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머피 Oct 24. 2022

힘 빼고 자세 낮추고

효진 씨와 우람이




이름은 효진 씨. 


키 크고 빼빼 마른 여인. 사십 대 중반. 아이들이 초중에 다니는 가정주부다. 


여보, 있잖아요, 마스크 잘 끼고 치면 되지 않을까요? 절대 안 벗을게요. 사람들 많은 저녁시간 말고 낮시간에만 갈게요. 아시잖아요? 우리 탁구장 시설이 일대에서 가장 넓고 깨끗한 곳이란 거요. 낮에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어요. 


그러자 남편이 반문한다. 


아무도 없는데 누구랑 쳐? 


그동안 묵묵히 듣던 남편은 늘 안돼, 안돼, 안돼, 라고 답했다. 그렇다고 굴복할 수는 없다. 효진 씨는 남편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부쩍 늘어난 작년부터 오늘날까지 극진히 극진한 요리를 만들어 대령하고 있다. 


어떠시와요? 서방님? 오늘 당신이 좋아하는 전골 요리를 만들어 보았어요. 


음~ 맛있군. 


어머~ 정말요? 내일은 또 무얼 드시고 싶으신가요? 제가 만들어 바칠게요. 


그녀는 지난겨울 매일같이 극진히 살았다. 

그 결과 마침내 탁구장에 복귀할 수 있었다. 남편이 종종 야간 근무에 들어가면 저녁에도 왕왕 등장한다. 저녁에 등장하면 저녁 타임 사람들과 만난다. 


한번 붙어볼까요? 잘 부탁합니다. 


그녀의 주 무기는 스매싱이다. 이른바 커트치기라 한다. 내가 다소 긴 커트를 보내면 냅다 스매싱을 날려준다. 스매싱은 나의 포핸드 방향으로 쭉 뻗어온다. 그 스피드를 본 뒤에 반응하기란 무리다. 미리 예상하여 따라가야 겨우 받아넘긴다. 미리 준비해도 디펜스가 어렵다. 어떡하지? 관건은 스매싱 칠 기회를 주지 않는 것. 그러나 그녀도 그것을 준비한다. 어려운 볼도 어떻게든 스매싱을 날려본다.


설마? 내가 커트 볼을 아주 살짝 넘겼는데, 찰싹! 젠장 또 맞았다. 스매싱이다. 스매싱을 맞는 순간 마치 뺨을 맞는 것처럼 공을 따라 시선과 고개가 돌아가지만 몸은 따라가지 못한다. 기습적으로 따악 맞은 거 같은 느낌. 그녀가 때리면 피하지 말고 맞아야 하는 숙명. 남자는 그저 공 주으러 갈 뿐. 어떻게 그리 자신 있게 휘두를 수 있는지? 놀라운 건 스매싱의 성공 확률이 비교적 높다는 거다. 미스터리다. 큰 키와 긴 팔로 성큼성큼 다가와 마구 휘두르는 스매싱. 어느새 주춤주춤 물러서는 나. 남편에게는 극진하지만 그 외 남자들에게는 가차 없이 냉혹한 여인. 찰싹찰싹 양쪽 싸대기를 날려버리는 여인. 나는 양쪽 싸대기를 맞고 얼굴이 벌게져서야 자세를 숙인다. 게임 중 내가 지고 있을 때면 


"에이, 또 봐주신다, 봐주시는 거 다 알아요" 


하면서 연속 스매싱을 날리는 여자. 결코 봐주는 게 아니라고 항변해 보지만. 어쨌거나 나는 그녀에게 핸디 3점을 주고 시작한다. 재밌다. 그녀의 스매싱을 맞아도 재밌고 받아 내어도 재밌고 질 수 있다는 불안감도 재밌다.    




이름은 우람. 


사십 대 초반 남자. 

일단 말이 많다. 그리고 자세가 독특하다. 열심히 레슨을 받고 있지만 레슨으로 다져진 자세가 아니다. 말하자면 레슨으로 자세를 고치는 중이다. 중간에 말이 하도 많아서 입으로 탁구를 친다. 휘말리기 쉬운 특성이 있다. 우람이는 자신과 탁구 치는 상대를 철저히 분석한다. 게임 중에도 분석하고 게임 후에도 분석한다. 상대의 컨디션이나 집중하는 정도를 단박에 알아낸다. 그리고 그것을 말로 드러낸다. 


형이 이쪽으로 줄줄 알았어요, 어디서 감히, 하면서 냅다 드라이브를 날린다. 쇼트는 내가 더 강하잖아요, 어디서 쇼트 싸움을 걸어와요, 하면서 쾅! 파워 쇼트를 날린다. 아아, 휘말린다. 녀석이 분석을 끝내기 전에 게임을 끝내야 하는데. 마음이 점점 바빠진다. 조급해진다. 차츰 긴장되면서 지면 어떡하지, 지면 끝이다,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땀이 비처럼 쏟아지고, 이마에 땀을 손등으로 훔친다. 


왜 그리 땀을 흘려요? 얼굴은 또 벌게져갖고. 녀석의 심리전에 휘말린다. 스코어가 막상막하일 때 녀석은 급격히 말수가 줄어든다. 그만큼 집중한다는 뜻이다. 자신이 서브 넣을 차례가 되면 혹여 집중력이 흐트러질까 싶어 손가락으로 공을 달라 까딱까딱거린다. 말이 없는 순간 녀석은 고도의 집중력으로 승부를 걸어온다. 때때로 버릇없는 행동이지만 지금 녀석이 최고조로 집중하고 있구나 생각이 들어 우선 응대해준다.


그러다 내가 네트나 에지로 점수를 얻으면 그게 다 내 전술 때문이라고 투덜거린다. 


또 네트에 걸려 점수 먹네. 아아, 말리면 안 돼, 


라고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우와 이번엔 에지로 점수 내네. 사람도 아니다. 진짜. 너무해. 제발 실력으로 상대 하이소, 


라고 말한다. 나는 에지를 고의로 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닌데 자꾸 에지를 고의로 낸 거처럼 말하면 대체 나더러 어쩌란 말인지? 어쩔 때는 에지를 자유자재로 내는 실력이 있는 것 같아 녀석에게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나는 어쩌자고 에지로 점수를 냈는가. 


미안하구나 우람아!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말해보지만 이상하게도 다시 에지로 점수를 먹는다. 역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꼭 일부러 그런 것처럼 미안하구나 우람아, 그런데 이번에도 점수를 내지 못했다면 내가 지는 거잖니? 하고 반문하게 된다. 나는 결코 일부러 에지를 내지 않았는데 일부러 낸 고수가 되어 언제나 3대 2의 세트 스코어로 녀석을 꺾는다. 내게 진 우람이는 화가 나 라켓을 집어던지고 그냥 집에 가버린 적도 있다. 아아, 순수한 녀석. 단순한 녀석. 언제나 웃음을 자아내는 우람이다.


언제고 녀석에게 한 번 진 적이 있다. 


녀석에게 지면 탁구장 내 모든 이에게 금세 소문이 난다. 


우람이에게 졌대. 미쳤어. 아니 누가? 어떻게 우람이에게 질 수가 있지? 미쳤나 봐. 왜 그랬대? 


이런 소문이 돈다. 탁구장에서 이른바 이슈가 된다. 그리고 말 많은 녀석은 나를 볼 때마다 나보다 하수, 라고 놀린다. 


형은 나보다 약해. 봐요, 한계가 뚜렷하잖아요. 


나는 어쩌자고 녀석에게 졌을까. 이후 설욕전으로 기억한다. 지면 안된다는 강박. 녀석의 로빙볼에조차 나는 과감해지지 못했다. 아아, 무서워, 지면 끝장이라는 생각. 띄워주고 물러서고 띄워주면서 녀석의 실수만 기다렸다. 과정이야 어떻든 이기면 그만이었다. 이기면 녀석은 다시금 순종적으로 돌아온다. 


형, 저랑 한게임만 쳐주세요 


하면서 귀여운 동생이 된다. 순수한 녀석. 단순한 녀석. 이렇듯 다소 버릇이 없지만 그만큼 열정적이라는 뜻이니, 내가 결코 지지만 않는다면 뭐,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대신 죽어도 지면 안된다. 지면 말 그대로 멘털이 붕괴돼버리니까. 녀석에게는 탁구가 곧 일상의 전부인 것 같다. 회사일이 끝나면 늘 탁구장으로 출근하는 녀석. 고수에게도 한게임만 해달라 주저 않고 부탁하는 녀석. 관장님에게도 콕 집어 나를 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공략을 묻는 녀석. 아아, 나는 녀석이 좋다.  


우람이를 만나면 마치 시합에 나간 것처럼 집중할 수 있어서 나는 녀석이 참 좋다.




이제 내가 심판을 볼 차례. 


효진 씨와 우람이가 붙는다. 이들은 라이벌이다. 건곤일척의 승부. 배수의 진을 치고서 서로를 견제한다. 다음에 다시 붙을 때까지 누가 위고 아래고가 정해지기에 절대 물러설 수 없다. 여기서 지면 음료수를 사야 한다. 3파전의 마지막 게임. 나는 빅게임의 심판으로서 그들과 인사한다. 인사하면서 한마디 날린다. 


우와, 빅게임이잖아. 자자, 힘 빼고 자세 낮추고, 파이팅! 


이라 말했다. 가위 바위 보. 효진 씨가 이겼다. 효진 씨가 침을 꼴깍 삼킨다. 우람이가 탄식한다. 큰일 났다, 라고 굳이 입 밖으로 말하며 자신의 심리를 표현한다. 단순히 효진 씨가 서브를 하는 건데 뭐가 큰일 났다는 거니? 아무튼 효진 씨가 서브를 준비한다. 서브를 넣기 전 상대의 리시브 준비상태를 힐끗 본다. 상대가 리시브 준비를 하는지 확인하고서 비로소 서브 동작에 들어간다. 공을 하늘로 띄우기 직전, 한 번 더 효진 씨가 우람이를 쳐다본다. 그러다 푸핫! 웃음이 터져버린다. 왜 그러나 돌아보니, 우람이가 자세를 너무 낮춰서 탁구대 위로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어디 갔어? 우람아! 어디 갔니? 


내가 말하자 효진 씨가 배를 잡고 웃는다. 


아하하! 우람 씨 너무 한 거 아니에요? 사람이 안보이잖아요. 자세를 너무 낮춰서. 진짜 나랑 붙을 때 제일 열심히 하시는 거 같아요. 


가만 보니 우람이는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라켓을 앞으로 잡은 상태로 탁구대 지평선 높이에 맞춰 안경 낀 눈을 부라리고 있다. 그만의 집중력이 최고조에 이른 자세. 녀석은 흔들리지 않는다. 


자, 뭐하세요? 어서 서브하세요. 


아아, 이놈의 진지한 승부사들이란.


라이벌이 있어서 참 정다운 탁구장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작은 탁구장 불이 꺼지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