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머피 Oct 21. 2022

승리의 방식을 선택하기

혜리 씨와의 대결




나의 라이벌 혜리 씨.



며칠 전의 일이다. 

혜리 씨와의 게임에서 지고 곧바로 내가 말했다.


"우리 한게임 더~ 해요."


그러자 혜리 씨가 답했다.


"아니죠! 그리 말하면 안 되죠. 도전한다고 해야지!"


나는 당황했다. (앞 게임에서 지면 도전자의 위치로 급락한다는 혜리 씨만의 논리)


"아, 그, 그렇지. 도, 도, 도전!"


"네~ 그 도전받아줄게요."


젠장. 도전이라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챔피언의 위치였는데.


지난주에는 2인 1팀 단체전이 있었다. 그때 나는 영삼 형과 한 팀이었고 혜리 씨는 상대편이었다. 라켓을 탁구대 아래로 가져가 (숨겨서) 위아래 섞어 상대팀과 동시에 올렸다. 각자의 상대를 정하기 위함이었다. 각각 위에 있는 라켓의 주인이 일전을 벌일 상대로 정해졌다. 혜리 씨의 상대는 나였다. 그때 별안간 혜리 씨의 입에서 터져 나온 함성.


"꺄아~~~~~~!!"


자신의 상대로 내가 걸리자 마치 복권에 당첨이라도 된 거 마냥 좋아하는 고함. 영삼 형보다는 내가 쉽다는 건가? 내가 쳐다봐도 너무 좋아 어쩔 줄 모르는 혜리 씨의 미소. 감추지 못하는 웃음. 환한 표정. 허허! 내 신세가 어쩌다 이리되었을까? 나는 미치도록 사력을 다해 게임에 임했다. 지지 않으리라. 그러나... 또... 졌다. 젠장. 또...




맞대결마다 게임에 쏟아붓는 품이 다른 이와 비교해 족히 3배 정도는 더 드는... 라이벌. 

그래서 힘들다. 집중해야 한다. 집중하지 않으면 나락으로 떨어진다. 자존심이 걸린 혜리 씨와의 승부. 우리는 비슷한 시기에 만나 함께 성장해 더 높은 곳을 보며 향하는 맞수. 우리만의 특이한 패턴. 서로 간 게임에 이기면 고수가 된다. 진 자는 그때부터 하수가 된다. 이담에 다시 만날 때 하수는 고수에게 한 게임 청한다. 고수는 흔쾌히 응한다. 어험, 한 수 가르쳐 주지, 하면서 너털웃음과 함께 상대해준다. 왜? 아직까지는 내가 이긴 상태니까. 그러다 내가 지면 나는 곧장 하수가 된다. 반대로 혜리 씨는 고수가 된다. 이후 나는 왠지 그녀를 우러러보게 되고 그녀는 승자의 여유를 뿜으며 또 다른 고수를 찾아 떠나버린다. 나는 황망한 심정으로 자리에 남겨진다. 젠장 졌구나. 그냥 집에 갈까? 아니야. 이대로 가면 승부에 져서 화난다고 집에 간 것처럼 보일 텐데... 아무래도 못 가겠다. (패배의 상실감으로부터) 괜찮은 거처럼 연기해야 하는 시간. 어쩌다 졌을까? 패자의 심정을 누가 알리. 아무도 모른다. 황제의 자리에서 일반 백성 계층으로 내려온 것과 사뭇 비슷하다. 이제는 내가 도전해야 해. 도전자의 심정. 이루어놓은 게 없는 자의 현실. 쓸쓸하다.


그래서 질 때 어떻게 지는지 체크해본다.  


그녀가 서브를 넣고 내가 리시브를 한다. 그녀는 주로 역회전 서브를 한다. 역회전 서브에 커트와 횡회전을 섞는다. 어떨 때는 횡회전만 있고 어떨 때는 커트량이 많다. 시시각각 변한다. 마치 생물 같다. 움직이는 생물을 때마다 어떻게 달래야 잘 넘어갈지 녀석의 표정을 살피고는 아하 요렇게 재주를 부리는구나 하고 툭 쳐서 넘긴다. 아하 저런 재주도 부릴 줄 아네 하면서 커트로 넘긴다. 괴상망측한 재주를 부리면 발끈해서 드라이브를 건다. 복잡하다. 리시브 종류가 너무 많다. 어떻게 받아야 할까? 그냥 단순하게 한 가지로 받고 싶은데 상대는 단순하지가 않다. 이 놈의 리시브를 못하면 공이 붕 떠서 찬스 볼을 준다. 그러면 그녀는 라켓을 고쳐 잡고 스매싱을 때린다. 요즘따라 어찌나 파워가 센지 수비하려고 라켓을 갖다 대면 핑! 맞고 하늘로 붕 떠버린다. 제대로 맞추기조차 힘이 든다. 그녀는 살찐 거 같지도 않은데 대체 어디서 저런 파워가 샘솟는지? 밥은 안 드시고 장어만 드시나요? 결론은 그녀의 스매싱을 받아내기란 불가능하다는 것. 스매싱을 맞지 않으려면 방법은 단 하나. 올바른 리시브를 해야 한다는 것.


그녀의 역회전 서브는 생물처럼 변한다. 


1. 역회전 각에 맞춰 라켓 면을 비스듬히 대각으로 맞춘다. 

그녀의 커트 볼을 풀어 민 볼로 보내는 것이다. 리시브하는 입장에서는 안전하지만 어쩐지 불안할 때도 있다. 만일 그녀가 맘먹고 때리면 그냥 꽂히는 거다. 때리지만 않으면 내게도 민 볼로 돌아와 내가 공격하기에 좋지만 똑똑한 그녀가 선제를 내줄리 없다. 


2. 포핸드 커트.  

이건 그녀의 서브가 짧을 때에 주로 통한다. 포핸드 커트를 하려고 기다리는데 긴 서브가 오면 붕 뜨게 된다. 포핸드 커트를 생각하고 리시브를 하려다 다른 리시브로 임기응변이 가능하려나? 기껏해야 루프밖에 없다. 그것 역시 회전이 덜 들어가면 그대로 3구 선제를 내준다. 


3. 백핸드 커트.

백핸드 커트는 초보시절 내 리시브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것밖에 없었다. 초보시절의 리시브 방법이어서 이 리시브로 받으면 뭔가 오래전부터 내재된 열등감이 꿈틀거린다. 어느 때부터 아무리 탁구가 안되어도 백핸드 커트로는 받지 않을 거야, 라고 맘먹었다. 백핸드 커트로 받기만 하면 상대는 날아다니곤 했다. 냅다 3구를 때리는데 나는 찬스 볼만 주는 것 같아 언젠가부터 이 리시브를 쓰지 않았다.


4. 드라이브. 

한방 드라이브가 되지 않는 이상 회전만 살짝 주는 드라이브는 그녀에게 3구 선제를 주기 딱 좋은 리시브다. 2구 리시브로 한방 드라이브를 꽂는 건 열에 한두 번뿐. 2구 한방은 10대 3 정도로 크게 이기고 있을 때나 준비할만하다. 그만큼 성공확률이 떨어진다. 멋지기야 하겠지만 효용성이 없다. 따라서 걸어봐야 약한 드라이브 정도다. 약한 드라이브는 맨 공과 다를 바 없다. 내가 드라이브를 거느라 돌아섰기에 그만큼 더 왼쪽으로 빠져있다는 약점도 생긴다. 그녀가 3구를 그대로 내 포핸드 방향으로 밀면 나는 멀찍이서 따라가지도 못하고 공 주으러 가야 한다. 에너지 소비도 크고 체력도 떨어진다. 


얼마 전부터 나는 리시브의 효율을 따지기 시작했다.


체력소모가 가장 작은 움직임이다. 움직임을 최소화하자. 손목으로 깔짝 각 맞춰 받는다. 상대의 커트는 대각으로 맞춰 민 볼로 풀어 보내되 되도록 얕게 오른쪽으로 뺀다. 오른쪽으로 빼면 상대는 돌아서지 못하고 백핸드로 받을 수밖에 없으니 강타 허용 비율이 낮아진다. 그리고 상대의 긴 횡회전&커트는 백드라이브로 받는다. 이때 커트량이 많아 보이면 백핸드 커트로 응수한다. 초보때의 리시브라 되도록 쓰지 않으려 했지만 외려 오래도록 사용해 감각이 최고 좋은 리시브이기도 하다. 최대한 얕고 커트가 많이 걸리게 보낸다. 그러면 상대가 3구 스매싱이나 드라이브를 걸기에 아무래도 그 커트량이 부담이 될 터. 


엊그제 혜리 씨와 3번 붙어서 3번 다 이겼다. 


그때 손목으로 깔짝거리며 받았다. 


다리는 고정해서 움직이지 않았다. 각 맞춰 보내든지 커트로 받았다. 그러니 혜리 씨는 3구 스매싱을 날리다 네트에 꽂히는 실수를 했다. 실수가 반복되었다. 나는 민 볼과 커트 볼을 섞어 2구 리시브를 보냈다. 민 볼일 때는 스매싱이 꽂히고 커트일 때는 꽂히지 않았다. 이따금 커트 볼도 커트 치기가 되어 꽂히기도 했다. 그러나 실수 빈도는 일정했다. 동시에 일정하게 득점했다. 


쇼트 대결을 정면으로 하지 않았다. 그녀의 쇼트는 최강이다. 나는 쇼트 랠리를 할 때 이쪽저쪽 코너웍을 했다.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쇼트를 하다 중간에 확 돌아서서 때리기란 어렵다. 뭔가를 걸어야 한다. 쇼트 랠리는 쇼트만 하기 편하다. 편한 것을 버리고 포핸드로 때리는 것은 득점을 위해 실점을 배팅하는 거다. 때려서 아웃될 수도 있고 성공할 수도 있다. 가만히 쇼트만 하고 있으면서 상대가 먼저 실수하지 않을까 기다리는 건, 어쩌면 보수적인 태도, 수동적인, 방어적인 플레이다. 버티면 되지 않을까. 그러면 그녀가 먼저 돌아서는 거다. 어느새 돌아서서 포핸드로 강력한 스매싱을 날리는 거다. 그럼 나는 스매싱을 맞고 까무룩 전사한다. 그걸 원하나? 아니요.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담 자네가 먼저 돌아서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죠. 그러네요. 남자니까 먼저 승부를 걸어야겠습니다. 방향을 트는 승부를 걸든지 여의치 않으면 돌아서서 때리는 승부를 건다. 실점을 배팅해 공격한다. 그렇게 득점했다.


선제공격하는 쪽이 이긴다.


수비보다는 공격이다. 수비하다가 이기는 거보다 공격하다가 이기는 쪽이 더 좋다. 그러면 더불어 공격 스킬도 갈고닦아진다. 게임은 고스란히 경험으로 남는다. 경험은 공격 성공률을 높인다. 아무래도 공격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정말이지 지고 싶지가 않다. 섣부른 공격은 자멸을 부른다. 각오하고 공격하는 거다. 게임에 지면 하수가 된다. 하수가 되어 고수를 우러러보고 싶지가 않다. 


오늘은 제가 도전할게요.

혜리 씨가 말하며 도전해온다. 나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한다.


네, 도전을 받아줄게요.

그런데 내가 게임에서 지면?


도전하고 싶은데 혜리 씨는 더 위쪽에 고수를 찾아 벌써 떠나고 없다. 덩그러니 탁구대 앞에 서서 저 안쪽 고수들끼리 게임하는 방향을 본다. 라이벌이 떠나고 없다. 집에 갈까, 하는 생각이 바람처럼 머리칼을 흔든다. 버텨야 한다. 집에 가면 안 된다. 이기고 가야지 지고 가면, 져서 화나서 삐져서 간 거라 치부될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쳐다본다. 애써 웃는다. 괜찮다는 표정 연기를 한다. 역시 힘들어. 이것이 바로 라이벌과의 일전에 


3배 정도는 쏟아부어야 하는 이유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상과 실제는 다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