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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Oct 27. 2022

탁구 리그전 처음 나간 날(2)

도전하는 초보





세 번째 상대. 


근육질의 사십 대 반 펜홀더

상체가 우람하다. 드디어 임자 만났다는 느낌이 쫙 왔다. 얼굴에 여드름이 거뭇거뭇 있는데 왠지 여드름에서 고수의 오로라가 피어났다. 어쩐지 탁구장에서 탁구만 쳤을 것 같은 인상이다. 이를테면 월남에서 강줄기를 따라 조용히 전진하는 군인 같은 이미지, 즉 월남 병사 같다. 머리도 스포츠머리다. 지금은 과묵하게 사람의 형체를 띠고 있지만 언제라도 짐승의 이를 드러낼 것만 같은 포스. 탁구칠 때와 탁구 치지 않을 때가 다른 얼굴.


이봐 친구! 주말인데 바깥에 나가 햇볕이라도 좀 쬐지 그래라고 묻는다면, 괜찮수, 일 없수다, 탁구장에서 온종일 탁구만 치겠수다, 라고 대답할 것만 같다. 아아, 오랫동안 햇볕을 보지 못한 것만 같은 저 피부. 기름이 잘잘 흐른다. 군데군데 곰팡이가 핀 팔뚝. 한마디로 거칠다. 피부야 어찌 되건 말건. 거친 사십 대 중반의 남자. 와일드하게 트럭을 몰 것만 같은 야성미. 팔뚝에 핏줄이 꿈틀거린다. 아직 자신이 이십 대인 줄로 아는 남자. 얼굴에 세월을 거스르는 투쟁심이 보인다. 남자는 힘이지. 힘만 키우면 끝이지. 피부 따위야 내 알 바 아니요. 남자답게 힘으로 어디 붙어 봅시다, 하는 눈빛. 이글이글 타오른다. 일주일 내내 씻지 않았을 것 같은 군인의 얼굴. 평생토록 세수 한번 안 했을 것 같은 야수의 얼굴. 부담스럽다. 이보시게, 이제 겉모습도 생각해야 할 나이가 아닌가, 라고 전하고 싶다. 


명단에 보니 역시 5부다. 주워듣기로 그는 강 5부라고 했다. 5부라는 명칭 앞에 '강'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강'은 5부 중에서도 센 부류를 가리킨다. 센 부류니까 어쩌면 그 위에 4부 끄트머리, '약'4부라고 칭해도 될 것만 같다. 4부에 비벼도 이상하지 않은 부수, 그것이 곧 강 5부다. 내게는 강하디 강한 5부라 들린다. 5부의 '5'자만 들어도 침이 꼴깍 넘어가는데 거기다 '강'이라니. 지금 장난치니? 난 이제 막 7부 언저리에 도달한 초짜일 뿐이라고. 너무한 거 아니니? 라고 옆에 심판을 쳐다봤지만 심판은 0대 0에서 월남 병사에게 서브권을 주고 게임 시작을 외칠뿐.  


어떤 서브가 올까? 

나는 자세를 숙여 상대를 쳐다봤다. 그의 서브는 특이했다. 손목을 안으로 굽혀 YG 서브 형태로 횡회전을 주었다. 그것도 길고 빠르게, 바운드도 크다. 리시브를 결대로 잘 받아봐야 떠오를 수밖에 없다. 그러면 그대로 3구 스매싱을 꽂아버리는 고수. 내가 리시브하니까 바로바로 꽂아버린다. 나는 놀라서 아이고 깜짝이야 하면서 공만 주워다 바친다. 함정을 파놓고 빠지기만을 기다리는 야수. 놈은 짐승이다. 짐승처럼 달려와 내 허벅지살을 덥석 물어뜯고는 그대로 달아나버리는 나쁜 짐승. 놈은 소리 없이 강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며 수색 중이다. 일주일 내내 씻지 않은 군인. 씻을 새가 없다. 수색 중에 걸리면 그대로 냅다 꽂아 버린다. 그리고는 다시금 그물을 쫙 치고는 걸려들기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내내 씻지 않는다. 노리기만 한다. 걸리면 끝이다. 걸리기 싫은데 그물은 어김없이 내 몸을 덮는다. 나는 이리 퍼덕이고 저리 퍼덕이는데 문제는 계속해서 퍼덕거리기만 한다는 것이다. 물속에서는 한계가 있다. 


놈은 맞상대를 해서는 안 되는 유형이다, 라고 느꼈다. 말로 해서는 알아들을 놈이 아니다. 저놈의 서브를 어찌 받아야 하나. 함정과 그물이 날아온다. 정말이지 리시브가 힘들어서 한참을 헤맸다. 쇼트로 받으면 네트에 박고 백드라이브로 끄집어 올려도 네트에 박기에 이번엔 커트로 받자 공이 하늘로 훨훨 떠 아예 탁구대 밖으로 나가 버린다. 라켓 각을 맞춰서 미니 워낙 빠른 공 스피드의 충격 때문에 역시나 떠오르고. 그래, 이에는 이, 나도 서브 임팩트는 자신 있단 말이다. 대뜸 오기가 생겼다. 그래, 어디 내 강서브도 한번 받아보아라. 네놈이 아무리 짐승이라도 이것만은 이빨로 낚아채지 못할 터. 네놈의 벌린 입 어금니를 강타해 줄 것이다. 내 그물도 받아보라지. 걸리면 그대로 날려줄 것이다. 하나씩 하나씩. 새하얀 옥수수가 출장 가는데도 어디 웃을 수 있나 보자. 그래 벌려라. 나를 그리 우습게 보았더냐. 목구멍이 다 보이는구나. 저놈의 깔딱거리는 목젖 가운데에 강타해줄 테다. 나는 복수심에 불타 올랐다.


준비된 3구 공격이다. 

어디 보자. 입을 꽉 다문채 나는 라켓을 대각으로 눕혀서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강하게 임팩트를 주어 휘둘렀다. 슝! 소리 한번 시원하구나. 계획대로라면 공은 비스듬하게 러버에 스치며 쏘아져야 했다. 상대를 놀라게 해야 했다. 그러나 공은 안타깝게도 라켓 모서리에 맞았고 모서리에서 튕겨나간 공은 또다시 테이블 모서리에 맞았다. 모서리와 모서리를 만나 공은 미증유의 폭발적인 스피드를 얻어서 알 수 없는 각도로 되돌아와서 내 왼쪽 눈을 퍽! 하고 강타했다. 어깨에 힘을 빼야 하는데 부담 때문에 힘을 빼지 못했다. 그래서 각도 조정에 실패했다. 미친! 내가 친 공에 내가 맞다니. 순식간이었다. 순간 별이 반짝거렸다. 하얀 별이 찰나에 번쩍이더니 서서히 사라졌다. 이것은 마치 어릴 적 눈싸움하다가 딱딱한 얼음 뭉치에 눈퉁이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을 주었다. 탁구 시합 중 갑자기 어릴 적 추억을 소환하다니. 거기다 몇 년 전 어린 딸의 잠투정 섞인 발길질(발뒤꿈치)에 자다가 눈퉁이를 맞은 것도 생각났다. 맞아서 별이 반짝거렸지만 화낼 수 있는 대상이 없는 것도 같았다. 나는 어디에 하소연해야 하나. 아파도 아프다고 아아~라고 계속해서 소리칠 수 없는 현실. 답답했다. 하나도 안 아픈 척. 넘어져서 피가 콸콸 흐르는데 안 아픈 척 벌떡 일어나 자연스레 걸어가야 하는 상황. 그러나 사방에서 한꺼번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푸하하하! 주변에서는 와하하하! 환상 서브다! 하고 소리치며 휘파람을 불었다. 다들 저만 보고 계셨나요? 휘익~휘익~ 심판도 웃는 중에 "괜찮으세요?"라고 물어왔다. 안 괜찮지만 괜찮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탁구공 표면 입자 중 하얀 가루 서너 개가 눈동자 안으로 들어갔는지 눈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손등을 갖다 대자 눈물이 나왔다. 모욕적인 순간, 나는 슬픈 눈물을 닦고 다시 서브를 넣었다. 힘을 빼자. 제발 힘을 빼자, 중얼거리며 서브를 넣었다. 


눈물이 마를 즈음 게임은 끝났고 3대 0으로 졌다. 2연승 뒤 1패. 힘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졌다. 깔끔하게. 월남 병사는 짐승 주제에 마치 사람인 양 악수 대신 주먹을 청했다. 전투 중일 때와 아닐 때가 확연히 구별되는 사람. 주먹을 부딪칠 때 나는 보았다. 놈의 어금니가 반짝 거리는 것을.  




네 번째 게임. 


다소 뚱뚱한 체격의 오십 대 중반 아저씨. 

머리에 흰 머리띠를 두르고 나왔다. 아저씨는 바짝 무릎을 구부려 탁구대에 가까이 착 붙어서 있다. 낮게 자세를 숙이고 탁구대에 바짝 붙은 스타일. 그는 게임 내내 신중하다. 진지하게 게임에 임한다. 그리고 집중한다.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게임에 집중한다. 차분하다. 덜렁거리지도 않고 가만히 기다리지도 않는다. 색다른 스타일. 준비된 태도. 언제 어느 때 어떤 공이 날아와도 유연히 대처할 수 있게 고개를 숙인다. 숙여서 15도가량 올려다본다. 전방을 향해, 내 가슴팍 쪽으로, 라켓면을 쏘아본다. 쏘아보는 눈빛이 문득 뜨겁게 느껴진다. 내 몸은 어느새 얇은 신문지가 된다. 아저씨의 눈빛에 신문지는 까만 점이 생기더니 이내 구멍이 뚫리고 불이 붙는다. 불이 번져 신문지가 탄다. 신문지는 어느새 재가 되어 공중으로 떠오른다. 흩뿌려진다. 게임에 말린다. 


아저씨는 숨소리도 내지 않고 커트, 커트, 커트를 날려 보낸다. 공에 커트량이 어찌나 많은지 나는 섣불리 손대지 못하고 역시 커트, 커트, 커트로 응답했다. 그러나 아저씨는 노련한 커트의 장인. 커트에도 품질이 있다면서 자꾸만 각을 바꾸고 회전도 다르게 길이도 바꿔서 명품 커트를 보내준다.


아이고 저 돈 없습니다. 이렇게 비싼 커트라니요. 그냥 싸고 쉬운 커트 좀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하면서 나는 번번이 헛손질을 했다. 상대의 귀하고 비싼 커트에 수준 맞춰서 똑같이 보내지 못하고 싼 것으로만 응답하다 보니 계속해서 네트에 처박혔다. 때로는 테이블 밖으로 아웃되기도 했다. 아저씨의 고품질 커트는 내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혼수가 너무 부담돼서요. 우리 집 형편이 좀 어려워서요. 나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커트에 지고 지고 또 지다가 생각했다. 그래, 이렇게 질 수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 라고 마음먹었다. 무심결에 떠오른 생각. 앞서 눈퉁이에 너무 주눅이 들었구나. 벌써 패배감에 익숙해지면 안 돼. 깨어나야 했다. 초반의 2연승을 생각하자. 그것만으로도 이미 대단한 성과가 아닌가. 마음을 비우자. 커트가 웬 말인가. 더구나 이 판은 오늘의 마무리 게임. 원래는 다섯 번째 게임을 해야 했지만 마지막 팀은 출전인원이 모자라 기권한다고 했다. 오늘의 마지막 게임을 이렇게 망칠 수는 없다. 


나는 마스크를 고쳐 썼다. 

커트만 하는 것도 치욕인데 커트에 지면 그 충격이 얼마나 크겠는가. 바꾸자. 비로소 아저씨의 커트를 드라이브로 받기 시작했다. 해보자, 시도해보자 하면서 나는 돌연 스타일을 확 바꿔 게임에 임했다. 대신 최대한 각을 열어서 회전을 걸었다. 


무릎 아래로 팔을 쭉 펴고 힘을 뺀다. 오른쪽 무릎을 구부려서 가만히 볼을 응시한다. 끝까지 노려본다. 놓치지 않는다. 순간 지금이다! 명령과 함께 골반이 왼쪽으로 뒤틀린다. 뒤틀림과 동시에 무게중심도 왼쪽으로 급격하게 옮겨간다. 배가 당긴다. 근육이 꿈틀거린다. 그 뒤에 자연스레 팔이 뒤따라오며 '비이이~ 싸아아안~'소리를 내며 마찰한다. 뭔지 모르지만 비싼 게 틀림없다. 하회전을 상회전으로 바꾸는 작업. 마치 채찍을 휘두르듯 팔은 보이지 않게 번쩍 빛과 함께 머리 위로 오른다. 스냅을 준다. 묻혀 준다. 채 준다. 그렇다. 임팩트다. 그제야 공은 뒤늦게 두둥실 떠오른다. 


제가 누구냐구요? 저는 비싼 드라이브예요. 이 커트 드라이브를 배우려고 투자한 레슨비가 얼만 줄 아세요? 라고 말한다. 그리곤 네트를 사뿐 넘어간다. 아저씨는 당황하면서 라켓을 갖다 댄다. 공이 찬스 볼이 되거나 네트에 꽂힌다. 커트보다 비싼 드라이브. 


1, 2세트를 먼저 내준 나는 열심히 커트 드라이브를 걸었다. 두꺼울 필요도 없다. 얇게 아주 얇게 맞아도 회전만 많으면 되었다. 그것을 아저씨가 받아내어도 괜찮았다. 그다음엔 나 스스로 약속한 스매싱이 있기에, 준비된 한방 드라이브가 있기에, 두툼한 아저씨의 뱃살에 연신 강타를 꽂았다. 공은 찰싹! 소리와 함께 잘도 들어가 주었다. 확 바뀐 공격에 아저씨는 당황했다. 당황하면서도 계속 커트를 넣었다. 나는 얼씨구나 하면서 커트 드라이브를 걸었다. 실패해도 괜찮았다. 지더라도 걸다가 져야 잘 지는 거라고 앞서 코치님이 말해 주었다. 지면 잘 지는 거고 이기면 대박이고 그러니 내가 드라이브를 걸지 않을 이유가 없다. 열심히 퍼 올리는데 심판이 손을 들었다. 기적적으로 세트스코어 3대 2, 역전승이다. 하하하. 


이렇게 나는 첫날 4게임 중 3승 1패를 기록했다. 정말 감격의 도가니였다. 영삼 형과 꺽다리도 함께 기뻐해 주었고 우리 탁구장 응원단도 환호해 주었다. 


"너 인마, 이렇게나 잘하다니." 


나도 내가 대견했다.




나는 아내에게 카톡을 보냈다. 오늘 전적이 무려 3승 1패라고, 믿기냐고? 당신 남편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러자 곧장 우리 남편 최고 멋지네, 잘했다, 근데 저녁에 대청소는 언제 할 거야? 라고 카톡이 왔다. 마냥 기뻤다. 흥분된 마음 감출 길이 없어서 사람들과 저녁을 먹었다. 먹으면서 영삼 형과 키득거렸다. 설령 내일 다 지더라도 괜찮다고 떠들었다. 


첫 출전에서 3승 1패. 

이것의 의미는 컸다. 나도 어엿한 생체 탁구인이 된 것인가, 하는 자부심. 내가 통하는구나 하는 자신감.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 그것으로 족했다. 집에서 청소하라는 아내의 말도 과감히 무시했다. 나는야 자신감 넘치는 탁구 선수. 밤이 늦어서 청소기를 돌리면 윗집 시끄러워서 안돼, 라고 말했다. 그리고 컨디션이 무너지면 어떡할 거냐고 덧붙였다. 특히 오른팔이 피로하면 안 된다고 호소했다. 내 오른팔은 백만 불짜리 팔. 지금 팔에 이 감각 겨우 담았는데 흔들리면 큰일 난다고 설명했다. 나는 물도 왼손으로 마셨다. 무거운 물건은 죄다 왼손 몫이 되었다. 혹시 오른팔, 오른손이 다치면 안 되잖아? 부지불식간에 힘줄이 놀라는 사태가 일어날지도 몰라. 맥주병이 담긴 봉투도 왼손으로 들고 차 문도 왼손으로 닫았다. 운동화를 신는데 뒤꿈치를 벌릴 때 손가락도 왼손가락을 넣었다. 호오 호오! 슥삭 슥삭! 나는 오른손에 입김을 불어서 닦고 고이고이 아꼈다. 내일 대회가 다 끝나면 평소 하던 거보다 두 배로 깨끗하게 하꾸마 약속했다. 



그렇게 두 번째 날을 맞이하고 게임에 들어가는데. 

드디어 우려했던 장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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