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머피 Oct 13. 2022

탁구장에서 들리는 함성

아싸라비요 선희 진엽 옹기




"아싸라비요!"


이것은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진엽 형의 기합소리다. 내가 돌아보니 마침 진엽 형도 돌아본다. 보고 있자니 진엽 형이 눈빛을 반짝이며 자신의 속내를 전한다. 

아, 내가 점수를 따냈구나. 어떻게 따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기뻐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구나. 미치도록 좋구나. 좋은 걸 어떡해. 고함이 입 밖으로 마구 쏟아져 나오려 해서 나도 모르게 빽~ 아무렇게나 소리 지르고 싶은 욕구가 마구 충만하건만 그래도 어험험험~ 사회적 체면이 있어서 자중 하노라. 다만 다소 정제된 발음으로 내뱉으니, 이것은 이 시대 점잖은 어른의 지극히 평범한 포효가 아니겠느냐, 한다. 

다시 울린다.

"아싸라비요~" 


그렇게 촐싹 맞고 긴 울음소리가 탁구장 가득 힘차게 울려 퍼진다. 기합은 옆에서 탁구 치는 사람, 심판 보는 사람, 지켜보는 사람 저마다의 얼굴에 날아가 부딪쳐 고막을 두드리더니 심지어 휴게실에서 콜라 마시는 악인의 뺨도 갈긴다.

"아이고, 깜짝 놀랐네" 

콜라 마시던 악인의 콜라가 흔들려 악인의 턱과 셔츠에 줄줄 흐른다. 

"이게 누구 소리야?"

악인은 손등으로 툴툴 훔치며 테이블 쪽을 본다.

"아싸라비욧!"


진엽 형.

늘 기운찬 사나이. 

시커멓고 커다란 얼굴. 머리는 곱슬이고 쌍꺼풀이 찐하다. 전형적인 운동맨의 단단한 체형. 상체는 근육이 많고 튼실한데 비해 하체가 빈약하다. 특히 땀을 많이 흘린다. 그래서 늘 헤어밴드를 착용한다. 밴드로 이마를 시원하게 깐다. 깐 이마에 흐르는 땀이 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탁구대에 땀이 뚝뚝 떨어진다. 그는 언제나 힘차다. 혼자서 열대우림에 빠진 사나이처럼 흠뻑 젖은 몸으로 사방을 헤매고 다닌다. 용맹하다. 새로운 고수와 싸우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거친 세상의 풍파를 뚫고 나가는 사나이. 구력은 이제 8부. 그럼에도 용감하게 도전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를테면 무술 고수, 엽문이라고나 할까. 딱하나 차이가 있다면 엽문은 처음부터 고수로 등장하지만 진엽 형은 초보로 등장하는 것. 그러나 그게 대수랴. 엽문처럼 팔뚝과 가슴 근육이 탱탱하다. 탱탱한 이마, 탱탱한 눈빛, 언제고 그가 내게 엽문 포스터를 보여주면서, 이제 더 이상의 엽문 시리즈는 없을 거라고 전해주었다. 나는 형이 뭔데 엽문 시리즈의 어쩌고 저쩌고를 논해? 라고 따지려다가 가만 엽문의 주인공, 견자단과 형이 심하게 닮았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당신의 이름이 진엽, 이구나, 했다.

그는 게임 시작하고 1세트만 지나도 금방 사우나에 다녀온 것처럼 흠뻑 젖는다. 누군가 

"옷 입고 샤워했어요?"

라고 물으면 

"어제 술을 많이 먹어서"

라며 씩 웃곤 한다. 다정다감한 사람. 그래서 진엽 형은 하얀 헤어밴드를 착용하고서 까만 얼굴이 도드라지는 가운데 이마를 삐까번쩍 반짝이면서 탁구를 친다. 상대의 서브를 노려보는 그의 눈빛은 흡사 견자단처럼 빛난다. 


진엽 형은 주말부부다. 

평일에는 아내와 자식 없이 타지에서 홀로 밤을 지새운다. 사십 대 중반, 어느덧 중년의 남자. 자칫 우울해질 수 있는 환경. 부쩍 해가 일찍 저무는 계절. 커져가는 보름달. 다행히 술과 낚시가 그의 위안이 된다. 어쩌면 술맛을 위해 낚시를 가는지도 모른다. 보다 멋진 음주를 위해 새벽 낚시를 준비한다. 낚시를 사랑하는 자들은 대체로 조용하다. 차분한 성격. 무언가 지켜보는 눈길이 그윽한 남자. 평소에는 조용한 성품이다. 아직 실력이 8부 초보라 대기실에서 탁구 치는 이들을 보면서 망연자실할 때가 많다. '망연' 속에서 탁구 치는 이들을 본다. '자실' 하다가 아아, 역시 내겐 낚시가 1순위야, 할 때가 많다. 집에 가버릴까? 땀을 내야 하는데. 모처럼 왔는데. 누가 저랑 탁구 좀 쳐 주세요, 하는 눈빛을 보일 때면 마치 16세기 조선, 첫날밤에야 처음 신부 얼굴을 보는 신랑처럼 애처롭다. 결혼식을 마치고 합방할 때까지 아내의 얼굴을 모르는 남자. 애석하고 애석하다.  누가 제 짝인가요, 묻는 듯 그의 눈빛은 더없이 그윽하다. 그의 그윽한 눈길을 받는 여타 탁구인들은 차츰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저 놈의 눈빛 공격. 외롭다는 눈빛의 표현. 누구라도 나 대신 저 남자의 손을 잡아 주면 좋겠다, 싶다. 아이 참 부담 되잖아. 왜 저리 그윽한 눈길로 탁구장 사람들을 둘러보는지? 적을 잃은 견자단은 어쩐지 외롭다. 알고 보면 늙었다. 견자단의 슬픈 눈빛. 선택의 여지도 없이, 누구라도 제 적이, 파트너가, 아니 아내가 되어 저를 구제해 주세요, 하며 그는 탁구장 가운데 대기실에서 대기 타자가 되어 출전을 기다린다. 


진엽 형이 한참 동안 간택되기를 기다리는데 저 멀리서 8부 여성(여자 부수 5부) 선희 씨가 자비로운 미소로 

"이리 와요, 저랑 같이 쳐요" 

하니 진엽 형은 눈이 왕방울처럼 커져서, 

"네! 감사합니다!" 

하고 벌떡 탁구칠 채비를 한다. 


진엽 형이 8부 여성 선희 씨를 찬찬히 본다. 보면서 눈빛으로 말한다. 얼굴을 들어 보아요. 아아 당신이 제 맞수, 아니 파트너 흠흠 그러니까 아내군요. 저는 왜 첫날밤이 되어서야 당신을 보는 건가요? 앗! 그런데 당신 어떻게 그렇게 생길 수가 있나요? 너무 예쁘잖아요. 예쁜 사람. 예쁘면서 마음씨까지 착하시다니. 역시 요새는 예뻐야 착하다더니. 보면 볼수록 예쁜 당신. 근데 예쁘면 게임에 지장 있는데. 별수 없죠. 저만의 집중력으로 불사를 수밖에.


자비로운 여성 선희 씨도 몰랐을 터다. 그가 게임 중 이토록 자신의 귀를 자극할지는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탁구장 전체가 쩌렁쩌렁 울린다. 진엽 형은 탁구를 치며 한 점 한 점 이길 때마다 괴성을 내지른다. 오늘날 견자단은 영춘권 대신 고함으로 상대를 윽박지른다.

"아싸라비요!"

졸지에 함께 탁구 치는 상대, 즉 파트너가 된 자비로운 선희 씨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한다. 그녀는 어쩌자고 지아비로 진엽 형을 선택했을까? 몰랐을 테지. 아무튼 게임이 끝날 때까지는 계속하여 파트너로서 상대를 해주어야 한다. 그의 맞은편에서 그가 치는 공을 쭈욱 받아내야 한다. 치고받고 치고받는다. 어쩐지 인생과 닮았다. 싸우고 풀고 싸우고 정들고. 그렇게 오순도순 점수를 주고받는다. 시간이 흘러 늙어 죽는다. 이기거나 지거나. 먼저 죽거나 늦게 죽거나. 어쨌든 한평생 비비고 비벼야 한다. 싸우든지 말든지. 탁구 한 게임은 하나의 인생. 하나의 삶. 어떤 삶을 누구와 살지 스스로 선택했건만 8부 여성 선희 씨는 자책한다. 다음 생에는 두 번 다시 같이 치자고 하면 안 되겠구나. 부디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아요.

"아싸라비요"

보기만 했지 미리 만져보지는 못했잖아. 입어보지는 않았잖아. 살아보지는 않았잖아. 이른바 인터넷 쇼핑의 폐해처럼 그의 탄탄한 육체와 가녀린 눈빛에 속았다는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나는 옆 테이블에서 대각선 너머 선희 씨의 얼굴을 어렴풋 보는데, 그녀는 '비록 내가 골랐지만 당신은 정녕 내 스타일이 아니에요. 무르고 싶어요. 환불하고 싶어요. 그것도 안되면 교환이라도 어떻게 안될까요' 하고 읍소하는 듯했다.


바야흐로 파트너가, 신부가 된 8부, 자비로운 선희 씨는 진엽 형의 괴성에 기겁하는데, 진엽 형은 '비록 내가 남자답게 주도적으로 당신을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뭐 어쩌랴 이것이 내 운명인걸, 여자가 먼저 프러포즈하는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시대, 요지경 같은 요새 세상을 나는 마음껏 즐겨줄 테다, 미모 따윈 정들면 다 똑같아' 하며 첫날밤 신부에게 코뿔소처럼 맹렬히 달려든다. 자비로운 여성 선희 씨는 어쩌랴, 3 세트를 이길 때까지 견뎌야 한다, 저 놈이 먼저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며 내심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중~ 


소리는 규칙적으로 울린다. 그가 아! 를 내지를 때 가만 얼굴을 살펴보면 볼이 볼록해지는 것이 아마도 복식호흡을 하는 듯하다. 싸! 는 기백이 저 아랫배에서 마치 용암을 올려 보내 울컥 토하는 화산처럼 담겼다.

"아싸~"

표정은 자못 진중하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진지하고 준엄하게 만드는가? 이어서

"라비요!"

마무리 기합소리는 입 주위 공기를 단박에 머금어 삼키는 소리. 느리게 재생하면 라아아압 비이이이요, 가 된다. 

"아싸라비요!"


옆에서 게임하던 나는 내내 그 소리에 영향을 받는다. 어떤 서브를 보낼까 고민하다가 어느새 진엽 형의 기합에 빠져 멍한 상태가 된다. 생각 없이 서브를 보내고 앞서 역공당한 리시브에 다시 점수를 내준다. 멍한 상태에서 나는 진엽 형을 생각한다. 기합 참 멋지구나. 내뱉고 머금는다. 주고받는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 거스를 수 없는 순환의 원리다.

"아싸라비요!"

나도 모르게 그의 아싸를 기다린다. 고함소리와 함께 기가 모이고 흩어진다. 신비롭다. 그렇게 스스로를 일깨우고 긴장감을 유지한다. 한순간이라도 나태해질까 집중력이 흐트러질까 다그치는 기합.

"아싸라비요!"

그러나 옆에서 듣는 사람은 깜짝깜짝 놀라기도 한다. 아! 소리가 시작되면 아하 그가 이번 포인트를 이겼구나 하는 걸 즉시 알 수가 있다. 이어서 싸라비요, 가 나와야 기합이 끝나리란 걸 잘 안다. 어서 싸라비요, 가 나와서 끝나거라 바라지만, 소리를 잊고 내가 게임에 집중하기도 전에 연신 아싸라비요, 가 들려올 때면 정말이지 한숨부터 나온다. 그가 연속으로 득점했구나. 나는 지금 옆에서 게임 중인데 왜 그의 시합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아야 하지? 알기 싫구나. 내 게임만 해도 벅차다고 고하고 싶다. 옆에서 그는 아싸라비요 다섯 번의 음절 중 아싸! 만 하거나 라비요! 만 하거나 아! 만 하지 않고 늘 다섯 번의 악센트를 꼬박꼬박 지킨다. 그의 상대편 선희 씨는 그의 아싸라비요, 가 끝나야 비로소 서브 자세에 돌입할 수 있다. 준비되었니? 이제 서브 넣을 테니 아싸, 그거 또 하지 마 하는 표정으로 그녀는 서둘러 서브를 넣는다. 




"아, 나이스 서브!" 


이 말은 나의 맞은편, 같이 탁구 치는 옹기가 내 서브를 받다가 미스하고 낸 말이다. 내가 그리 회심의 서브를 넣은 것도 아닌데 그는 매번 나이스를 외쳐준다. 옹기는 결혼한 지 1년 남짓된 새신랑이다. 7부 중 떠오르는 신흥 강자다. 4부, 5부도 옹기의 드라이브를 쉬 받아내지 못한다. 성실한 삼십 대 청년. 언제나 탁구장에 나오면 로봇 앞에서 차분히 몸 풀고 게임을 시작한다. 

내심 고맙다. 내 서브가 그리 대단하던가? 아닌 거 같은데? 그래, 아니야. 아무래도 이상하다. 설마 자신이 못 받은 것만 나이스라고 외치나? 혹시나 싶어 나는 포핸드 짧은 서브를 넣어본다. 평범하게. 그러자 옹기는 놀랬다는 듯 급히 다가와 엉겁결에 공을 하늘로 띄운다. 나는 웬 떡이냐 하고 냅다 찬스 볼을 때린다. 옹기는 공을 주으러 가며 

"아, 나이스 서브" 

하고 외쳐준다. 돌아와서는 다시 

"형, 서브 너무 멋져요"

라고 덧붙인다. 평범했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랠리 중에 내가 드라이브를 날리고 자신이 못 받으면 

"아, 나이스 드라이브, 아, 정말 멋져요" 

하고 감탄사를 내뱉는다. 나는 내 드라이브가 그리 멋졌나 곰곰 되짚어 보지만, 아니 아니다, 그저 평범한 드라이브 중에 하나일 뿐, 그래, 그것도 과찬이다. 개폼이다. 얼결에 넘긴 볼인데, 단순히 득점이 났다고 해서 나이스, 라는 칭찬을 들을 정도는 분명 아니다. 물론 이뿐만이 아니다. 내가 질 때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옹기가 득점할 때도 마찬가지로 

"아, 재수, 죄송합니다"

라고 말한다. 자신이 이겨서 내게 미안하다는 것이다. 미안하면 때리지나 말지 왜 때려서 아픈 사람 아파하는데 거기다 대고 미안하다고 하니? 라고 묻고 싶지만 그래도 그의 마음을 잘 알기에 나는 묵묵부답 따지지 못한다. 

"아, 운빨로 들어갔네요." 

옹기의 드라이브가 성공하고 내가 공 주으러 갈 때 그가 하는 말이다. 자신이 이길 때마다 재수, 운이라고 정의하는 마음. 나는 그 재수와 운에 져서 공 주으러 간다. 재수 좋은 사람, 운이 따르는 이를 과연 누가 이길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가 평소 실력 증진에 무던히도 힘쓰는 것을 나는 잘 안다. 탁구장에 나와서는 준비운동을 하고 레슨실로 들어가 로봇과 연신 씨름한다. 거울을 보면서 섀도 스윙도 한참을 하며 자세를 다듬는다. 그리고는 바깥에 나와서 적당한 상대에게 다가가

"같이 치실래요?" 

하며 청한다. 처음에는 상대와 화 랠리를 하고 쇼트 랠리를 한다. 이어서 커트 랠리를 하고 드라이브 랠리까지 순서대로 주고받는다. 드라이브 랠리는 한 사람이 10개 연속 성공할 때까지 하자고 한다. 그렇게 모든 순서가 마무리되었을 때 비로소 게임 차례가 되는 것이다. 그토록 열심히 루틴을 지켜 단련하는 친구가 단순히 운이나 재수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백 프로 새빨간 거짓말임을 나는 안다. 다만 상대를 배려하자는 그 마음. 겸손한 감탄사. 상대인 내가 공 주으러 갈 때 보다 기분 좋게 달려가라는 덕담인데. 


옹기에게는 특별한 루틴이 있다. 상대가 저보다 떨어지는 실력이면 별 말을 하지 않는데 상대가 자신과 비슷하거나 높으면 입 밖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컴 온~"

이것은 옹기가 지고 있다가 한점 뒤따라 갈 때 내는 소리다. 그리고 모처럼 멋진 드라이브를 꽂을 때도 낸다. 직역하자면, 덤벼보라는 뜻이다. 자, 계속해서 덤벼보아라, 나는 준비되었다. 맞고만 있지만 않겠다. 나만의 드라이브를 꽂아줄 테다. 무섭지 않다. 그래, 바로 이거야. 이 맛으로 탁구 치는 거지. 방금 내 드라이브가 어때? 라는 뜻도 담겼다. 그래서 옹기의 상대로 탁구를 칠 때 '컴 온'을 들으면 옹기가 상대를 인정했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지금 최선을 다해 게임에 임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컴 온'이 들리면 녀석, 지금 게임에 몰입했구나, 라고 이해하면 된다. 혹시나 '컴 온'이 반말처럼 들려서, 너 지금 뭐라고 했니? 라고 따지면 안 된다. 녀석은 지금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어서 이 세상의 정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공 주으러 옆 테이블로 가니 다시 아싸! 소리가 난다. 진엽 형이 또 득점했나 보다. 공은 진엽 형의 발아래에 있다. 나는 그가 밟을세라 금방 공을 줍지 못한다. 동시에 그의 기합에 방해가 될까 싶어 어정쩡 뒤에 서서 기다린다. 이제 라비요! 를 외치겠지? 어서 외치세요. 이윽고 라비요! 드디어 연발 기합소리가 끝난다. 그제야 나는 공을 줍는다.


기합은 호흡을 가다듬고 게임에 집중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타인에게 영향을 주면 그때부터는 소음이 될 수 있다. 소음은 제2의 스윙이 된다. 이미 탁구공은 라켓에 맞아 떠났지만 소음이라는 제2의 스윙을 휘둘러 뒤따라 보낸다. 그러면 날아온 공을 받으려던 이가 공을 어찌 받을까, 포핸드냐 백핸드냐, 상회전이냐 하회전이냐, 집중에 집중을 하다가도 제2의 스윙, 바람에 휭 떠밀려 자세가 흔들려버린다. 흔들려서 실수가 일어난다. 안타깝지만 곧이어 아싸라비요! 가 다시 터진다. 이하 무한반복, 게임 오버가 될 수도 있다. 탁구 실력에 있어서 기합은 어쩌면 0.3 부수 정도 차지하는지도 모른다.


"빠샤아아압! 흡흡 흡흡!"

어디선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소리가 난다. 처음 듣는 소리다. 제법 우렁차다. 더한 놈이 나타났나?

"빠샤아아압! 흡흡 흡흡!"

그 기합은, 한 점 한 점 얻을 때마다 지르기에도 벅찬 크고 긴 소리다. 빠~가 시작될 때는 갑자기 등장한 '고 데시벨'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다. 그러고는 기다린다. 흡흡이 두 번 반복될 때까지. 저 놈은 부끄럽지도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탁구장에서 빠샤라니. 이 무슨 괴성인가. 게임에 음료수 내기라도 걸었나. 음료수는 하나에 천 원이다. 천 원에 목숨이라도 걸었단 말인가. 하긴 내기라는 건 사람을 미치게 하는 속성이 있다. 짐작컨대 심판 보는 사람을 비롯하여 주위에 있는 모든 이에게 음료수 쏘기, 라는 내기가 걸렸을 터다. 대략 만 원치다. 그렇다 해도 여기는 무슨무슨 대회장이 아니다. 그냥 작은 사설 탁구장일 뿐이다. 소리치는 그를 여기저기 사람들이 쳐다본다. 그는 사람들이 쳐다보든 말든 연신 "빠샤아아압!" 하고 사자후를 터뜨린다. 그러면서 마치 흐느끼는 것처럼 흐읍 흐읍 흐읍 흐읍! 하면서 무언가를 들이마신다. 집중하는 그에게 누구도 뭐라 하지 못한다.

그 소리를 가만히 듣던 견자단 진엽 형이 아싸라비요 소리에 보다 깊이 힘을 넣는다. 혹시나 자신의 기합 소리가 묻힐까 싶어 좀 더 크고, 묵직하게, 그리고 뒤를 조금 끌어주면서 라~~비~~요~~ 라고 소리친다. 그렇게 하면 박자가 안 맞잖아요, 하고 따져 묻고만 싶지만, 문득 그가 힘들어 보이는 건 나만 그럴까. 

한편 옹기는 쉬지 않고 중얼거린다. 

"아, 좋아 나이스! 아, 서브 어려워, 나이스 플레이." 

녀석이 카운터 스매싱을 날린다. 공은 정확히 이 쪽 테이블에 꽂혀 저 멀리 굴러간다. 떼굴떼굴. 모서리에 맞아서 멀리도 간다. 착한 녀석. 망연자실 내가 공을 바라보고 있자니 

"아, 죄송합니다, 너무 세게 쳤네"라고 한다. 

나는 그저

"파이팅!" 

외치고 달려간다. 


탁구는 단순히 손으로 하는 운동이 아니다. 

이른바 멘털 운동이다. 몸통을 움직일 때 팔이 따라가듯 마음이 움직여서 라켓이 따라간다. 마음을 다잡는다. 배에 힘을 줘 고함을 친다. 스스로 싸우는 게 아니라 상대와도 싸운다. 상대와 싸우는 듯 스스로와 싸우고 스스로가 스스로를 거스를까 기꺼이 기합을 내지른다. 기합은 상대에게 어떻게든 전해져 대미지를 준다. 라켓이 공과 스치며 때린 임팩트가 전부는 아니다. 혼이 실린 외침이 공기방울에 실려 두둥실 드라이브 회전에 따른 바람에 묻어 상대방 가슴팍에 가 닿는다. 상대는 가슴에 와닿은 기운에 움찔 밀리면서도 공을 맞추기 위해 눈을 떼지 못한다. 가까스로 라켓에 공을 맞추지만 아뿔싸 기백에 밀렸구나 이건 내 본디 스윙이 아냐, 하면서 탄식을 내뱉는다. 밀리지 않아야지, 반드시 만회한다, 하면서 스스로를 추스른다. 가자, 그간 연습하고 익혔던 나만의 스윙. 자, 가거라, 하고 보다 차분한 마음으로 스윙한다. 공은 오롯이 내 마음 그대로를 상대에게 전한다. 상대는 마음에 한번, 공의 회전에 두 번, 방심한 자세에 세 번 밀려서 실점한다. 나는 뭐라 뭐라고 소리친다. 그러면서 흡, 흡 끊어 말하며 흩어진 기를 소집한다. 아, 그래서 기합이 나오는구나.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진지하게 승부에 임하는 마음. 마음에서 우러난 파이팅. 파이팅은 스스로를 일깨우고 격려한다. 


"아싸라비요! 아, 나이스 플레이, 재수! 컴 온! 빠샤아아압!" 


밤이 깊어간다. 

탁구장 실내가 여러 고함 소리에 후끈거린다. 선희 씨가 조용히 창문을 연다. 그러자 찬바람이 확 들어온다. 언뜻 처음에는 시원하다가 금방 움츠러들 정도로 실내가 차가워진다. 스산한 기운. 땀방울이 놀라 달아난다. 쾌적하다. 점점 쾌적해. 쾌적의 끝. 이보다 더 쾌적할 수 있을까라고 느끼는 순간 그래, 나야 나, 나 왔어, 하며 추위가 밀려온다. 사람들의 기합소리가 차가운 공기에 휩싸여 말라간다. 그렇게 점점 마르고 갈라져 밤은 깊어간다. 


그럼에도 나는 잊지 않고 흡흡 흡흡! 하면서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신다. 목에 침 넘김이 까끌거린다. 괜찮아, 백신 주사도 맞았잖아 하면서 이연사 '빠샤아아압'을 외친다. 긴장을 놓치지 않는다는 마음. 


0.3부라도 더하고 싶은 바람.




매거진의 이전글 탁구 치는 신데렐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