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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Oct 06. 2022

탁구장에 들어가는 마음

병수 혜리





"어! 왔냐? 잘 됐다. 이리 와라!" 


병수 형이 내가 들어오는 걸 보고는 곧장 부른다. 아니 불러준다. 탁구장에 들어가면서 보니 혜리 씨와 병수 형이 탁구 치고 있다. 먼저 눈 마주친 사람은 혜리 씨고 나중에 본 이는 병수 형이다. 둘 모두 내가 지극히 동급(실력)이 되길 원하는 상대. 절대 우위가 아니라 그저 핸디 없이 이기거나 지거나 하는 관계. 그날 컨디션에 따라 승패가 오가는 포지션. 그런 팽팽한 긴장감을 부르는 상대가 되고 싶은 이들이다. 

병수 형은 안경을 꼈다. 늘 장난기 어린 눈으로 본다. 


"어! 탁구화 샀네? 얼마 줬어? 한 부수 올라가겠네"


라고 말한다. 예의 재미난 입담을 가진 사람. 늘 농담을 건네고 농담을 받아준다. 내가 처음 탁구장에 왔을 때 일주일 정도는 내가 이겼었다. 딱 서로에 대한 적응기에만 그랬다.


"어이! 이 시키! 왜케 잘해? 다시 붙어! 한 게임 더해! 집에 가지 마." 


기초실력이 탄탄한 병수 형의 스윙은 날마다 날카롭게 나의 백핸드, 포핸드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2년간 관장님에게 레슨 받으며 매일같이 쌓았을 그의 구력. 형이 때린 탁구공이 테이블에 닿자마자 맹렬히 상회전하는데 점점 버거워졌고 마치 관장님의 드라이브를 직접 받는 거 같은 느낌. 나는 뒤에서 지켜보는 관장님의 눈빛에 움츠러들고는 했다. 레슨 받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 나는 병수 형의 상회전을 버티다 끝내 버티지 못했다. 첫 일주일만 엎치락뒤치락하다 병수 형과 게임만 하면 3대 1로 졌다. 그에게 있어 나는 한수 아래 하수가 된 것이다. 갖은 잡기를 부렸지만 결국 바닥이 드러났다. 탁구는 비슷한 상대와 해야 재미가 있다. 비슷한 상대는 맞수다. 맞수는 매일 만나고 싶다. 그러나 상수와 하수가 되면 가끔 만날 뿐이다. 병수 형은 언제부턴가 탁구장에 들어와도 내가 치는 테이블을 지나쳐 중수들 테이블에 가서 놀았다. 어? 날 보고도 지나치네? 병수 형은 나보다 상수들이 치는 테이블에서 상수들과 어울렸다. 그들과 실력이 엇비슷한 동급이니 내가 뭐라 할 입장도 아니고 다만 아주 약간 섭섭하고 서운할 따름인데. 그럼 무엇에 섭섭하고 서운한 것일까. 


형! 왜 나를 무시해요? 니가 못하니까 무시하지. 매번 같은 결과가 나오는데 재미가 있겠니? 형!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말을. 너무해. 나는 왜 병수 형을 이기지 못할까. 나는 왜 병수 형을 긴장시키지 못할까. 나는 왜 병수 형을 재밌게 해주는 상대가 못될까. 맞수가 되고 싶은데.


온전히 나 자신에게, 실력이 미천한 나의 현 위치에 서운했다. 왜 병수 형이 성장할 동안 동반 성장하지 못했나 하는 자괴감. 중수들의 테이블에 자신 있게 서 보고 싶다는 바람 때문에. 당당히 음료수 내기를 걸고 게임하고 싶다는 바람, 아쉬움 때문이리라. 긴장시키고 싶다. 재밌게 해주고 싶다. 올라서고 싶다. 


나는 병수 형과 혜리 씨가 랠리 하는 테이블에 이끌려 갔다. 원래는 혼자 탁구로봇이랑 몸을 풀어야 하지만, 모처럼 병수 형이 이리 와, 라고 말해주었기에 다소 부담되지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심판석에 앉았다. 병수 형과 혜리 씨. 둘은 공통점이 많다. 우선 탁구장에 매일 출석한다. 레슨을 열심히 받는다. 그리고 붙임성이 좋다. 성격도 좋다. 둘은 실력 상승 열심형이다. 달리 말해 고수 지향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맞붙길 주저하지 않는다. 항상 새 공을 준비하여 저 안쪽 고수 테이블로 찾아가 한판 붙기를 청한다. 한 게임합시다! 저랑 한 게임해 주세요. 이렇게 말하면서 고수의 심판석에 잘도 털썩 앉는다. 그러곤 심판을 본다. 심판을 보고 고수와 게임을 한다. 지더라도 한게임 더! 를 외치며 이렇게 저렇게 갖가지 시도를 해본다. 왜 안되지? 왜 안될까? 이렇게 해보자! 어라? 된다! 한게임 더 해주세요! 한판 더! 이렇게 그들은 날마다 실력이 상승한다. 내게는 그런 게 없다.


둘이서 치는 탁구대 심판석에 앉으면 이른바 3파전이 형성된다. 보통 이긴 사람이 계속 치고, 지면 심판석에 앉는다. 이긴 이가 연속하여 이기더라도 두 판 뒤에는 심판석에 앉는다. 이렇게 세 명이서 게임하고 승부하는 정경이 자연스러운 곳. 여기 생활 체육 탁구장의 흔한 풍경이다. 3파전은 생활 체육 대회의 예선전 형태이기도 하다. 


병수 형과 혜리 씨는 맞수다. 맞수라 서로 핸디를 주지 않는다. 병수 형은 드라이브를 잘 걸고 혜리 씨는 잡아서 끊어치는 스매싱과 커트를 잘한다. 혜리 씨는 짧은 커트보다는 긴 커트에 보다 더 많은 회전을 주는 스타일이다. 때문에 원 바운드성 긴 커트지만 쉬 돌아서지 못한다. 돌아서서 드라이브를 걸어도 자주 네트에 처박히곤 해서 어정쩡 돌아설까 말까 하면서 계속 커트 랠리만 주고받기 일쑤다. 그럼에도 고집 센 병수 형은 줄기차게 돌아서서 루프 드라이브를 걸어 올린다. 더러 힘이 부족하여 네트를 맞고 넘어가기도 하지만 일단 넘어가기만 하면 혜리 씨의 실수를 유발할 확률이 높기에 그렇게 시도하고 스코어를 딴다. 그에 반해 혜리 씨는 커트 치기 스매싱을 곧잘 사용한다. 상대의 커트를 정점에서 타점을 높게 잡고 친다. 그것은 큰 백스윙을 요하는 것도 아닌 간결한 여성들 전용 스매싱이다. 따악! 소리가 나는 경쾌한 스윙. 무척 빨라서 코스를 예상하지 못하면 멍하니 쳐다보다가 저 멀리 공 주으러 가야 한다. 때때로 배꼽 언저리에 찰싹! 하고 꽂히기도 한다. 아프지는 않은데 뭔가 기분이 아프다. 

스매싱과 드라이브의 대결. 어쩌면 확률의 게임이다. 드라이브는 언제든 날릴 수 있지만 스매싱은 그렇지 않다. 득점으로 직결되는 확률은 스매싱이 높지만 드라이브는 시도되는 양이 압도적이다. 그리고 오늘 병수 형의 드라이브가 제법 부드럽게 걸린다. 부드럽게 넘어와서 혜리 씨를 괴롭힌다. 드라이브를 받는 라켓 각을 조금만 들어도 아웃되고 미스가 난다. 둘은 막상막하의 실력으로 부딪치다가 결국 병수 형이 이겼다. 혜리 씨가 물 마시러 간 틈에 나랑 병수 형이 몸풀기 랠리를 한다. 병수 형은 자못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스윙을 크게 휘두르며


"아가야, 관대한 내가 한번 놀아줄게" 


라면서 나를 아예 하수라고 지정하고 싸잡아서 때리는 스윙, 대충 세게 날리는 볼로 일관한다. 오랜 시간, 애당초 내가 우세였던 첫 일주일을 아직 잊지 못하고 과거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지금은 중진에 물러서서 받아야 할 정도로 그의 볼이 버겁다. 나는 어찌어찌 받아서 겨우 넘기는 랠리를 통해 몸을 푼다. 이윽고 혜리 씨가 돌아와 심판석에 앉는다. 드디어 게임 시작!




땡!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탁구장 가는 길. 복도를 걸어가는 소리. 저벅저벅. 두근두근 긴장된다. 아직 두려운 초보의 설움. 탁구장 문을 열 때마다 바짝 기합이 들어간다. 주눅 든다. 오늘은 누가 있을까. 괜스레 불안하다. 누구와 게임을 하게 될까. 결국 누구라도 상대해야만 하는 방식.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한다. 탁구로봇이나 서브 연습이 있지만 그마저도 빈자리가 나야 한다. 빈자리가 없으면 누구라도 상대해야 하고 누구라도 상대하기 힘들면 뒤에서 기다려야 한다. 내게 쉬운 상대는 없지만 누구라도 친절한 상대가 있으면 그런 상대를 만났으면 하는 바람은 있다. 선택할 권리는 없지만 오늘은 제발 랠리라도 조금 이어지는 상대를 만나길 빈다. 그렇게 매일 상대와 인연이 닿아 구력이 형성된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부닥치면 그 자체로 맺어진다. 어우러진다. 맞서야 한다. 호흡을 주고받아야 한다. 차츰 관계가 형성되고 공격과 수비, 성공과 실패, 말 대신 스윙과 동작으로 그렇게 의사를 주고받는다. 세게 치고 살살 치고 세게 치는 척 살살 치고 살살 치는 척 세게 친다. 저리 치는 척 이리 치고 이리 치는 척 저리 친다. 네가 커트를 먹일 것을 나는 안다. 그것을 알기에 나는 강한 커트 서브를 넣는다. 네가 아무리 공들여 스톱으로 짧게 받아도 공은 튕겨서 길게 돌아올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어김없이 커트 드라이브를 걸어 넘긴다. 너는 상회전 잔뜩 먹은 공격을 받아내야 한다. 대응해야 한다. 준비해야 받을 수 있다. 올 게 올 줄 알아야 너는 받을 수 있다. 라켓을 닫아 최대한 빠르게 받아야 한다. 어쩌면 너의 테이블 코앞 그대로 공을 처박는다 생각하고 각을 숙여야 할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숙여야 공은 간신히 네트를 넘어 아웃되지 않고 살 터이다. 그런 정도의 준비가 되었니? 준비가 되었는지 어디 시험해볼까? 어라, 준비가 완벽하지 않네? 빈틈이 보인다. 그러면 끊임없이 공략한다. 결국 이겨내지 못하면 계속해서 저격당한다. 조그만 틈이 벌어져 넓어진다. 점점 구멍이 커진다. 그곳으로 한꺼번에 몰린다. 결국 댐은 무너진다. 무너지면 더 이상 맞수가 아니다. 


그렇게 탁구 실력이란 게 작용한다. 어느 정도 손발이 맞아야 한다. 주먹을 맞으면 쨉이라도 날려야 한다. 날려야 하는 것 그게 문제다. 편하게 랠리하고 게임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이를 바란다. 나보다 너무 잘하거나 못하지 않는 사람. 어쩔 수 없다. 실력 차이가 크면 어느 쪽이든 불편하게 된다. 저도 모르게 코치를 하고 코치를 받는다. 잠깐이면 괜찮지만 계속 치다 보면 느슨해지거나 트라우마가 생길지도 모른다. 매일 탁구장 문을 열 때마다 생각한다. 대체 누가 어떤 얼굴로 기다릴지를... 아무렴 기다리지는 않겠지만 어떻게 맞이할지, 그게 관건이다. 


따닥따닥!

탁구 치는 소리가 들린다. 몇 사람 없다. 소박한 소리. 나는 탁구장 안에 들어서자마자 버릇처럼 크게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일단 인사를 잘해야 한다. 누구라도 들으면 응답하겠지 한다. 인사를 잘해야 쳐다보기라도 한다. 오늘 네가 내 상대냐? 내 상대로써 어울리려나? 짧은 시간, 숙고하고 숙고해보고 숙고한다. 재고 재보고 잰다. 재다가 도저히 너는 내 상대로 어울리지 않아, 가 되면 건성으로 인사받고 그대로 하던 일 한다. 하던 일이 더 중요하게 된다. 계속 탁구 치거나 물 마시거나 옆사람과 수다 떨거나. 그러나 개중에 자신과 상대할만하다 싶으면 반가이 이리 오세요, 저랑 랠리 해요, 여기 심판석으로 오세요, 따위의 인사가 온다. 랠리는 랠리 하면 되고 심판은 심판 보면서 다음 차례를 준비하면 된다. 


마땅히 나는 반가운 사람이 되고자 부단히 애를 쓴다. 반가운 사람이 되려면 그에 상응하는 실력이 있어야 한다. 정말이지 너무 못하지 않는 부류에 속하지 않기 위해 결국 탁구장에 가장 많고 흔한 부수에 끼여야 한다. 대롱대롱 매달려 올라가야 한다. 힘들다고 손을 놓으면 다시 오르기 힘들어진다. 누가 잡아주지 않는다. 관장님은 옆에서 '발을 여기로 디뎌, 손을 머리 위까지 올려야지' 하면서 떠들기만 한다. 탁구장 실력들은 단순한 피라미드 구조가 아니다. 이를테면 항아리 형태라 할 수 있다. 진입장벽이 너무 높아서 맨 밑동은 좁고 중간이 가장 넓은 형태. 완전 초보와 고수는 상대적으로 적다. 가장 많은 중수가 되려면 치열한 먹이 싸움을 뚫고 살아남아야 한다. 아기새처럼 삐약삐약 입 벌리고 외로이 쳐다보면서 고수나 중수가 던져주는 먹이를 받아먹고 큰다. 먹이를 받아먹지 못한 다수 아기새들은 그대로 탁구 포기로 간다. 탁구는 나랑 안 맞아! 하면서 도태된다. 초보 탁구인은 고수, 중수의 사랑과 관심으로 성장한다. 어미 없이 아기새들끼리만 협생하여 크면 삐딱하게 큰다. 어쩌면 사파 탁구인이 될지도 모른다. 자신이 새인 줄도 모르고 물고기처럼 헤엄치고 다닌다. 혼자서는 결코 옳게 자랄 수 없다. 역설적으로 울타리에서 관장님이 주는 먹이만 먹고살아도 비실비실 가냘파진다. 가냘프게 랠리만 강해서 백날 랠리 강물에 빠져서 정작 게임에서는 바다에 나가서는 물을 먹는다. 야생의 전장에서 살아남으려면 야생의 먹이를 먹어야 한다. 레슨과 랠리의 태생적 한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스무 살이 되면 독립해야 하듯 부모의 울타리를 벗어나야 한다. 레슨장에서 벗어나 게임을 해야 한다. 자신이 새인 줄을 알면 닭장에서 벗어나 날갯짓을 해봐야 한다. 게임에 접목해야 한다. 혼자서 얼마큼 날 수 있을까. 이렇게 해볼까, 저렇게 해볼까. 그래, 그렇게, 드디어, 된다. 탁구인이 된다.




평소보다 일찍 왔다. 

이른 시간 탁구장에는 문 앞에 가까운 곳 3개 테이블에만 조명이 켜져 있다. 저 안쪽 5개의 테이블은 캄캄한 어둠 속에 묻혔다. 안쪽으로 갈수록 고수의 영역. 미지의 세계. 나는 그곳에 가 있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래서 이곳 출입문과 가까운 초보들의 영역이 아무래도 편하고 친근하다. 3개 테이블 중 가운데에서 혜리 씨와 병수 형이 탁구를 친다.


"안녕하세요!" 


혜리 씨는 활짝 웃으며 내 인사를 받아준다. 나보다 한 살 아래 혜리 씨. 우리는 서로의 정확한 나이를 묻고 들었을 때 함께 놀랐다. 언제고 그녀가 달려와 말하길 


"어머, 저보다 아랜 줄 알았는데 오빠네요. 몰랐어요" 하며 웃었다. 


사실 나도 그녀가 나보다 위인 줄로 알았다. 하마터면 대뜸 누나라고 부를 뻔했다. (이 글을 언제고 혜리 씨가 볼 텐데 걱정이 앞선다) 혜리 씨는 늘 밝은 얼굴로 인사하고 대화를 주고받지만 탁구 칠 때면 다른 얼굴이 된다. 그녀 역시 중수로 살아남는 과정에서 얼마나 아득바득 고생했을까. 독하지 않으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으리라. 순하디 순한 초보 정서가 파괴되고 깨져도 그녀는 웃으며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그녀는 탁구장에서 주기적으로 여는 주부교실 2기 출신이다. (현재는 6기까지) 한 기수 15명 중 2명이 살아남았는데 그중 한 명이다. 대략 3년. 나머지 13명은 중간 포기. 사라졌다. 이것이 탁구 초보들의 현실이다. 혜리 씨는 고수에게 지고 지고 또 지면서도 웃는다. 그러며 이를 빠득 물고 말한다.


"한 게임 더요." 


나는 게임 중 그녀의 맹렬한 포스에 맨날 당하곤 했다. 키가 작은 혜리 씨. 입을 앙다물고 두 손을 모아 냅다 휘두르는 식이다. 무섭다. 몸 전체를 활용하여 스윙한다. 백 사이드에 붙은 내게 포핸드 끝으로 날려버리는 스매싱~ 나는 멀리 팔을 휘둘러보지만 허공만 가를 뿐 공은 떼굴떼굴 저 안쪽 멀리도 굴러가버린다. 나는 멀리 공 주으러 가면서, 이런 젠장 아놔 제길 얼씨구 멀리도 굴러가네, 빨리 주워와야 되는데, 하면서 힘겹게 아이고 허리야, 하고 공을 줍는다. 처음엔 뛰어가다가도 멀리 공을 줍는 순간에는 슬며시 걷는다. (체력 보전의 차원, 그리고 마지막 남은 자존심) 뒤돌아 오면서 슬그머니 다시 뛰는 척 활짝 웃는다. 전혀 힘들지 않아요. 괜찮아요. 이 정도야 뭘~ (배우처럼 연기한다) 내가 공 주을 땐 맞은편에서 혜리 씨도 따라와 준다. 나는 테이블에 돌아와 그녀의 얼굴을 보며 마치 한 발도 걷지 않았다는 듯 괜찮아요 괜찮아, 한다. 그러며 찬찬히 숨을 고른다. 공이 멀리 굴러갔다고 해서 당신이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요. 나는 괜찮아요. 괜찮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르겠다. 조금 멀지만 잽싸게 공 주워오는 것도 다 운동이고 훈련의 연장이니까요. 자아~ 딴 데 신경 쓰지 말고 어서 게임해요. 플레이에만 집중합시다, 집중! 그런 뜻이 담긴 표정으로 나이스! 라고 기합까지 넣어준다. 정말 괜찮다는 말이다. 나이스라고 기합 넣은 건 비록 내가 멀리 탁구공을 주으러 다녀왔지만 결코 미안해하지 말라는 뜻이다. 점수를 뺏겼다고 해서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는 뜻도 담겼다. 그러니 너는 이때까지처럼 언제라도 씽씽 스매싱을 날리라는 뜻도 함축되어 들어가 있다. 나는 괜찮아. 얼마든지 공을 주워 올 수 있어. 그러니 절대 봐주지 말고 해. 네 실력 있는 그대로 최선을 다하란 말이야. 그래야 나란 몸뚱이가 깨달을 테니. 더 노력하고 매진하여 성장해야겠구나 하는... 


봐주게 되면 어느새 나를 상대하지 않게 될지도 몰라. 


나는 하수가 아니라 맞수가 되고 싶다는 바람.





병수 형의 서브 자세가 제법 진중하다. 


평소 장난기 많던 그의 성격에 비해 서브는 사뭇 다른 색깔을 표출한다. 갑자기 진지해지는 순간. 정적이 따라온다. 고요하다. 마치 마롱(중국 선수)처럼 왼손을 길게 펴 엎드려서 공을 노려본다. 그가 호흡을 멈출 때 맞은편 나도 따라 공기를 들이마신다. 무겁다. 이윽고 사뿐히 공중으로 토스, 서브를 넣는다. 강력한 하회전을 먹여서 짧고 횡으로 튀게 보낸다. 자칫 섣불리 건드리면 높이 찬스 볼을 주는 리시브. 그간 몇 번이나 찬스 볼을 주고 스매싱을 맞았던가. 머리로는 따닥 박자에 찍어준다는 생각을 하지만 막상 서브가 들어오면 당황하여 스윽 건드려보는 리시브가 되고 건드리자마자 공은 기다렸다는 듯 '엄마야 놀래라! 어딜 만져요!' 하면서 공중으로 펄쩍 튀어 오른다. '여보세요 여기 치한이 있어요! 잡아가세요!' 그러면 어김없이 찬스 볼이 되어 병수 형은 웃으면서 크게 때리고, 나는 잡힌다. 이윽고 나는 공 주으러 멀리도 뛰어간다. 굴러가는 공에 잡혀서 간다. 마치 치한이 되어 뺨이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하다. 기막힌 서브다. 나도 레슨을 받지만 저런 서브는 대체 누구에게 배웠을까. 안 가르쳐 주던데... 나도 저런 서브 하나 갖고 싶다는 생각이 봇물처럼 쏟아진다. 헐레벌떡 돌아와 나이스, 라고 외친다. 속으로는 젠장 제길 썩을 힘들어! 하면서 겉으로는 괜찮아요, 얼마든 더 치세요, 공이 부서져라 치셔도 돼요. 제가 열심히 뛰어가서 주워오면 되니까요. 그러니 당신은 당신의 플레이에만 집중하세요. 집중한 당신의 플레이를 상대할 때 저도 비로소 진중해지니까요, 라고 애써 괜찮다는 마음을 전한다. 


진중한 플레이에서 초보는 게임에 임하는 자세를 배우고 스킬을 익힌다. 몸소 부닥치며 깨져봐야 분노하고 분노해서 마침내 성장할 테다. 그런 성장의 과정은 아파야 한다. 그저 놀이 삼아 대충 대강하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끊임없이 분노하고 실망하고 마음 상해서 괴로워한다. 다시는 같이 게임 안 할 거야, 다시는 상대 안 해, 라고 마음먹으면서도 다시 맞서고 상대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태되고 낙오한다는 것을 잘 알기에 리시브를 이쪽저쪽 번갈아 받아보고 시도하고 얻어맞는다. 


그래, 이제 때가 왔구나. 그간 수없이 연구하고 때려봤노라. 초보의 시간. 죄 없는 로봇에게. 유튜브를 보며. 고수를 보며. 뒤에서 기다렸다. 그래, 3구 결정타. 나는 3구를 노리기로 했다. 3구가 굳이 찬스 볼이 아니더라도 결정타로 날려보기로 했다. 


"리모컨 이리 내." 


그동안 아내가 얼마나 잔소리를 했던가. 나는 틈날 때마다 TV로 탁구 유튜브만 봤다.


"잠깐만." 


나는 짧은 하회전 서브를 넣는다. 반회전 반커트를 살짝 머금어서. 그러자 어김없이 병수 형은 커트로 받는다. 짧지만 원 바운드성 흐르는 볼이다. 나는 재빨리 돌아서서 몸을 좌측으로 한껏 기울인다. 동시에 힘을 빼 백스윙한다. 이것은 짧은 볼이다. 게다가 커트 볼. 그냥 단순히 세게 때리면 백 프로 네트에 처박히는 공. 잊지 말자. 전진 드라이브. 공을 얇게 핥아야 한다. 혀를 쭉 내밀어 공의 윗면을 핥고, 핥는 파워로 채찍처럼 감아 묻혀서 가져가야 한다. 공은 침에 달라붙어 뒤늦게 강력한 회전이 걸린다. 고작 침으로 회전이 걸리려면 뭐가 필요한가? 바로 임팩트다. 힘을 뺀 하완을 튕기면서 접는다. 거기다 손목까지 힘을 빼 라켓마저 튕긴다. 단순히 크게 휘두르는 게 아니라 튕겨주는 임팩트다. 그렇다. 몸통은 손이고 팔은 채찍이다. 몸이 먼저 왼쪽으로 돌아가고 뒤늦게 발동이 걸려 스윙하는데 임팩트 시점에서 공을 채는 것이다. 침을 발라서 혀를 길게 늘어뜨려 찰싹 튕기며 핥는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나? 찰나의 순간이지만 공은 자신을 흐느적 강하게 바른 감촉을 잊지 않는다. 공은 곧 뭔가 크게 변할 것을 예감한다. 역시나 몸은 감촉을 따라 돌고 돌아서 네트를 넘는다. 넘자마자 테이블에 꽂히고 타악! 경쾌한 소리를 내며 빠르면서도 멀리 굴러가 버린다. 이것은 마치 스매싱 같은 드라이브. 이름마저 아름다운 전진 드라이브다. 드디어 나만의 스킬. 이 3구를 위해 나는 허구한 날 탁구로봇과 씨름했었다. 상회전 제로, 하회전 3단으로 맞추고서... 


"이리 달라고 리모컨, 시도 때도 없이 탁구야. 집에서는 탁구 금지야!" 


아내의 말이 내 귓가에 울린다. 그런데 병수 형이 놀라 공을 주으러 달려간다. 나는 얼결에 


"죄송합니다" 말하며 테이블 반대편에서 나란히 뛴다. 돌아오니 병수 형이 나이스를 외친다. 그리고는 놀란 눈으로 


"너 인마 이거 어떻게 된 거야?" 하고 묻는다.


"어제 까지만 해도 안 그랬잖아. 갑자기 공 파워가 왜 이렇게 세진 거야?" 


"잘 모르겠어요, 그냥 한번 쳐 봤어요." 


병수 형은 연신 헉헉! 공을 주워오면서 


"나이스! 다시 쳐 봐"라고 말한다.


나의 3구 결정타 드라이브는 어느새 병수 형을 움츠리게 했나 보다. 이제는 내가 스텝만 밟아도 움찔한다. 나는 3구만이 아니라 병수 형의 모든 볼을 공격적으로 넘겨본다. 병수 형의 서브마저도 전처럼 슬며시 툭 건드리는 게 아니라, 확 그냥 이걸 어떻게 해버릴까? 하면서 겁 주며 보다 세게 건드린다. 이를테면 확확 달려드는 식이다. 그렇게 선제를 날리면 상대는 수비를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찬스 볼을 주더라도 중진에 서서 곧잘 블록도 해낸다. 병수 형은 점점 위축되고 소심한 플레이를 한다. 나는 3구 드라이브뿐만 아니라 다양한 펀치로 위축된 그를 퍽퍽 때린다. 병수 형은 탁구공에 많이도 맞았다. 나는 2세트를 먼저 내주고도 내리 3세트를 따 승리했다. 병수 형은 물도 마시지 않고 심판석에 앉아 한게임 더! 를 외친다. 내가 혜리 씨와 게임하고 그 뒤 나랑 한 번 더 붙자는 거다. 나는 교대도 하지 못하고 이쪽에 서서 병수 형과 혜리 씨를 번갈아 상대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아직 고수들이 오지 않은 탁구장에서 나는 잠깐 빛나는 별이 된다. 별 주위로 위성처럼 모이는 아기새들이 주변을 돌며 짹짹거린다. 비록 초보의 그늘을 채 벗지 못했지만 나만의 결정타가 하나 생긴 것에 더없이 만족하며 혜리 씨 앞에 선다. 그녀의 놀란 얼굴 표정이 맞은편 나를 보면서 말한다. 맞수가 되고 싶습니다. 상대를 해 주세요. 내가 아래, 하수인 줄 알았던 사람. 나를 지나쳐 고수 테이블로 달려가던 이들. 달라진 위상. 탁구대 위에 라켓을 올린다. 상대에게 인사하고 심판에게 인사한다. 그리고 손 내밀어


가위 바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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