 영. 내가 친 공이 문숙 씨의 몸 쪽으로 가서 옆구리에 찰싹 맞는다. 뭐야 스윙이 늦어서 백 쪽으로 보내버렸네? 삼대 영. 백으로 간 볼을 주으며 문숙 아주머니는

 

"이거 게임하자는 뜻인가요?" 


라고 말한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나는 십일 대 몇까지 아주머니에게 졌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말한다. 


"저기, 게임할까요?" 


그러자 뒤에서 지켜보던 병수 형이 심판석에 앉는다. 병수 형이 속삭이는 목소리로 내게 파이팅을 외쳐준다. 문숙 씨와 나는 라켓을 탁구대에 올려두고 나란히 인사한다. 

 

"잘 부탁합니다." 


새 탁구장에서 새로 온 내가 처음 하는 게임. 

주위에서 하나둘 지켜보는 눈이 늘어난다. 떨린다. 가위 바위 보. 내가 졌다. 문숙 씨가 서브를 넣는다. 드디어 오는구나. 적당히 공 띄워 라켓 헤드를 45도로 내려서 휙~ 공은 반회전 반커트를 먹고 길게 날아온다. 백 쪽 탁구대 엔드라인 끝까지 빠르고 깊숙이 휘어져온다. 나는 선뜻 돌아서지 못하고 어정쩡 커트로 받는데 공이 탁구대 오른쪽으로 벗어나 허무하게 아웃. 뭐야? 이게 아닌데. 하하 웃음이 나온다. 이런 고수 수준의 서브를 넣을 줄 알다니? 각을 모르면 바깥으로 나가 버리는 서브다. 여긴 분명 초보들의 영역인데? 조금 전 랠리는 거짓이 아니었나? 혹시 초고수인가? 힐끗 관장님을 보니 내가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본다는 의중 같다. 나는 무릎을 구부려 한껏 자세를 낮춘다. 어쩌면 서브만 강할지 몰라. 리시브만 제발, 게임 랠리는 자신 있다. 다시금 그 서브가 날아온다. 생각하자. 나는 라켓 헤드를 몸 쪽으로 당겨 비스듬한 각도로 받는다. 횡회전은 물결 따라 치라고 했다. 물결을 막는 게 아니라 물결을 타는 방향으로! 다행히 공은 아웃되지 않고 가운데로 가는데 붕 떠올라서 넘어간다. 찬스 볼을 줬다. 커트를 너무 의식해서 라켓을 찍은 게 실수다. 문숙 씨는 기다렸다는 듯 번개처럼 타점을 잡아 후려친다. 확실한 3구 시스템 공격. 공이 저 멀리 굴러간다. 스매싱을 맞은 것도 아찔한데 나는 까마득히 안쪽으로 고수들 영역까지 굴러간 공을 달려가 줍는다. 참 멀리도 간다. 뭐 그리 세게 치나. 힘센 여자 문숙 씨. 헉헉 벌써 힘들다. 공만 몇 번 주웠는데 문득 땀이 차오르는 게 느껴진다. 긴장된다. 일단 1점이라도 따야 해. 지켜보는 눈들... 여기는 공연장이다. 리허설도 없이 나는 나도 모르게 오디션의 참가자가 되었다. 바들바들 떤다. 지켜보는 사람들 모두가 판정단이다. 그들은 흐뭇한 표정으로 편안하게 관전한다. 나는 서브를 넣으려다가 순간 심판을 보는 병수 형과 눈이 마주친다. 병수 형의 눈에서 뭔가 형언할 수 없는 동정이 스쳐간다. 머리가 아프다. 주위 시선이 의식된다. 어디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 지켜볼까 하는 시선. 


그래, 용기를 내자. 나는 초보가 아니다. 

이번엔 내가 서브 넣을 차례. 하회전을 넣는다고 넣는데 실은 너클볼이다. 나의 커트 동작을 보고 상대도 커트로 받으면 공은 그대로 두둥실 뜰 것이고 그러면 나도 찬스 볼을 무지막지한 스매싱으로 날려줄 계획인데... 문숙 씨는 그런 내 속도 모르고 냅다 짧은 동작 드라이브로 휘릭 받는다. 이른바 커트 치기다. 공은 찰싹 소리 내며 날아와 꽂힌다. 나는 대뜸 구경만 하고 움직이지도 못한다. 공이 멀리 굴러간다. 젠장 달려야 한다. 또 공을 주으러 달려간다. 달려가면서 생각한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대체 어떤 서브를 넣어야 돼? 머리를 쥐어짠다. 주으러 가고 궁리하고 그렇게 순식간에 11대 4. 스매싱을 맞을 때마다 뺨 맞은 것처럼 혼미하다. 정신이 없다. 같은 코스로 안 줘야지 하면서 당하고 또 당한다. 내가 딴 4점도 문숙 씨가 공격하다 생긴 실수일 뿐. 나는 가만히 서 있다가 거저 얻은 점수다. 문숙 씨가 스매싱을 날릴 때마다 통통한 몸매와 유니폼이 꿀렁거린다. 마치 람보가 M60을 연발하는 것 마냥 탄탄한 근육이 개머리판을 굳건하게 받친다. 


이것 봐라? 

이게 현실이란 말인가? 계산이 어긋난다. 장난 아니구나. 치욕적이다. 아아 인정할 수 없어. 용서할 수 없다. 내심 놀라서 진지해진다. 문숙 씨를 보면서 나는 그간 익힌 온갖 잡기를 떠올린다. 람보 같은 얼굴. 탁구는 멘털 게임. 멘털이 나가면 잡기고 뭐고 없다. 그녀의 땀방울이 빛나 보인다. 나는 그제야 말한다. 


"잘 배웠습니다." 


한 게임만 더, 라는 말이 입안에서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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