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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Oct 14. 2022

아침의 황제 이대팔 가르마

황제님께서 밤의 탁구장에 친히 왕림하다.




라이벌.



늘 시작은 영삼 형과 함께다. 우리는 같이 성장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기거나 지거나. 카톡 날린다. 탁구장 고고씽. 나도 고고씽. 차 타고 간다. 앞다퉈 도착한다. 왔어? 왔습니다. 몸 푼다. 탁구는 혼자 할 수 없는 운동. 같이 탁구칠 이가 있음에 감사한다. 


포핸드 랠리를 주고받는다. 이어서 백핸드 랠리를 한다. 끝으로 커트 랠리까지 하면 몸 풀기가 마무리된다. 이제 게임을 시작한다. 게임은 몸풀기와 다르다. 이른바 겨루기다. 승부다. 승패가 나눠진다. 그런 게임에 심판이 없으면 뭔가 긴장감이 생기지 않는다. 심판이 없어도 되지만 심판이 있으면 여러모로 편하다. 심판은 우선 점수판을 넘겨준다. 일일이 점수를 호명하지 않아도 된다. (간혹 9대 0이나 10대 1처럼 큰 점수차가 날 때 이것을 굳이 호명하게 되면 이기는 자는 미안해지고 지는 자는 민망해진다. 다른 이가 들을세라) 게임하는 둘은 점수판을 보면서 밸런스를 조절한다. 살살해야지. 쫓아가야지. 심판은 게임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친다. 때로는 응원하는 관객이며 때로는 코치처럼 해설가가 되고 때로는 판사처럼 판정한다. 관객일 때는 마음 가는 이를 응원할 테고 코치일 때는 기술에 대해 조언한다. 판정할 때는 승부뿐 아니라 누구 실력이 더 나은지 판단한다. 이윽고 심판은 다음 차례 선수가 된다. 둘이서 게임하여 승자가 남고 패자는 심판과 자리 바꾼다. 심판은 승자를 상대로 게임하게 된다. 심판이 이기거나 승자가 이기거나 승부에 관계없이 다음 게임은 구심판과 신심판이 대결한다. 첫 게임의 승자는 두 게임 연속으로 치렀기에 마지막 심판이 된다. 이렇게 3파전이 완성된다.

 

*3파전(세 명이서 겨루는 전투) (탁구 게임의 보편적인 형태)


3파전을 기다린다. 최초 탁구대에 두 명의 선수. 둘이서 랠리 하거나 게임하거나. 그들이 제법 인기 있는 편이라면 탁구장의 탁구인들이 서로 앞다퉈 심판석에 앉으려 할 것이다. 인기는 꼭 고수라고 해서 높은 것은 아닐 터. 그렇다고 하수라고 해서 반드시 외면당하지도 않는다. 3자는 여러모로 고려한다. 고려해서 3자의 입장에서 한 번쯤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어야 할 것이다. 3자는 고수일 수도 있고 하수일 수도 있다. 이번에는 누가 앉을까? 영삼 형과 내가 랠리 한다. 랠리가 끝나기 전 누구라도 심판석에 앉아주오. 우리는 탁구 치면서 늘 누군가를 기다리는 입장. 심판이 오면 비로소 게임이 시작된다.

 



영삼 형과 랠리 하는데 4부 어르신이 심판석에 앉는다. 


어이쿠 어르신!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어르신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어르신은 작게 잡아도 60대 중반이 아닐까 싶었다. 내가 사십 대고 영삼 형이 오십 대니 사오육십 대가 함께 어우러지는 스포츠. 바로 탁구다. 실력으로 보면 초보에게 고수님께서 친히 방문하신 거다. 4부 어르신은 오랜 구력 펜홀더 실력자다. 적어도 탁구를 사십 년 이상은 쳤을 거라고 추정된다. 손목 스냅이 날카롭다. 드라이브와 스매싱도 예사롭지 않다. 외모가 단정한 편이다. 스마트한 인상의 어르신. 2대 8 가르마가 반듯한 신사. 눈빛이 늘 화난 듯 날카롭고 단호하다. 늘 입술을 꾹 다문 채 탁구로만 이야기한다. 말이 없는 편. 펜홀더 어르신을 한마디로 소개하자면 아침의 황제이시다. 어르신은 아침시간 탁구장에 오는 노년층 중 최강자다. 은퇴한 노년층에게 탁구를 가르치고 탁구 쳐주며 탁구 스승으로 대접받는다. 일전에 나도 아침에 갔다가 잠깐 가르침을 받았다. 


쇼트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가운데로 주라고. 가운데로 어정쩡하게 줘야 상대가 당황하지. 화백 전환에 혼돈을 줘야지. 그려 열심히 해야지. 다음에 또 가르침 줌세. 


노년층 중 여성 무리가 있는데 개중 진한 화장과 화려한 차림의 아주머니가 몇 계신다. 미모의 60대 아주머니들. 예쁘장한 미소라고 해도 될까. 그중 눈에 띄는 두 분. 관리받고 관리한 것 같은 외모. 한 분은 올림머리에 포인트 핀을 여러 개 꼽아 말한다. 나 이거 잘 못하는데 가르쳐 주세요. 앙 잘 모른단 말이야. 앙 어떡해 너무 세게 치면 무서워. 앙 혼내줘. 뭐 이런 스타일이다. 말씀 중 '앙'을 이따금 붙이시는데 '앙'이 자연스러울 연배가 아닌데도 '앙'이 그럭저럭 잘 어울리는 분이다. 연령에 관계없이 어느 세대나 존재하는 캐릭터. 귀여움을 유발하는 분이다. 또 한 분은 가지런한 단발 파마머리에 탁구를 무척 열심히 치는 스타일로 차근차근한 말투가 특징이다. 모범생 같은 이미지다. 두 분은 각기 공주님과 모범생 선생님이라고 불린다. 한 번은 아침 탁구장에서 만났을 때 모범생 선생님이 푸념처럼 한 말이 기억난다. 아침에 공주님이랑 둘이 칠 때 저 공주님 탁구가 너무 약해서 내가 세게 칠 수가 없다니까요. 어르신이 안 계실 때면 공주님이랑만 치거든요. 이렇게 남자분이 오셔야 마음껏 세게 칠 수 있으니 답답해서 원. 60대들의 세상. 공주님과 선생님은 4부 어르신을 사이에 두고 경쟁한다. 서로 같은 편 복식조가 되고자 한다. 앙 무서워요, 앙 난 약하니까 제 편 해주셔야죠 하면 어르신은 험험 굳은 표정으로 공주님 옆에 선다. 그러면 맞은편에는 모범생 선생님과 백발에 동글동글한 얼굴의 어르신이 같은 편으로 선다. 동글 어르신은 눈도 동글, 얼굴도 동글, 표정도 동글동글하다. 동글동글 웃으며 동글동글 땀 흘리며 탁구 친다. 동글 어르신은 여성들과 비슷한 실력이다. 남자 부수로 치면 대개 9부 언저리 초심부다. 따라서 최고수 4부 어르신이 주도적으로 게임을 리드한다. 동글 어르신과 모범생 선생님은 당하는 입장이고 공주님과 4부 어르신은 공격하는 입장이다. 게임을 그냥 하는가? 그런 법은 없다. 점심 내기를 한다. 늘 그렇듯 공주님과 4부 어르신이 이긴다. 그러면 동글 어르신과 모범생 선생님이 밥을 산다. 갈비탕이나 설렁탕, 삼계탕을 드신다. 식사 중 여성 두 분은 연신 탁구를 같이 쳐 주어 감사하다는 말을 침이 마르도록 한다. 누구에게? 4부 어르신에게. 동글 어르신은 옆에서 눈만 끔벅이며 동글동글 숟가락질을 한다. 4부 어르신은 전지전능한 포지션에서 두 여성에게 그려 그려 알았으니 식사하세요 라고 말한다. 앞으로 열심히 합시다. 이렇게 탁구 한 판으로 밥도 먹고 얘기도 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들의 밥 먹는 풍경. 언젠가 나는 룸으로 된 식당에서 설렁탕을 먹고 있었다. 룸에는 중간에 칸막이로 구분지은 두 개의 테이블이 있었다. 나는 한쪽 테이블에서 고개 숙이고 먹었다. 먹는데 옆 테이블에서 두런두런 익숙한 단어들이 들리는 게 아닌가. 탁구가 어떻고 탁구가 저떻고. 뭐라고? 탁구? 칸막이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야기로 봐서 그들이 누군지 확신할 수 있었다. 앙 이번에도 오빠 덕에 이겼어요. 앙 오빠가 최고야. 안 봐도 이 대사를 뱉은 이가 공주님이란 걸 알았다. 밖에서는 오빠로 통하는구나 싶었다. 탁구 더 잘 치고 싶어요. 탁구 공부하고 싶어요. 안 봐도 모범생 선생님 목소리라는 걸 알았고, 흠흠 매번 얻어먹기만 하는구먼, 더 열심히 해야지, 탁구는 말이야, 목소리는 4부 어르신이란 걸 알았다. 동글 어르신은 대사를 내뱉지 않았지만 국밥 그릇을 동글동글 벅벅 긁는 입체감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무슨 이야기를 하나, 귀 기울이니 역시 탁구 이야기였다. 어떻게 하면 더 잘 칠까. 남자들 드라이브를 어떻게 받아야 하나. 몸에 좋은 보약이 있던데 한번 잡숴보세요. 저기 어디에 맛있는 식당이 있다던데 가봅시다. 뭐 그런 이야기들. 나는 그때 영삼 형과 밥 먹고 있었다. 우리는 다 먹고 고개 숙여 나왔다. 들키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나왔다. 그들만의 리그, 그들만의 세상, 살짝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영삼 형과 내가 탁구 이야기를 나누며 밥 먹는데 어르신들도 탁구 이야기를 하며 밥 먹는다.   




그런 4부 어르신이 저녁 타임 탁구장에 나타났다. 


아침이 아니라 저녁에 두리번거리더니 우리 테이블 심판석에 앉았다. 우리가 엿들은 것을 알았을까. 떼끼 놈들 하고 혼내려고 왔을까. 고개 숙여 도망치던 모습을 봤을까. 2대 8 비율의 가르마. 하얗게 샌 머리와 검정 머리의 비율이 반반. 깔끔하게 빗질하여 한 올의 튀어나옴도 허락하지 않는 사나이. 늘 단호한 표정의 어르신. 앙다문 입술에서 마치 판사처럼 엄중한 판결이 나올 것만 같은 남자. 그러나 지금은 저녁시간. 해가 진 시각. 밤이 이슥한 때. 그래서인지 오빠의 모습보다 늙음의 기운이 깊게 보이는 것 같다. 주무실 시간이 다 되었을 터. 아침에만 봐서 그런가 저녁에 뵈니 왠지 낯설다. 황제가 학생처럼 보이는 건 나만 느끼는 것일까. 나는 재빨리 다가가 먼저 치라고 양보했다. 영삼 형과 어르신의 게임. 결론부터 말하면 영삼 형이 아주 손쉽게 3대 0으로 이겼다. 형의 드라이브를 어르신은 막아내지 못했다. 원래라면 승자와 심판을 보던 내가 붙어야 하는데 어르신이기에 배려했다. 이번에는 어르신과 내가 붙었다. 떨렸다. 작년까지 상대도 되지 않던 분이 아닌가. 그때 쉽게 보고 한 게임 청했다가 단호한 스매싱과 드라이브에 호되게 혼났던 상대. 강하구나. 역시 4부 펜홀더. 그 뒤로 도전한 적이 없었다.

 

어르신의 서브를 받을 수 있을까? 서브는 횡회전과 하회전이 고루 들어가 임팩트 있게 날아온다. 어떤 각도로 스윙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공이 다가온다. 주눅 든 습성이 깨어난다. 모르겠다. 패자의 습관. 실력이 뒤져서 지는 게 아니라 과거 계속해서 패하던 버릇이 깨어나 몸이 굳어진다. 어떡하나? 아니다. 이런 생각 떨치자. 영삼 형도 이겼지 않나. 벗어나자. 그냥 얇게 루프 스윙으로 받을까? 아니다. 섣부른 행동 하지 마. 결국 물러나 짧은 커트로 받는다. 일단 리시브에 성공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자 어르신은 3구를 커트로 넘긴다. 온다. 원하는 공이다. 나는 4구에 커트 드라이브를 건다. 공은 반대 회전을 먹어 무사히 넘어간다. 어르신의 카운터가 오버 아웃된다. 결론은... 3대 0 승리. 첫 게임이니까요. 한번 더 하실래요? 우리는 두 번째 3파전을 벌였다. 다시 결과는 삼빵과 삼빵이었다.      


어르신은 아침의 황제일 뿐 밤의 황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아침의 황제를 이긴 우리가 밤의 황제란 것도 아니다. 우리는 밤의 서민이다. 밤의 서민이 아침의 황제를 이겼다. 아침과 사뭇 다른 밤. 탁구장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드나든다. 아침에는 노년층이 오고 낮에는 주부들이 온다. 저녁에는 직장인들이 온다. 하루에도 몇 번씩 탁구장 분위기가 바뀐다. 주체가 달라진다. 탁구장의 밤. 4부 어르신은 내가 황제인데,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는 표정으로 우리뿐 아니라 다른 테이블에도 연신 심판으로 들어간다. 들어가 내내 털린다. 가지런한 이대팔 가르마가 들썩거린다. 머리칼 몇 올이 하늘로 쭈뼛 서고 몇 올이 이마로 내려온다.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던 단정한 머리칼인데 머리칼이 여기저기 삐죽거린다. 어르신은 황망한 얼굴로 어느 테이블 심판석에 앉아있다가 쳐다보니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 듯 급한 일이 있다며 심판을 보다 말고 탁구장을 나선다. 


이날 이후 저녁에 어르신을 본 적이 없다. 듣기로 여전히 아침의 황제로 정정하시다고 한다. 


아침의 어르신은 공주님과 모범생 선생님, 그리고 동글 어르신이 있을 때 황제로서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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