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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Sep 27. 2022

어느 저녁 탁구장 무리들

실력별 헤쳐 모인다




내 갈 곳은 어디인가?


탁구장 입구에 들어서면 기다랗게 일렬로 여덟 개의 테이블이 있다. 어느 테이블로 가야 하나? 아무 테이블이든 아무렇게나 모여들까? 아니다. 다들 구분해서 모인다. 사람들은 아무 데나 가지 않는다. 가만히 살펴보고는 아하 저기로구나 하고 간다. 까딱 엉뚱한데 함부로 갔다가는 그야말로 개박살, 개망신, 피바다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핸디 9점을 받고서 1점도 못내 내리 3세트를 깨질 수 있다. 그동안 쌓아왔던 당신의 공력이 산산이 부서진다. 상상이 되는가? 그러면 멘털 가출, 그간 친 건 탁구인가 탁자인가, 웃음거리, 어쩌면 탁구 포기로 갈 수도 있다.


"왜 초보들이 여기서 쳐?"


"에이, 쯧쯧, 저 쪽에 초보 자리로 가지?"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내가 원해서 간 게 아닌데 뒤에서 얼굴 없는 고수가 말했다. 누굴까? 고수의 이름은 악인. 악어를 닮은 그는 3부 실력자다. 이름도 하필 악인이 뭐람? 그의 말은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아직도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무례한 악인.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잘도 살아왔구나. 지가 3부면 단가? 나중에 듣자니 악인에게서 그 말을 들은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남자 8부 진혁 형이 말하길, 자신도 안쪽 테이블에서 탁구 치는데 그 말을 듣고 정말 너무너무 화가 났다고 했다. 성질 같아서는 바로 쏘아주고 싶었는데, 그때 막상 쏘아주지는 못했다고 했다. 한 번만 더 그런 말을 하면 쏠 거라고 하는데, 아서라 그냥 안쪽에 가지 말자고 우리는 다짐했다. 더러워서 피하는 거라고 와하하 웃으면서도 씁쓸했다. 젠장 더러워서 실력을 키워야지, 라는 말도 나눴다.  


아무튼 탁구대를 잘 보고 가야 한다. 행여 저 안쪽에서 반갑게 부른다고 대뜸 갔다가는 큰일 날 수가 있다. 우와 착한 고수님이 부르시네. 라라라 신난다. 친히 가르침을 주시려나? 왔으니 게임이나 한번 하고 가라고 하면? 소리 없이 개망신이 오는 것이다. 어떻게 1점도 못 내냐? 네가 사람이냐? 이런 수준이면서 탁구복 입고 탁구화 신고 탁구 치러 왔니? 어쭈? 머리띠도 했네? 하다못해 손으로 쳐도 1점은 내겠다. 이게 네 위치이고 이것이 왕의 위엄이로다. 악한 고수들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가르쳐준다. 확인해준다. 위에서 내려다본다. 자칫 악인 같은 고수와 맞닥뜨릴 수도 있다. 피해야 한다. 조심해야 한다. 수준이 어느 정도는 비슷해야 게임이 된다. 게임이 되어야 다시금 도전할 수 있다. 실력을 쌓고 나서 놀러 가야 한다. 저 안쪽 깊숙한 땅은 함부로 갈 데가 못된다. 에비~ 가지 마. 우리가 놀 곳은 여기 출입구 근처에서 찾아야 해.


그러면 어디 한번 살펴보자. 내 갈 곳은 어디인가? 눈 씻고 잘 봐야 한다. 일단 입구에서 가까운 곳 3개 테이블은 대체로 초보들의 영역. 중간에 3개 테이블은 중수들의 영역. 맨 안쪽 깊숙이 자리한 테이블 2개는 고수들의 영역이다. 


어느 평일 저녁. 나는 입구 근처, 초보 영역에서 무심코 땀 닦다가 고개 들어 보았다. 문득 탁구장 정경을 보다가 놀랐는데 처음엔 탁구장에 탁구 치는 사람들이 참 많구나 하고 놀랐다. 저녁을 먹고 어디 다른 데 가지 못한 이들이 여기에 다 모였구나. 탁구대 하나에 탁구 치는 이들과 심판 보는 사람 응원하는 사람까지 못해도 스무 명 이상이 옹기종기 모여서 잠시간 코로나가 조용할 때 나라의 중추인 삼사오십 대들 아빠와 엄마 삼촌과 이모는 땀과 기합과 열정을 내뿜었다.

 

저마다 멋들어진 탁구복을 입고서 헤어밴드를 차고 화장을 하고 땀 흘리고 벌게져서는 고함지른다. 아자아! 끼얏호! 빠샤! 컴오온! 파이팅! 갖가지 굉음, 여기는 어디인가? 그러다 두 번째 놀라는데 초보 중수 고수들이 제각기 헤쳐 모인 형태, 규칙적인 분류, 끼리끼리 노는 모양새다.

 

고수 자리에는 남자 1부부터 5부까지, 여자는 2부와 3부, 뒷면에 롱핌플, 득점이 스매싱 드라이브로만 나는 곳. 그리고 중간 중수들의 영역이란, 남자 6부와 7부 상, 여자 4부와 5부 상. 그나마 랠리 중에 득점이 난다. 이어서 마지막 초보들의 공간. 남자 7부 중하와 8부 9부 10부까지, 여자는 5부 중하와 6부까지다. 득점은 보통 서브로 난다. 세트가 빨리 끝나서 인사차 몇 부입니까 물어도 부수가 없다고 대답하는 사람들. 이름도 모른다. 그들은 아름다운 나의 동료며 양식이다. 


그러면 부수가 실력을 온전히 대변하는가? 지금은 글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여 공식 시합은 취소 연기 잠정 미정, 따라서 실력은 벌써 5부급인데 여태 7부인 이들이 수두룩하다. 우리 지역의 경우 일반적으로 여자와 남자는 3부의 차이가 난다. 이를테면 여자 6부가 남자 9부다. 여자 5부가 남자 8부고 여자 4부가 남자 7부와 동급이다. 즉 여자는 1부부터 6부까지 있고 남자는 1부부터 7부까지 있다. 초보는 모두 10부. 이들을 모두 일직선 상에 놓고 리그전이라도 벌인다면 여자 5부를 여자 5부라 하지 않고 그냥 8부라고 통칭하기도 한다. 아무튼 나는 공식 시합에 나가지 않은 상태, 아직 초보라 공식적으로 남자 7부에 속한다. 그러나 일부는 대충 눈대중으로 안다. 내가 7부라고 말하면, 에이 장난치지 말아요, 라는 말을 듣는다. 누구에게서? 여기 초보들에게만 그리 대접받는다. 아아 고마운 동료며 양식들에게 핸디를 주기도 한다. 기분 좋아요. 우린 서로의 맛있는 양식이 된다. 냠냠 쩝쩝 나는 구장에서 때때로 남자 7부가 되기도 하고 8부, 9부가 되기도 한다. 


주로 남자에게 강하고 여자에게 약하다. 

일상에서는 남자를 기피하고 여자를 좋아하지만 탁구 게임에서는 남자에게만 강하다. 그래서 탁구 칠 때는 이상하게도 남자가 좋다. 그러면 왜 남자에게 강한가? 남자는 대개 직선 타입이 많다. 힘으로 치는 탁구. 사나이는 드라이브지. 채찍처럼 날아가 찰싹 꽂히는 타구. 휭휭 휘어지는 공. 어정쩡하게 받으면 홈런이 되어버리는 구질. 탁구에서 홈런은 홈런이 아니고 찬스 볼로 불리기도 한다. 강력한 드라이브는 남자의 로망. 그래서 한결 단순하다. 단순한 스타일에게는 조금만 변화를 주어도 효과가 있다. 이런 건 지금껏 치던 탁구가 아닌데, 하면서 초보들은 당황한다. 잘하던 드라이브를 먹이면 그만인데 드라이브를 먹일만한 공이 아닌 것 같다는 착각. 헷갈리게 유도하는 반회전은 테이블에 맞으면 공이 옆으로 휜다. 심지어 스윙하는 각도를 벗어나버려 라켓이 헛돈다. 그것을 보는 쾌감~ 나는 이른바 사파 탁구의 왕이다. 옆 회전, 반회전, 측면회전 기발한 변칙 타법으로 살아남았다. 내공이 부족하지만 사파 구력은 깊다. 회전 없는 공으로 상대에게 상회전이 잔뜩 먹은 것처럼 혼동을 준다. 자신도 모르게 넘어뜨리는 기술처럼 어쩌면 가면 쓰고 요사스러운 간계를 부리는 마녀일지도 모른다. 결계를 치고 지켜본다. 나는 남잔데 왜 마녀라고 지칭하는가? 바로 그 점 때문에 나는 여자 탁구에 약하다. 남자라면 아리따운 마녀를 좋아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자는 마녀를 용서하지 않는다. 내 남자를 후린 마녀 주제에 테이블 앞에 딱 붙어서 치는 탁구. 요망한 기술을 쓰기도 전에 차단하는 타법. 공이 변화를 일으키기 전에 강타하는 스윙에 나는 약하다. 그것도 코너웍이 담겨 뭐라 말하기도 전에 뺨을 때려 버린다. 내리꽂는 어택. 이른바 정파에 약한 탁구. 그것이 바로 나. 어떤 날에는 7부 누구에게는 9부가 되는 이유다. 기초 없는 건물. 근본 없는 스윙. 늘 불안에 떠는 실력. 탁구는 상대적이라 내가 이긴 상대가 날 이긴 상대에게 우세가 되기도 한다. 물고 뜯기고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되는데 이러한 변수가 탁구의 재미 아닐까 싶다. 


결국 정파 기운을 습득하기 위해 레슨을 시작하였다. 더 이상 뺨 맞기는 싫어서다. 라켓 쥐는 그립부터 바꾸는 과정, 힘을 빼 미리 가서 타격하고 몸 전체를 이용한다. 스무드하게 백스윙하고 올라갈 때만 움켜쥔다. 커트 공을 주고 3구를 노리는 시스템. 나는 탁구장 입구에서 8탁 7탁 테이블을 오가다가 6탁 테이블로 진입했지만 만...


언젠가 5번째 4번째 3번째... 꿈의 2번째로 진입하기 위하여 내공을 쌓는다.

.

.

.

레슨 받은 지 수개월. 

대회도 나가보고 많은 것을 배웠다. 나는 어엿한 7부가 되었다. 며칠 전 3부 악인이 2번째 테이블, 고수의 영역으로 나를 불렀다. 그는 사람을 부를 때 절대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단지

"어이!" 하고 부른다.

그러면서 손가락을 까딱까딱한다. 이쪽으로 오라는 신호다. 일단 시작부터 기분 나쁘다. 수개월 동안 나는 한 번도 그와 게임하지 않았다. 무려 3부. 너무 차이가 나서 배울 게 없다는 것도 있었지만 초보들을 무시하는 기분 나쁜 제스처가 싫었기 때문이다.


7부 명구 형이 잽싸게 심판석에 앉았다. 명구 형은 악인의 단짝이다. 이제 피할 수 없는 타이밍. 드디어 핸디 5개를 받고 게임을 시작했다. 

5대 0. 

핸디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핸디가 좁혀지는 그 부담을 아는가? 부담을 이겨내기 위해서 나는 악인의 얼굴이 아니라 공만 쳐다보았다. 집중하자. 공만 보자. 결과부터 말하면 악인은 내 서브를 어려워했다. 얼씨구나 하고 나는 연신 그 서브를 넣었다. 임팩트를 최대한 짧고 강하게 주는 긴 서브. 마치 공을 도끼날로 찍는 듯한 스윙. 물론 이것도 익숙해지면 7부들도 다 받아내는 수준인데, 웬걸 웬 떡이냐, 개중에 감사하게도 3부 악인이 못 받는구나,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고 나는 도끼질을 멈추지 않았다. 탁구장 저 안쪽에서 오래도록 살았던 커다란 나무. 큼직한 나무가 패이는 소리. 쩌어억. 


"서브가 뭐 이래?"


악인의 그 말에도 아랑곳 않고 나는 찍고 찍고 또 찍었다. 어렵사리 그가 리시브를 띄우면 냅다 스매싱을 날렸다. 시야는 포핸드로 보면서 스윙은 백핸드로 날리는 센스도 곁들이면서. 악인은 극단적인 수비형이다. 내가 백스윙 자세를 취할 때면 그는 이미 저 멀리 물러서서 수비 준비를 한다. 어지간한 볼은 다 받아낸다. 3부의 수비력이란 정말이지 노련하고 민첩하다. 징그러울 정도로 잘 받아내는 수비에 오히려 당황해서 공격 범실을 하기 마련. 내 등 뒤 유리문 안쪽 휴게실에서 동료들 7부와 8부 사람들이 지켜본다. 8부 진혁 형은 내가 스매싱을 꽂을 때마다 환호성을 지른다. 


"나이스! 이겨라!"


초보와 고수의 게임에서는 보통 초보를 응원하지 않나? 수많은 초보들이 초보의 게임을 지켜본다. 지켜보며 파이팅을 외친다. 파이팅이 휴게실 유리문을 넘어와 내 어깨를 가볍게 한다. 어깨에 실로 풍선을 매단다. 제각기 달린 수많은 풍선들. 풍선이 두둥실 떠오르며 어깨에 힘을 빼준다. 한결 가볍구나. 가벼워. 그냥 휘두르기만 하면 된다.   

그들의 응원에 신이 나 공이 깨져라 내리꽂았고 악인의 옆구리를 찍어댔다. 드디어 심술궂은 고목이 기우뚱, 흔들리기 시작한다. 세트 스코어 3대 0. 악인의 안경 속 작은 눈동자가 당황하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나무 위 마른 이파리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는 음료수 내기, 라면서 한번 더 하자고 했고 또다시 3대 0으로 깨졌다. 풍선 달린 어깨가 가볍게 스윙하고 때린다. 넘어간다, 넘어간다, 소리와 함께 고약한 나무는 마침내 풀썩 쓰러졌다. 쓰러진 그루터기에서 밀키스가 불쑥 솟아난다. 나는 밀키스를 마시며 진혁 형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영웅 주윤발의 탄생. 그날 휴게실에서 모인 7부, 8부 초보들 속에서 나는 크게 외쳤다.    


싸랑해요~밀키스! 캬아!


탁구장에서는 가끔 그런 날도 있다. 




평소 악인은 저녁 늦게 오는 편이다. 그는 들어오면서 입구 쪽 초보들이 인사를 해도 통 받아주지 않았다. 내가 큰 소리로 안녕하세요, 외쳐도 고개 한번 끄덕거리질 않았다. 그래서 나도 어느 시점부터는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던 악인이 어느 날, 코앞에서 마주쳐 무심코 건넨 인사에, 인사를 받아주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라고 말하니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어이 그래, 일찍 왔네" 


하고 조용히 중얼거리는 말투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알고 보니 그는 단순히 목소리가 작은 거였을지도. 어쩌면 리액션이 소심한 거였을지도. 그러고 보니 아는 척을 해도 소리 내는 법이 없었다. 가까이 있을 때만 소곤소곤 말하던 모습. 그리고 누군가가 덧붙였다. 

그는 극단적인 수비형이라 저 안쪽 넓은 공간의 테이블에서만 게임을 할 수밖에 없다고. 입구 쪽이나 중간 테이블에서는 뒷공간이 좁아서 온전한 실력 발휘를 할 수 없다고.


PS. 내가 탁구장에 등록하고 1년 여가 지난날 그는 타 탁구장으로 옮겨갔다. 지금은 지역대회에서 가끔 마주치곤 한다. 곁을 지나칠 때마다 인사해야지 생각하고는 하는데, 아직은 멀리서 지켜보기만 한다. 


다만 맨 안쪽 초보들이 눈치 보던 테이블에서 맘껏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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