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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Oct 13. 2022

탁구 치는 신데렐라

혜리와 규옥




혜리 씨는 작고 가냘픈 체형이다. 


때문에 크고 강한 남자를 선호한다. (만고 내 생각) 약하고 비실거리는 남자는 남자로 봐주지 않는다. 그녀 앞에 선 상대는 언제나 고수들 뿐. 이것은 어쩌면 나의 편협하고 독선적인 판단일지도 모른다. (내 관점에서) 볼 때마다 혜리 씨는 늘 바쁜 사람, 시간이 없다. 퇴근 후 해 질 녘에 왔다가 저녁 밥하러 서둘러 집에 가야 하는 운명. 마음이 급하다. 언제나 여덟 시가 되기 전에 떠나야 한다. 마치 12시가 지나면 마법이 풀리는 신데렐라처럼.


"나부터 할게요. 빨리 가야 하거든요"


라는 말을 입에 달고 플레이한다. 이른바 8시의 신데렐라. 보통 삼파전을 할 때면 이긴 이가 계속하고 진 이는 심판을 보는데 혜리 씨는 심판 볼 여간이 없다. 어떡해요, 어머, 어떡해, 야단 났다, (사운드 큐~) 어떡해~ 벌써 여덟~ 시...라고 '청하'처럼 노래하기에 그녀가 신데렐라인 것을 우리 모두 안다. 이해한다. 


"그래요. 먼저 하세요"


하면서 양보한다. 중요한 건 그녀와 게임하는 거니까. 상대방으로서 당당히 맞은편에 서는 거니까. 궁전에서 신데렐라의 짝이 된다는 것. 탁구장에서 혜리 씨와 탁구 칠 수 있다는 것. 둘은 같은 급이다. 그러려면 마땅히 실력이 있어야 한다. 그대가 왕자로 태어나든지 탁구를 잘 치든지. 


혜리 씨! 당신이 바쁜 시간 쪼개서 탁구장에 오신 거 잘 압니다. 오늘 귀중한 시간 일부분 부디 그대의 상대로 허락해 주세요. 네? 된다고요? 정말요? 아아 감사합니다. 내가 이날을 얼마나 고대했던가 하고 남자들은 저마다 그녀의 손을 잡으려고 줄 선다. 헤아릴 수 없는 혜리 씨의 매력들. 


혜리 씨는 심판을 보다가도 이따금 옆 테이블에 눈길을 주기도 하는데 자신의 상대로써 어울린다고 판단되면 즉시

"저기, 죄송한데 옆 테이블로 떠나도 될까요?"


하며 양해를 구하고 옆 테이블 남자의 손을 잡는다. 짧은 틈새, 허락된 시간 안에서 보다 많은 이들의 손을 잡아주기 위함이다. 손 잡힌 남자는 이른바 간택을 받은 것이다. 영광스럽다. 그렇게 새로운 테이블, 즉 무도장에서 한바탕 춤을 추려고 하면 어느새 심판석을 두고 득달같이


"저, 심판 좀 봐도 되겠습니까?"


하면서 남자들은 앞다퉈 경쟁한다. 심판석에 앉으려면 적어도 혜리 씨의 상대남으로써 자격이 있거나 어울린다는 하명이 있어야 한다. 혜리 씨가 돌아보며 찬찬히 보다가


"네, 앉으세요"


하면 얼씨구나 감사합니다 하고 앉아서 점수판을 넘긴다. 혜리 씨의 플레이 하나에도 부지런히 나이스! 아깝다! 파이팅! 이라고 연신 기합을 넣는다. 작고 가냘픈 혜리 씨. 동그란 안경 속 눈동자가 만화 주인공 영심이처럼 빛난다. 어떡해, 벌써 여덟 시~ 가 되기 전에 일어나야 하는 운명. 그전에 어떻게든 선택받으려는 남자들. 속마음이 말한다. 손 한번 잡아주세요. 


처음에 혜리 씨는 공식 시합에 나가본 적이 없어서 최하위 부수로 게임을 했다. 그러나 실제 실력은 남자 6부 정도. 이것은 공공연한 비밀. 지금은 공식 시합이 재개되고 몇 번의 우승 끝에 여자 4부가 되었다. 남자 부수로 치면 7부다. 도전자들은 혜리 씨에게 핸디를 주어야 한다. 남자들은 구장에서 비공식이라도 8부 7부 부수를 지정받지만 여자들은 다르다. 여자들은 공식 시합에 더러 참여해본 이들이 많고 공식적으로 입상하여 부수를 받은 이들이 다수 있어서, 그들의 입장도 감안하고, 또 공식 시합과 관련된 이들의 의욕 고취라는 부분도 있기에 오롯이 공식 부수를 따르는 편이다. 따라서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공식 부수가 없으면 죄다 9부 취급을 받는다. (10부는 탁구장 입문 부수) 그것이 우리 탁구장에서는 공평(公平)한 처우로 여겨져 지켜진다. 그래서 상대 남자로부터 핸디를 받고 시작하고 또 늘 이기면서도 그녀는 핸디 받는 것을 불편해하지 않는다. 핸디에 있어서 어떠한 개인 의견도 표출하지 않는다. 


저는 다 수긍할게요. 낭군님들 원하는 대로 하시어요. 실력이 동급이라도 부수 높은 상대를 배려하기 위해, 기꺼이 핸디를 받아주는 면도 있다. 핸디가 있어서 이겼다는, 혹은 핸디를 줘서 졌다는 위안도 받게끔 하는 더블 효과. 낭군님을 위한 저만의 처세법이에요. 마음 넓은 혜리 씨. 흔쾌히 하위 부수임을 인정하는 자세. 

소녀, 어찌 낭군님보다 위에 있다 하겠어요. 오늘은 단지 운이 좋아서 이겼을 뿐이에요. 아름다운 마음. 그래서 더 마음 쓰이는 건지도 모른다. 낭군님, 오늘 즐거웠어요, 하는 편안한 눈빛. 게임이 끝난 후 그녀의 눈을 보노라면, 저는 다 알아요, 낭군님의 마음, 하고 말하는 것만 같다. 

그녀는 게임 후, 자신이 이기면 상대에게 '다음에 제게 도전하세요. 열심히 하세요. 도전을 받아 줄게요'라고 말하고 자신이 지면 '다음에 제가 도전할게요. 노력할게요. 잘 배웠어요'라고 말한다. 도전과 방어전. 와중에 라이벌이 만들어진다.


당찬 입술. 

온몸을 기울여 힘껏 때리는 스매싱. 최선을 다하는 기합. 이야앗! 설령 상대가 날린 공에 자신의 가슴팍이 맞아도, 아프지만 괜찮다면서 되려 나이스를 외쳐주는 당신. 공이 당신의 몸 한가운데로 슝~ 날아갈 때 순간 그녀는 두 눈을 꼭 감는다. 두 손 모아 몸을 움츠린다. 아아, 무서워요. 무섭지만 저는 괜찮아, 괜찮다고 말할 거예요.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힘껏 스윙하세요 하고 말한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깨문 입술 틈새로 비명이 새어 나온다. 꺄아악! 엄마얏! 그 소리를 듣자마자, 그녀의 가슴팍을 때린 남자는 번쩍! 어쩔 줄 몰라하며 짐승이라도 된냥 울먹인다. 헉! 내가 지금 무슨 짓을? 부디 죽여주세요. 내가 짐승이라서 찰싹하고 때려버렸어요. 잠시 미쳤나 봐요. 내가 왜 그랬을까? 어떻게 당신에게 그럴 수가. 귀신이 씌었나. 신데렐라님, 당신의 커트 볼을 루프 드라이브로 부드럽게 올린다는 게 그만 임팩트를 넣어 버렸어요. 그래서 전진 드라이브가 되었죠. 그것도 파워풀하게. 순간 내 상대가 당신인 줄 깜빡하고 공에만 집중했어요. 용서하세요. 뭐에 씌어서 내 상대가 험하디 험한 남자들, 거친 탁구장 남자들, 여타 나 같은 짐승들 중 하나인 줄로 알았죠. 착한 혜리 씨. 당신인 줄 정말 몰랐어요. 믿어주세요. 저를 용서하지 마세요, 라며 상대남이 손을 입에다 물고 괴로워하는데 그녀는 내색 한번 하지 않고


"나이스, 파이팅!"


하고 오히려 기합까지 외쳐준다. 혜리 씨는 어쩌다 나와 눈 마주치면 늘 웃어주는데, 한동안 웃어주기만 하고 정작 상대는 해주지 않았다. 나는 한 번이라도 그녀를 힘들게 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하수이니까. 그녀의 상대남이 되려면 랠리를 파워 있게 해서 압박하거나 게임에서 이기거나, 뭐 그런 게 필요했다.


그녀는 자신의 상대남으로 대개 5, 6부 남자들을 선호한다. 우리 탁구장에서 내 기준 5, 6부는 강자에 속한다. 7부 이하는 모두 대회 경력이 없다. 입상 경력 없이 아무리 잘해봤자 7부 능선을 넘지 못한다. 그에 반해 남자 6부부터는 대회 입상을 했다는 분명하고 명료한 차이가 있다. 한 번이라도 대회를 경험해본 사람들. 그들은 분명 다르다. 뭐가 달라도 다른 게 존재한다. 나는 5부 4부 3부 2부 1부 특 1부까지 상대해 본 경험이 있지만 그것은 이기자고 상대한 게 아니라 이벤트적인 의미가 크다. 어쩌다 손가락에 빗맞아서 들어가 득점이 나는 수준이랄까. 그래서 매번 아하하 웃고 마는 반짝 행사에 그친다. 






규옥이.

우리 구장에 6부.

구장 부수로 가장 먼저 6부로 승급한

삼십 대 초반 허규옥과 게임했다. 요즘 삼십 대 치고 이름이 다소 복고적이다 싶은데 80년대 삼성 라이온즈 선수와 같다. 오래된 6부이기에 나는 이기려고 덤볐다. 삼십 대의 힘 좋은 청년, 허규옥. 그는 하얀 얼굴로 온종일 탁구만 치면서 지냈다.(지금은 직장생활로 주말에만 온다) 처음에는 까짓 한부수 차이 아니겠어? 했다. 그는 범생이처럼 착하게만 보이는 인상이다. (투쟁적인 뭔가가 없었다) 뭐 유달리 큰 차이 있겠어? 했는데 6부는 역시 뭐가 달라도 달랐다. 

일단 드라이브다. 

저 밑에서부터 한참 끌어올리는 드라이브는 엄청난 회전을 가진 채 이쪽 테이블로 넘어왔다. 넘어와서는 테이블을 콩! 찍고 위아래 좌우 지맘대로 슝! 하고 라켓을 비켜가 버렸다. 아아, 그래, 그렇지, 이게 드라이브지. 우리 흔해빠진 7부 나부랭이들이 하는 드라이브와는 질이 다르다,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역시 규옥이. 남자다. 언젠가 탁구장 어르신이 말하길, (휴게실에서 규옥과 4부의 게임을 보면서) 녀석은 4부를 잡는 6부다. 올해 대회가 없어서 그렇지, 대회만 나가면 바로 우승할 놈이다, 하는 말이 떠올랐다. 4부 잡는 6부라. 취준생이라 탁구장에서 온종일 점심 저녁 야참까지 해결하는 녀석. 내 눈에는 취준생이 아니라 탁구대회 준비생, 즉 탁준생으로 보였다. 전설적인 이름. 허규옥! (작년 어려운 시험에 합격해 원거리 직장인이 되었다)


나와 게임 중, 규옥이가 드라이브를 걸려고 팔을 내릴 때부터 나는 움찔 놀라서 쳐다본다. 뭐야? 인마! 놀랐잖아! 너 방금 탁구대 아래서 팔을 어쨌어? 휙 올렸지? 움직였다고! 얼핏 봤어, 인마! 그래, 네 놈이 뭔가 굉장한 걸 빚어서 올려 보낸 걸 나는 안다, 안다고. 이제 곧 굉장한 놈이 올 테지? 얼마나 꿈틀거릴까? 이번엔 어디로 튀려나? 이 놈은 물고기인가? 상어인가? 돌고래인가? 예상을 못하겠다. 여긴가? 이쯤인가? 나는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 수비를 했다. 젠장 돌고래구나. 어정쩡 라켓을 갖다 대니 공은 하늘 높이 미끄덩 떠올라 엔드라인 아웃이 되어버리기 일쑤. 힘 좋은 녀석. 펄떡거리는 녀석. 돌고래 같은 힘. 오래된 6부와의 차이를 현저히 느낀 경험이었다. 

패배감과 열패감을 한껏 머금은 그림자가 드리운다. 미리 지고 들어간다! 는 말처럼 녀석 때문에, 상급자와 게임을 하게 되면 굽신굽신 꾸벅거리며 들어가게 되었다. 6부에게도 안되는데 하물며 5부, 4부에게 내가 비벼지겠어? 하는 심리, 자포자기다. 이게 되겠어? 돌고래는 내 낚싯대로 어찌해 볼 상대가 아니잖아? 겨우 리시브나 하고 퍼덕거리는 드라이브에 휘둥그레 허우적거리기만 할 뿐.


이후 계속 굽신거리자 어느 날부터인지 5부 4부는 내게 슬슬 가르침을 주기 시작했다. 발 보폭이 좁아요. 키가 있으니 더 넓게 벌려야죠. 이상하다. 분명 레슨실에서 코치님은 내게 보폭을 좁히라고 했다. 보폭이 넓으면 스탭이 안 나오고 자세가 뒤로 넘어간다고 했는데 웬걸 5부 4부는 그게 아니라고 했다. 나는 헤헤 웃으며 알겠다고 했다. 왜 팔로만 쳐요? 지금 팔 아프죠? 라고 묻길래 나는 멀쩡한 팔이 아프다고 했다. 그랬더니 내 그럴 줄 알았다 하면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중심이동을 해야죠. 몸통으로 치는 거야. 몸통으로 치면 두 시간을 쳐도 멀쩡해. 정말요? 그래요? 이렇게요? 내가 시범을 보이니 그들은 바로 그거야, 잘하네, 그렇게, 좋아, 라고 했다. 

찰싹! 

내가 친 공이 그의 뱃살을 강타했다. 그러자 그가 물었다. 지금 힘줬지? 라고 묻길래 네, 힘줬어요 하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내게 빨리 치려면 팔에 힘을 주는 게 아니라 백스윙을 좀 더 빠르게 하는 거라고 덧붙여 주었다. 그리고 힘을 주면 공이 상대 백핸드 쪽으로 쏠리는 거라 했다. 그립이 좀 이상한데? 자세를 좀 더 숙여야지? 드라이브는 라켓을 얼굴 앞까지 가져가는 거라고, 팔로우 스윙 몰라? 야구 안 해봤어? 저기 허규옥이 좀 본받으란 말이야. 얼마나 잘해. 너는 서브가 너무 쉬워. 어려운 걸로 하나 개발해야겠어.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언제부턴가 나는 그들을 피하게 되었다. 정말 피치 못하게 탁구장에서 그들과 나만 있어서, 고개를 돌리다가 그만 눈이 마주쳐버리는 아주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그들과 되도록 게임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물론 고수들과 게임을 계속해야 실력이 늘 테지만, 아직은 주눅만 들뿐이다, 라는 생각 때문에. 야생의 7부 세계에도 나보다 잘하는 은둔 고수가 버글버글한 현실. 이따금 등장해서 번쩍 칼날을 내려치고는 사라지는 얼굴들. 7부는 정파, 사파가 뒤섞인 인재 풀, 발에 채이는 게 7부, 숲 속에 수두룩 빽빽 존재하는 부수다. 구름 속 베일에 가려진 실력자들이 탁구장에서만 날고 기면서 정작 대회에는 나가지 않는 부수. 하긴 코로나 덕에 대회가 모두 취소되어버려서 숫자만 7부, 이름만 7부도 즐비하다.




나의 컨디션은 그 근본이 아주 얇아서, 들쭉날쭉하는데 어쩌다 들쭉 하는 날 운 좋게 혜리 씨와 만났다. 그러니까 병수 형을 이긴 그날, 병수 형이 심판 보고 나의 맞은편 상대자로 혜리 씨가 두둥, 서게 된 것이다. 내가 전진 드라이브에 처음 눈뜬 날. 힘 빼고 임팩트를 처음 시용해본 날. 어쩌면 스매싱보다 더 빠르고 강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무참하게 탁구공은 수없이 그녀의 가슴팍과 배와 어깨와 팔과 심지어 얼굴까지 찰싹, 타악, 따악, 철썩 시시각각 다른 소리를 내며 때렸다. 심판석에서 병수 형은 혜리 씨를 보고 말했다.


"혜리야, 게임 포기해라. 그냥."


그러나 혜리 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계속할 거예요."


혜리 씨는 벌게진 얼굴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면서 계속해서 서브를 넣었고 나는 리시브를 했다. 나는 항상 연습생이었다. 늘 그녀의 상대남이 되고자 연습하고 연습하는 연습생이 전처럼 커트로 받지 않고 어랍쇼! 선제를 걸어 넘겼다. 나의 상회전이 걸린 볼에 그녀가 얼결에 커트를 대니 공은 높이높이 떠올랐다. 차가운 이성. 그래야 정확한 판단. 나는 공만 보았다. 더 이상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으리라. 얼굴만 보면 바보가 되었던 나날. 이렇게 계속 바보로 남으면 영원히 간택받지 못할 거야, 하면서 눈물을 흩뿌리며 강력한 드라이브를 날렸다. 오른팔을 한껏 펴 뒤로 접고 접어서 동시에 왼쪽 발을 앞으로 내딛으면서, 온몸의 중심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눕히며, 타격하자마자 오른팔 하완이 접히면서 목에 슈루룩 감기고, 그야말로 최선을 다한 스윙! 공은 쌩 날아가 물수제비처럼 테이블에 튕겨 그녀의 뽀얀 살결을 강타했다. 어김없이 찰싹, 타악, 따악, 철썩 소리가 났다.


"너 지금 여자한테 너무한 거 아냐?"


라고 병수 형이 지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시키, 이 놈 공이 뭐 이렇게 세?"


라고도 했지만 역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한 번은 맛을 보여줘야 해. 그래 이게 필요했던 거야. 나도 강한 남자다, 라는 걸 알려줘야 해. 여성에게 폭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한 번쯤은 매를 꺼내야 한다고 나는 전근대적 관념으로 16세기 논리를 앞세우면서 무참히 라켓을 휘둘렀다. 이를테면 나쁜 남자의 맛이랄까. 여자들은 나쁜 남자에게 이끌린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나빠지기 위해, 비뚤어지기 위해 그동안 손가락에 살이 찢기고 굳은살이 박이도록 연습했노라. 탁구대 앞에서 가녀린 병아리는 필요 없어. 병아리가 아무리 크게 삐약, 이라고 소리쳐 날개 휘둘러 봤자야. 몰래 소리 없이 커다란 꿩으로 변해서 갑자기 펄럭! 하고 날개 한방 휘둘러주면 깜짝 놀라겠지. 꿩 날개 처음 봤냐! 푸드덕푸드덕, 세찬 먼지바람으로 상대는 눈감고 당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긴장할 테고. 나는 최선을 다해 그녀의 뺨이고 몸통이고 마구 때려주었다. 강해져야 관심받는다. 그것이 만고불변의 진리. 강한 남자만이 여자의 눈길을 받는 세태. 현실에서는 약한 남자도 잘생기기만 하면 모성애로부터 선택을 받겠지만, 탁구 세계에서는 어림 반푼 어치도 없다. 아무리 헐크 같고 바보 같고 노숙자 같은 차림이어도 강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최상위 상대로써 우러러보는 시선을 즐길 수가 있는 것이다. 아아,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람. 탁구 연습생이여, 그동안 많이도 울었도다. 


나쁜 남자로 변신하고 며칠이 지났다. 그리고 어젯밤 나는 혜리 씨에게 듀스까지 가는 세트도 있었지만, 결론은 세트 스코어 3대 1로 졌다. 그러자 그녀가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오늘을 기다렸어요. 당신에게 지고 얼마나 마음 졸였다고요. 어찌나 이를 갈았던지. 이제 마음이 편하네요. 다음에는 저에게 도전하세요."


나는 그 말을 듣고 내심 기뻤다. 나 때문에 이를 갈았다니. 마음 졸였다니. 저녁 8시가 되기 전 마지막 게임 상대자로서 나는 떳떳이 간택되어 3대 1로 진 것이다. 그녀는 저녁 밥하러 나서면서 살짝 뒤돌아보았다. 돌아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나는 중간에 그녀의 하회전 볼을 루프 드라이브로 올렸고 그때마다 카운터를 맞았다. 올릴 때마다 살살 올리자,라고 집중에 집중을 거듭하다가 요즘은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최대한 긴 스윙으로 올린다. 그러면 공은 회전을 먹어 그녀의 카운터 영점을 흔들어 댄다. 


때리는 맛. 가격하는 쾌감. 나는야 나쁜 남자. 뭐 어떠랴. 조용히 라켓에 새 러버를 교체하고 다시 만날 그날을 기다린다. 때려주고 얻어맞고 강력하게. 


그렇게 무연히 상대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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