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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Sep 28. 2022

더 늦기 전에 전향해야죠

장비 마인 부우 석군




저쪽에서 그가 뛰어왔다. 

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황급히 열림 버튼을 눌렀다. 


"아, 안녕하세요."


나는 탁구장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뒤늦게 뛰어오던 그를 발견하고 공손히 인사했다. 인사하면서 속으로는, 친히 '만렙'님을 영접합니다, 하고 경건히 읊조렸다. 다정하게 무척이나 가까운 관계인 양, 하하 흐흐흐 헤헤헤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는 우리 탁구장의 초고수다. 무려 1부. 양면 펜홀더 전형. 그래서 여러모로 배울게 많을 거 같은 사람이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뭐 시키실 일이라도, 뭐라도 시켜주시면 제가 다 가져오겠습니다, 하는 비굴한 자세, 아니 꼬리를 만 자세, 아니 정중히 모시는 자세, 뭐 어쨌든 손바닥에 불이 나도록 비벼댔다. 헤헤 흐흐흐 영광입니다, 형님, 제발 뭐 좀 시켜주세요, 라고 꼭 말로 입밖에 내지는 않지만 눈빛이 그러하고 그러했다.


그의 이름은 장비. 

실제 삼국지의 장비처럼 덩치가 크고 거칠게 생겼다. 시커먼 얼굴, 안경은 금테 사각형, 그에 반해 말투는 사근사근하면서 얇은 하이톤이다. 내가 볼 때 조금 언밸런스하지만 비교적 높은음으로 깍듯하게 인사를 받고 인사를 건넨다. 그는 특유의 경쾌한 표정으로 해맑게 웃으며 


"네, 안녕하세요,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를 받아주었다. 펜홀더의 전설. 뒷면은 숏핌플. 중년의 남자. 나보다 최소 열 살은 많아 보여서 무턱대고 형님이라 불렀던 인물. 며칠 후 장비는 나를 아는 다른 이에게 내가 몇 살인지 물어보았다고 한다. 자기가 보기와는 달리 나이가 어리다고 했다. 나도 그를 아는 이에게 그가 몇 살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나보다 딱 두 살이 많다고 했다. 아연실색! 나는 처음 그의 나이를 듣고, 에엑? 거짓말 마, 라고 소리까지 쳤다. 아냐, 정말이래, 몸이 좀 아파서 그런 거라고 하더라, 라는 지인의 말을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나랑 고작 두 살 차이라니? 아무튼 다행히 형과 동생의 관계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동생으로써 한없이 우러러보고 싶은 존재인데 계속 우러러봐야지, 하면서도 조금 찜찜하지만 실력에 나이가 무슨 대수랴, 하고 생각을 고쳐 먹었다.


"영광입니다." 


나의 이 말에는 평소 당신을 존경합니다, 가 담겨있다. 당신처럼 되고 싶어요, 도 담겨있다. 아무쪼록 잘 좀 봐주세요, 라는 교태도 담뿍 있다. 늘 힐끔거리며 쳐다보던 존재.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황송하여 어쩔 줄 몰라하던 님. 그런 사람과 한 엘리베이터에 탄 거조차 영광스러운 마음 그지없어서 저절로 꾸벅 구십도 숙여 깍듯이 인사를 드렸다. 그 덕분인지 


"게임 한번 합시다"


라는 제의를 받아버렸다. 초보 영역인 출입구 앞 테이블에 뿌리내린 내게 손수 게임하자고 말하다니 아아 영광입니다. 얼마든지요. 귓가에 여엉광 영광 영광 여~엉광~이라는 찬송가가 메아리쳤다.


늘 고수들 영역, 맨 안쪽 1번 2번 테이블에서만 머무르는 하늘. 고수 중의 고수. 그간 흘낏흘낏 쳐다보기만 하고 실제 대화는 처음인 사람. 탁구에서 1부는 이른바 신이라 칭할 만큼 높은 위치다. G! O! D! 게임으로 치면 만렙! 나는 탁구를 접하며 부수를 알았고 10부부터 9부, 8부, 7부, 6부 착착 해당 부수를 상대하면서 1부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깨닫게 되었다. 유튜브에서 흔히 보던 1부와는 다르다. 보는 것과 실제 접하는 것은 이른바 천지차이. 얼핏 볼 때는 쉬워 보일지라도 막상 1부의 공을 받으면, 뭐지 이건? 공이 내 옆구리를 지나칠 때까지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못하는 신세계를 맛보게 된다. 마치 염력으로 내 몸을 조종하는 듯한 느낌도 든다. 내가 포핸드로 움직일 것을 미리 알고서 백핸드로 준다. 백핸드를 생각만 했는데도 반대쪽 포핸드로 준다. 내가 눈알만 굴려도 그 반대쪽으로 쓱 찔러버린다. 공이 회전을 더 먹는다든가, 빠르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상대의 움직임을 읽고서 플레이한다. 나처럼 아무 생각 없이, 헤헤 어떻게든 살려서 넘기면 그만이지, 가 아니다. 


떨렸다. 핸디 7점을 받고 게임을 시작했다. 핸디가 문제인가? 정말이지 1점도 내기 어려웠다. 그의 서브는 이쪽저쪽 구석을 날카롭게 찔렀다. 나는 넋이 나가 쳐다보기만 했다. 여보세요, 한없이 약한 병아리에게, 이리 어려운 서브를 주시다니요. 이건 혹시 필살기 서브가 아닌가요? 내게 1점도 주기 싫다는 건가요? 아니면 아무리 실력 차이나는 약자라도 승부에 최선을 다해 임한다는 뜻인가요? 아아, 왜 그래요? 그러지 마세요. 괜찮아요. 그러지 않아도 돼요. 잔인해요. 냉정해요. 1세트에서 나는 11대 7로 졌다. 이 말인즉슨 나는 1점도 내지 못했다는 거다. 퍼펙트. 정신없이 쫓아가고 리시브하고 공 주으러 뛰어가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게임은 끝나 세트 스코어 3대 1로 졌다. 게임 내용은 복기할 것도 없고 생각나지도 않았다. 얼핏 빗맞아서 득점이 난 거 몇 개뿐. 손가락만 얼얼했다.


"감사합니다. 게임해 주셔서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네. 다음에 또 합시다. 열심히 해요."


이렇듯 신과의 만남 직후 나는 나보다 한 수 아래 8부 먹잇감을 낚아채 서둘러 게임했다. 이윽고 3대 0으로 이기고서야 애써 멘털을 수습할 수 있었다. 탁구는 멘털 게임. 그래 나는 탁구 바보가 아니야. 구력만 해도 몇 년이다. 비록 똑딱이 탁구지만 가만, 정신 차리자, 정식 레슨 받은 것을 헤아려 보니 벌써 6개월 정도. 민볼 드라이브와 커트 드라이브 자세도 정립하고. 직장에서는 일등인데. 초보들에게는 왕인데. 정신 차려. 수습하자. 나는 초보지만 초보가 아니다. 회복하자. 자긍심을. 자존감을. 차분하게. 






한편 나는 여성 2부, 3부 핌플에게 약하다. 

한번 지고 또 지고 그다음부터 그들을 봐도 가까이 가지 않는다. 인사만 꾸벅하고 내내 모르쇠로 일관한다. 혹시나 다가와 게임하자고 할까 봐. 뽕은 무서워. 나는 초보들 8부 7부 남자와 5부 6부 여자만 좋아한다. 하위 부수지만 그들도 나름 저마다 깊숙한 내공을 연마하고서 여기 탁구장에 온 터. 탁구는 한 달을 쳐도 9부고 1년을 쳐도 9부다. 9부가 되기 위해서 수년간 탁구장을 들락거리기도 한다. 탁구는 감각 운동이다. 감각 없이는 발 들여놓을 수 없다. 처음엔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레슨만 받는 이들도 수두룩하다. 그들에게는 9부라는 이름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그런 초보들의 깊고 넓은 세계에서 따질 때...는 내가 최강이다. 레슨만 받은 이들에게도 앞서고 레슨 없이 사파 구력만 깊은 이들에게도 앞선다. 내겐 사파 구력과 레슨이 더해진 정파 내공이 있으니, 비록 레슨은 6개월이지만 사파 구력은 무려 십 년... 오래됐구나. 차츰 회복되는 소리가 들린다. 스으으윽, 하고 바람 빠진 풍선에 바람이 들어찬다. 자존감은 탁구 생활에 있어서 필수가 아닐까? 내 서브를 믿지 못하고 내 드라이브를 믿지 못하면 그 어떤 스윙도 자신 있게 휘두르지 못할 테다. 


내 시각에서는, 우리 구장에서 레슨만 받고 겨우 8부 7부가 된 초보들의 패턴이라는 게 죄다 똑같아 보인다. 백 쪽 깊은 서브를 날리고 3구 때 화 쪽으로 냅다 때리는 시스템. 나는 2구 리시브를 그들의 화 쪽 깊숙한 곳으로 찌르거나, 아주 짧은 커트로 받아서 때리지 못하게 한다. 거기서부터 꼬이면 으레 이기기 마련이다. 간혹 이제 막 7부에 진입한 7부 신입들도 내게 지거나 이기거나 컨디션에 따라 비슷하거나 한다. 커트 볼이 오면 커트만 하다가 어느새 커트 드라이브만 시도하고 보는 패턴. 나는 FM 플레이로만 치는 이에게 강하고 AM이 뒤섞인 이에게는 약하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레슨만 받은 FM들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펜홀더의 위기, 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꿈틀거리는데.


.

.

.



뭣도 모르고 초보들의 영역에서 으스대던 어느 날, 

평소보다 좀 일찍 탁구장에 갔는데 초보가 아무도 없었다. 입구 근처 초보 전용 탁구대들이 텅텅 비었다. 초보가 없다 초보가... 어떡하지? 누구랑 어울리지? 가만 살펴보니 중간 4번 5번 테이블에 중수만 몇몇 보이는데... 그중 뚱보 아주머니 2부가 게슴츠레 내쪽을 응시하다가 다가온다. 여자 2부는 남자 5부다. 제법 덩치가 큰 뚱보 아주머니. 자세히 보면 드래곤볼에 나오는 '마인 부우'를 닮았다. 외모는 불룩불룩 심술궂게 생겼는데 의외로 실력이 강력한 스타일. 탁구장 구력만 십 년. 그것도 전부 레슨과 실전을 고루 쌓은 노른자 기간. 설마 하는데 역시 


"게임 한번 해요"


라는 게 아닌가. 아아 피할 데가 없다. 비교적 성격이 급한 고수. 마주 서자 마자 다짜고짜


"랠리가 뭔 필요 있어?"


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언뜻 뒷면에 롱핌플이 보였다. 뚱보 아주머니는 


"게임하면서 몸 푸는 거지. 랠리는 조금만 해요"


라고 말했다. 가위바위보를 하자고 했다. 그러면서 


"핸디 몇 점 줄까요?" 


라고 말하네? 완전히 날 무시하는 말투. 처음 게임하는 사인데? 우린 아직 서로의 손맛을 모른다. 때마침 남자 7부 석군 아저씨가 심판석에 앉는다. 


"일단 2점 줘보죠"


라고 석군 아저씨가 말했다. 뭣이 2점이라고? 석군 아저씨는 평소 중수 테이블에서 6부, 5부와 어울린다. 가끔 초보 테이블(7부~9부)을 관심 있게 지켜보는데, 초보들을 평정하는 나를 오랫동안 지켜봤다고 한다. 석군 아저씨는 구력만 대략 이십 년째 7부다. 웬만한 드라이브는 다할 줄 안다. 다만 몸이 느릴 뿐이다. 아닌 게 아니라 나 역시 석군 아저씨를 견제해 온 터. 누가 7부 최강인지 겨뤄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다소 부담스럽기도 하다. 나는 뚱보 아주머니를 보면서 


"1점 더 주세요"


라고 굴욕적으로 말했다. 생각과 다른 이 비굴함은 뭔가? 결국 핸디 3점을 받고 게임을 시작했다. 마인 부우 아주머니는 비정한 서브로 나를 괴롭혔다. 펜홀더인 내게 백 쪽 모서리를 넘어 네트 사이 옆면으로 서브를 날렸다. 안 그래도 백이 약한데 급기야 백사이드로 주다니. 나는 생각했다. 냉정하구나. 고수들은 다 저런가. 배만 나온 게 아니라 연배도 있으신 분이 철저히 약자를 짓밟는, 조금 봐주거나 맞춰주거나가 없다. 오랜만에 게임하는 사이는 오랜만의 게임이 중요한 잣대가 된다. 저 사람? 저 사람 나한테 졌어, 저번에 한번 했는데 내가 이겼어. 이런 공식이 성립되곤 한다. 그렇기에 봐주고 말고 가 없다. 게임에 들어가서는 인정사정이 없다. 나는 말하고 싶었다. 있잖아요. 나는요. 나보다 초보들인 이들과 게임할 때 서브만큼은 쉽게 준다고요. 그리고 그렇게 냅다 후려갈기지도 않아요. 아야! 눈에 맞았잖아요. 너무 세게 치시는 거 아니에요? 와 벌써 10대 4야. 나는 나보다 초보들과는 10대 8 정도로 스코어를 비슷하게 끌고 가는데... 내가 잘하는 걸 걸어보도록 기회라도 주시지. 


아아, 마인 부우 뚱보 아주머니는 내게 1점도 주지 않으려 한다. 필살기가 사방에서 날아온다. 날카로운 백드라이브. 강력한 백푸시. 옆 회전 많이 먹은 서브. 언제나 안정적인 스윙이 가능하게끔 움직이는 스텝. 상회전 잔뜩 먹은 커트 드라이브. 그리고 이따금씩 짧은 커트 볼 랠리에서도 절대 실수하지 않는 안정감. 가슴에서 쭉 일직선 아래로 내려오는 커트. 결코 네트에 걸릴 것 같지 않은 높이. 


이것은 이를테면 세상 만물의 진리와 같다. 맥주를 마시면 배가 부르다. 배가 부르면 뱃살이 나온다. 뱃살이 나오면 기분이 나쁘다. 기분이 나쁘면 맥주를 마신다. 다시 배가 부르다. 배가 부르면 바로 당신, 마인 부우 뚱보 아주머니다. 라켓을 갖다 대면 공이 네트를 넘는다. 네트를 넘어 내가 휘두르면 삑사리가 난다. 삑사리가 나면 점수를 준다. 점수를 주면 진다. 나는 뚱보 아주머니에게 진다. 그것은 세상사 진리. 탁구장에서 마인 부우 뚱보 아주머니에게 지는 나. 이제 고작 한게임 했을 뿐인데 옆에서 석군 아저씨가 비웃는다.


나는 레슨에서 배우지 않은 반대 회전 등등, 이리저리 다양한 스킬을 시도하다 장렬히 쓰러졌다. 뚱보 아주머니에게 한 시간을 잡혀서 그동안의 구력을 무참히 짓밟혔다. 음료수를 바치니 고마운 덕담을 해주신다.


"레슨을 받아야지요."


"레슨 받고 있는데요?"


"그래요? 레슨 받는데 왜 그래?"


옆에서 듣던 석군 아저씨가 피식~웃는다. 뚱보 아주머니는 내게 


"탁구 오래 치려면 셰이크로 바꾸세요"


라고 말한다.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바꿔야 해요"


라고 덧붙인다.


"백이 안되잖아. 백이"


라면서 결정타를 날린다.


"저기, 장비 씨처럼 칠 자신 없으면 당장 셰이크로 바꿔요."


저기 안쪽 고수들이 탁구 치는 테이블에서, 


"꺄아악~~~!"


하고 하이톤으로 샤우팅 하는 소리가 들린다. 장비 형이다. 1부 펜홀더. 그래서 늘 핸디를 7, 8점씩 주고 게임을 시작한다. 그러다 보니 네트나 엣찌, 라켓 모서리에 맞거나 손가락에 맞거나, 얼떨결에 나오는 점수에 승패가 갈리곤 한다. 그럴 때마다 탁구장 전체를 뒤흔드는 괴성. 노래로 치면 최소한 소찬휘의 tears 음정. 근처에 소방관이 들었다면 최소한 위급 상황. 또 누군가가 장비 형을 엣찌로 이겼나 보네, 하는 것을 알게 해주는 소리. 거친 외모와는 달리 너무나 솔직한 비명. 꺄아악! 오늘도 우리 탁구장은 장비 형의 굉음에 활력을 충전한다.  


나는 바꾸지 않으면 시대에 뒤처질 것 같아서. 저분도 바꿨고 이분도 바꿨다는 말에. 그리고 심판 보던 석군 아저씨에게도 연속으로 3대 0으로 깨지고서. 어떻게 이럴 수가. 평소 플레이를 옆에서 볼 때는 해볼 만하다 생각한 아저씨인데. 나는 쓰러졌다. 그래 바꾸자. 펜홀더를 버리자. 참을 수 없다. 셰이크로 살아남자, 고 결심했다. 참담했다. 그동안 길고 길었던 펜홀더의 자존감은 다 어디로 갔나? 누군가가 또 덕담을 건넸다. 


"셰이크로 지금 실력에 올라오려면 최소 1년은 걸릴 거야." 


그 말을 듣고 나는 참자, 참을 수 있다, 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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