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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Oct 27. 2022

탁구 리그전 처음 나간 날(1)

디비전 리그




"원래 나가기로 한 사람이 부상당했대...

 니가 대타로 나갈래?"


영삼 형이 물었다. 

영삼 형은 탁구장에서 급격히 친해진 이들 중 한 명이다. 


바로 옆 테이블에서, 한동안 서로를 의식하고 지켜보다가, 저 정도면 3대 2 정도로 질 수 있겠다, 해서 내가 도전했고, 형 입장에서는, 너 정도야 내가 3대 2로 이길 거라 해서 도전을 받아주었다고 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역시나 내가 3대 2로 졌지만 어쩌다 3대 2로 이기는 날도 있었다. 컨디션에 따라서 우리는 이기고 지고를 반복했지만 3대 0이라는 스코어는 쉬 나오지 않았다. 거의 3대 1에서 3대 2의 박빙. 때문에 우리는 초스피드로 친해졌다. 하루는 이기고 하루는 지는 사이. 가장 이상적이다. 탁구장에서, 직장에서, 가정이나 연애 사이에서, 삶과 죽음 사이, 아무튼 근래에 무척 친해져서 믿고 따르는 형이다. 


영삼 형은 부드러운 인상에 늘 베푸는 천사 같은 사람. 

예컨대 누구라도 목이 마르다 하면 기꺼이 지갑을 열어 음료수를 뽑아 준다. 요즘은 현금을 잘 소지하지 않는 시대지만 탁구장 휴게실에는 현금을 넣어야 응답하는 자판기가 있다. 관장님은 박스째로 음료를 사다가 자판기를 관리한다. 창고에는 음료 박스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음료 가격은 죄다 천 원. 관장님은 운동하는 최종 소비자의 편리를 위해 동전의 불편함을 고려했음이 분명하다. 평소 오백 원하는 레쓰비도 천 원이고 박카스도 천 원이다. 게토레이도 천 원이고 주스류도 천 원이다. 갈아 마신 배도 천 원이고 아삭아삭 사과즙도 천 원이다. 이른바 천 원짜리의 전성 시대~ 여기는 천 원을 가진 자가 형이다. 자판기는 천 원짜리만 들어간다. 영삼 형은 늘 지갑에 천 원짜리를 수북이 넣어 가지고 다닌다. 그리고 지켜본다. 누구라도 휴게실에 들어와 설핏 자판기 쪽을 봤다면 그것을 놓치지 않고 일어난다. 

음료수 마시고 싶구나? 음료수 한잔 하지? 

아 아닙니다. 

아냐 아냐 벌써 돈 넣었어. 

아 그럼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영삼 형이 자판기에 지폐를 넣으며 묻는다. 뭐 마실래? 저기 그럼 밀키스요. 그러면 밀키스를 뽑아 그의 손에 들려준다. 누구라도 휴게실을 기웃거리면, 형은 따박따박 지폐를 넣는다. 어이, 방금 이쪽 봤지? 아닙니다, 안 봤습니다. 아니야, 봤잖아? 음료수 마시고 싶어 그러지? 아닙니다, 목 안 마릅니다. 아니야, 벌써 넣었다, 얼른 와서 마셔라. 


멀리서 관장님은 흐뭇하게 그 정경을 바라본다.


형은 음료수만 베푸는 것이 아니다. 칭찬도 아끼지 않는다. 내가 본디 가진 실력보다 과분하게 칭찬을 한다. 넌 나보다 잘해. 넌 저 사람과 이 사람에다 그 사람도 이길 거야. 전부 내가 이긴 사람들이거든. 무엇보다 넌 나를 이겼으니 자신감을 가져. 저번에 졌다고 아직도 질 거라 여겨서 지레 포기하고 게임에 들어가면 안 돼. 고개 들어. 넌 네가 생각한 거보다 월등해. 


상대를 월등하게 만들어 주는 사람. 


바로 영삼 형이다. 이름도 삼삼하니 얼마나 정다운가. 그런 영삼 형이 말했다.    


"어쩔 수 없다. 너뿐이야." 


영삼 형도 누군가의 대타로 시합에 출전하기로 된 마당에 또 한 명 빠졌다고 했다. 


"너만 한 실력자가 없어. 너 요새 공 정말 좋아졌더라." 


정말이지 최초에 신청했던 멤버들은 다 무슨 생각들이람. 신청만 하고 시합에는 출전할 수 없다니. 그 덕에 영삼 형이 뽑혔고 이윽고 내게로 손길이 뻗쳐왔다. 마음이 흔들렸다. 최초 멤버 중 또 한 명이 부상이라고 했다. 최초 멤버는 한 명만 남았다. 그래서 최초 멤버 하나와 영삼 형, 그리고 나머지 한 자리. 얼결에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영삼 형과는 비슷한 실력이라서 깨져도 비슷하게 깨질 것이고 이겨도 비슷하게 이기리라 여겼다. 이를테면 희생과 도전 사이. 


대회에 나가서 어쩌면 첫승 하는 게 아닐까? 그러면 대박이잖아? 아냐, 마음을 비우자. 그냥 내 위치가 어디쯤인지 시험이나 해보는 거지. 영삼 형도 나가는데 뭘, 영삼 형이 자기보다 내가 세다고도 했는데 뭘.

 

막상 대회에 나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마구 떨렸다. 자칫 망신당하는 건 아닐까. 한 세트도 못 이기면 어떡해. 탁구장 사람들이 대회 성적을 다 들을 텐데. 상상하니 덜덜덜 손가락 끝이 떨렸다. 휴우 휴우.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다잡았다. 할 수 있다. 영삼 형도 나가는데 뭘. 영삼 형이 있잖아. 나는 착각하고 있었다. 모든 기준을 내 맞수 영삼 형에게만 맞추면 안 되는 것을. 우리는 이미 서로에게 익숙하다. 반면 불특정 이를 상대하는 데 있어서 영삼 형과 나는 또 다를 것이다. 영삼 형은 기본 실력이 비교적 탄탄하여 사람을 타지 않지만 나는 낯선 이를 탄다. 그렇지만 역으로 생각하여 낯선 이를 나만 탈까? 낯선 이를 타는 다른 누군가와 만난다면 우린 똑같이 낯섦을 타는 것. 그러면 조건은 같다. 그렇게 나는 무한 긍정으로 나의 첫 대회 참가를 합리화하고 있었다.


'디비전 시리즈 T4' 


이번엔 5부, 6부, 7부가 참전한다. 핸디가 없는 대회다 보니 아무래도 5부가 가장 유리하다. 평소 같으면 7부인 나는 5부에게 핸디 3점을 받고 게임에 들어갈 터. 아무렴 핸디 3점을 받아도 5부가 어려운데 하물며 무 핸디로 게임이라니. 더군다나 나는 공식적인 시합이나 대회에 참여한 경험이 없다. 말 그대로 초짜. 햇병아리 중의 햇병아리다. 저는 삐약이예요. 무서워요. 살살해 주세요. 아파요. 그렇게 세게 치면 어떡해요.  


코치님은 말했다. 

삐약이들의 특징으로, 평소 잘하던 드라이브를 막상 대회장에서는 긴장감 때문에 팔이 안 올라간다고 조언했다. 나 같은 삐약이는 우선 팔부터 과감히 올려야 한다고 했다. 암튼 7부는 7부끼리 붙어야 하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나 누구에게 하소연하니? 가령 7부에서 6부는 1년, 6부에서 5부는 2년, 5부에서 4부는 될까 말까 한 차이가 난다고 했다. 그런데 대회라니? 탁구 대회에서? 그들과 맞붙는다니? 급했다. 뭐라도 정보가 필요했다. 급하게 유튜브에서 가까운 지역대회 7부 결승을 찾아보았다. 7부들의 결승을 본 소감은 한마디로 웃겼다. 스텝이라곤 없이 한가운데 서서 (어쩌면 얼어붙어서) 영혼 없는 포핸드와 쇼트만 주고받던 7부들의 모습. 나는 참 쉽다 쉬워, 하면서 보았다. 그러면서 저런 플레이도 대회장이란 걸 감안하면 잘하는 거지, 라고 돌려서 생각해보았다. 보기엔 쉬워 보여도 실제는 다르니까. 아무튼 그게 내 수준인데 갑자기 5부라니. 디비전이라니. 아아 내가 실수했구나. 참가한다고 하지 말걸. 디비전? 공포의 5부에게 디비디비 딥, 정말 디비전에서 디비질지도 모른다.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1대 빵으로 지면 어쩌지? 세트 3대 빵은 또 어떻고? 그러면 딥 임팩트, 그 충격을 나는 극복할 수 있을까. 동네방네 다 소문날 텐데. 어쩌면 영원히 라켓을 놓을지도. 누군가의 놀림감이나 손가락질을 받으려고 탁구 치는 것도 아닌데. 


영삼 형님! 포기하고 싶어요, 갑자기 바쁜 일이 생길 것 같아요, 했더니 아뿔싸, 늦었단다, 이미 신청 명단에 올라갔다고 한다. 바꾸기엔 늦었다면서, 3명에서 5명까지 신청할 수 있는데 형과 내가 속한 팀은 형과 나와 꺽다리, 이렇게 딱 세명뿐이라, 토일 이틀간 치러지는 게임에 누구 하나 빠질 수가 없다고 한다. 팀당 세명은 무조건 출전. 하루에 평균 5게임. 이틀간 열 게임. 미쳤다. 어쩌지? 어쩌나? 걱정에 잠 못 드는 날들은 어느새 다 지나가버리고.




드디어 시합 당일 아침. 


탁구장 사람들이 덕담을 해준다. 나더러 우황청심환을 먹고 가면 좋다고 한다. 조심할 건 쪼개서 반알만 먹으라고 한다. 한알 다 먹으면 몸이 느려져서 공 스피드를 따라가지 못하는 부작용이 있단다. 그래서 나는 식칼을 꺼내 반으로 쪼갰다. 그리곤 껍질을 벗겨 질겅질겅 씹어 꿀꺽 삼켰다. 부엌에서 청심환 먹는 나를 보면서 아내가 말했다.


"당신 차라리 기권을 해. 대체 어쩌려고 그래? 탁구 초보 주제에. 것보다 매주 토요일 아침은 대청소하는 시간이란 거 잊었어? 집에 청소하고 가!"


아내의 눈에 내가 얼마나 처량해 보였을까. 탁구 대회 걱정에 일주일간 잠을 설치던 남편.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자다가 갑자기 오른팔로 툭툭 스윙을 하지 않나. 꿈에서도 드라이브 연습을 하는 삐약이. 


"왜 자면서 자꾸 사람을 쳐?"


라고 말하던 당신. 보다 못해 안쓰러워서 저런 말을 해주는 거겠지? 눈밑에 다크서클이 내려앉아서 축 처진 어깨로 라켓을 들고 있는 나. 나는 기권할 수 없는 형편을 설명하고 대청소는 저녁에 돌아와서 꼭 하겠다고 말한 후 마침내 집을 나서 대회장으로 삐적삐적 향했다.


대회장에 도착하니 우리 팀원인 영삼 형과 꺽다리(동호)가 1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외 처음 보는 탁구인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 탁구장으로 가는데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자니 대개 오십 대가 수두룩한 특성. 꼬질꼬질한 등산복을 입은 오십 대. 시커먼 얼굴. 담배 냄새를 풀풀 풍기며 감지 않은 머리를 벅벅 긁는 중년의 남자들. 그러한 모습에서 나는 알 수 없는 경외감을 느꼈다. 그래 이것은 고수의 냄새. 고수의 오로라. 초보가 감히 이런 모습을 풍길 수는 없다. 나 같은 초보는 새벽부터 샤워하고 머리를 곱게 빗어 나왔거늘. 아내가 섬유유연제를 뿌려 세탁 건조하여 고이 접은 새 탁구복을 입었거늘. 초고수들은 지하 탁구장에서 십수 년 똑딱거리며 닦은 비주얼, 희뿌연 연기가 형광등의 불빛인지 담배연기인지 분간되지 않는 공간, 매캐한 냄새, 그 아래서 영겁의 세월, 탁구만 친 사람들. 탁구가 곧 취미요 특기이자 전부다 라는, 나는 그들과 맞붙는 거다. 감히 내가? 우리가? 하룻저녁 3게임만 해도 땀범벅이 되어 헥헥거리면서? 


형과 동호와 나는 사이좋게 7부다. 탁구에 정식 입문한 지 1년 남짓. 7부는 7부일 뿐 6부나 5부가 아니다. 6부나 5부가 아닌데 6부와 5부랑 시합을 감히 대등히 하려고 이렇게 친히 달려왔노라. 핸디 없이 핸디 없이 핸디 없이, 그것도 처음 보는 사람이랑 어떻게? 아아 다시 걱정이 앞선다. 나는 처음 붙는 사람에게 약한데. 어느 정도 게임도 많이 해봐야 그 사람 약점도 알고 대처방법도 생기는 것을. 하긴 나랑 붙는 사람도 내가 처음이니 입장은 동등하다. 그러나 나는 탁구 시작한 지 이제 1년. 그중 열심히 친 나날은 최근에 석 달 정도. 레슨은 넉 달. 취미로는 3년. 직장에서는 최고수. 허나 현실 탁구장에서는 초보중의 왕초보. 나는 왜 초보가 되어 여기 이곳에 서 있는가. 중수나 고수가 되어 그저 편안하게 내려다보고 싶거늘. 어째서 이 나이에 사서 고생을 하는지.


드디어 참가하는 이들이 모여서 단체사진을 찍고 호명되는 팀부터 게임이 시작되었다. 

우리 탁구장 사람 몇몇이 와서 응원도 했다. 낯선 곳에서 같은 탁구장 사람을 보니 어쩐지 낯설다. 반갑기도 하고. 


다들 마스크를 끼고 게임에 임한다. 숨이 차 마스크를 코밑으로 내리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심판들이 제지했다. 


"마스크 올리세요." 


선수들은 심판 눈치를 보며 마스크를 내렸다 올렸다 했다. 


"서브 토스도 올리세요." 


그놈의 올리라는 말 좀 그만. 숨 차. 호흡은 가빠지고 와중에 게임에는 집중해야 하고. 떨리는 가슴 진정하려면 심호흡이라도 내쉬어야 하는데. 


단체전이라 먼저 게임 순서를 정하는 오더 용지에 이름을 기입해야 했다. 누가 1번 할래? 동호가 1번, 형이 2번, 내가 3번. 매번 이런 식으로 순서를 정했다. 실력으로는 영삼 형이 최고였기에 우리 팀 에이스가 상대팀 에이스랑 붙어 깨지면 곤란하니 동호가 1번으로 나가 상대팀 에이스한테 깨지고, 2번으로 형이 나가서 1승 1패를 만든다. 그러면 3번인 내가 지든 이기든 승부를 보는 작전. 나는 찬성했다. 무조건 1번만 아니면 된다. 이기고 지고가 문제가 아냐. 망신을 피해야 해. 아무렴 1번은 싫어, 라고 했지만 게임이 진행되면서 보니까, 차츰 상대팀의 에이스가 누군지 약자가 누군지 알게 되었다. 물론 오더지에 이름을 적을 때는 상대방 리스트를 보고 적는 게 아니기에 딱 맞출 수는 없지만 속닥속닥 분석을 했다.

 

아, 저는 저기 저 한없이 약해 보이는 분이랑 붙고 싶어요. 나 저분이랑 붙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제발요. 내 눈에도 그런 게 보였으니 상대방도 날 가리키며 말할 테지? 저기 저 얼굴이 멀끔하니 잘 생긴 분은 내 거야, 라고. 내가 3 대 빵으로 깨주겠어, 라고? 아무튼 여기 지방 도시 열두 개 팀은 게임을 치르면서 지켜보면서 서로의 전력을 파악하고 전략을 짜 게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팀 승리는 내 안중에 없었다. 그저 망신만 당하지 않게 하소서, 가 관심사였다.




그러던 중 드디어 첫 시합. 

동호가 1번으로 나갔다. 내가 치는 것도 아닌데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선 것처럼 떨렸다. 동호 파이팅! 이라고 박수를 쳤다. 떨리는 마음에 떨림을 멈추려고 힘차게 쳤다. 동호는 뒤돌아보며 씩 웃었다. 용감한 녀석. 미안하다. 선봉에 세워서. 혹시 11대 빵으로 지면 모른 척할게. 같은 팀이 아닌 척. 잘 가라. 멀리 나가지 않으마. 꺽다리 동호의 상대는 6부다. 지겠지? 질 거야 했지만 막상 게임이 시작되니 꺽다리는 선방했다. 급기야 3대 2로 역전승. 어어 어떡해? 어어 하다가 게임은 끝났고 꺽다리는 해맑게 웃었다. 갑자기 동호의 얼굴이 빛나 보였다. 이제 2번 영삼 형까지 이기면 우리 팀이 1승 하는 건데? 미쳤어. 점점 떨렸다. 우리가 1승이라니? 그러나 2번 형은 상대팀 에이스를 만나 장렬히 깨졌다. 상대팀도 에이스를 2번에 배치한 것이다. 나보다 강한 형이 저리 깨지다니. 이제 결정타는 3번 선수에게로. 3번 선수는 바로 나. 대회라고는 나가본 적이 없는 초보 중의 초보. 삐약 삐약! 아무리 햇병아리의 울음을 구슬피 들려주어도 피할 수 없네. 삐약! 


같은 탁구장에서 응원하는 이와 상대팀들의 견제 속에서 나는 바들바들 떨었다. 삐약! 


첫 상대는 사십 대 후반의 펜홀더. 


그것도 6부. 시합 경험이 아주 많아 보이는 얼굴. 스포츠머리. 시커멓고 노련해 보이는 눈빛.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정말 잔인할 것만 같은 느낌. 알 수 있었다. 놈은 내가 약자란 것을 알게 되면 심장까지 파먹을게 뻔하다. 나는 나대로 작전을 세웠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영삼 형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누가 대신 쳐줄 수 없는 게 탁구가 아닌가. 오롯이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 실력이 비슷해도 전술 대응은 모두가 제각기. 나는 최악의 사태를 방지하고 싶었다. 11대 빵에서 4점까지는 피하자. 지더라도 잘 져야 그나마 욕을 듣지 않는다. 11대 4 이하로 지면 뭔가 안쓰럽고 불쌍하고 가련한 마음이 드니까. 11대 5 이상으로 져야 한다. 최소한 5점은 내고 지자. 그게 내 작전이었다. 5점 못 내면 정말 고개를 들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 나만의 사면초가 마지노선 한계점이 5점이었다. 5점만 따자. 마음을 비우자. 이기려고 생각하면 일을 그르친다. 제발 5점만. 점수 딸 수 있는 포인트만 생각하자. 힘을 빼자. 


마침내 가위바위보를 하고 나는 테이블이 아니라 서브를 택했다. 내가 가장 잘 넣는 서브란 무엇인가. 벼락같은 반회전 반커트. 임팩트를 크게 주어서 상대 백핸드로 보낸다. 길고 강하고 거칠게. 조금 전 몸 풀 때 쇼트에서 자꾸 실수하던 나. 것도 작전이었다. 상대는 날 몇 수 아래로 본 게 틀림없다. 그러다 나의 첫 서브를 보더니 흠칫 내 얼굴을 올려다보며 놀라는 게 아닌가. 앞서 몸 풀 때 주고받던 이가 맞는가, 의심하는 눈초리다. 물론 몸 풀 때는 살랑살랑 주었지. 실수도 연발해주었다. 놈은 자꾸만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눈동자가 커다래지며 놀라는 눈치.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강서브를 날렸다. 암시하자. 나는 사실 강자다. 강하다. 고수다. 할 수 있다. 


상대가 엉겁결에 받은 높다란 리시브를 기다렸다가 3구 스매싱을 때렸다. 공은 멋지게 들어갔다. 득점했다. 성공이다. 우리 탁구장에서 하던 플레이가 여기서도 통한다는 놀라움. 다행이라는 생각과 안도감이 동시에 들었다. 이윽고 내가 날린 공을 멀리 주워서 다녀오는 상대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짐을 봤다. 나는 그 점을 노렸다. 상대가 당황한다. 당황할 때 잘하는 척 자신 있게 스윙해야 한다. 코치님께 배운 것처럼, 스텝과 중심이동도 잊지 말자. 자칫 내 밑천을 드러낸다면 놈은 그곳을 송곳처럼 파고들지 모른다. 들키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서 나는 상대의 서브에 대비해 미리 몇 가지 원칙을 만들었다. 낯선 이의 리시브는 정말이지 공포 그 자체이기에 그것은 대비책이자 가정이었다. 이른바 가정법. 일단 바운드가 튀어서 오면 쇼트로 받자.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백드라이브다. 하지만 나는 백드라이브가 미숙하다. 미숙한 백드라이브지만 최대한 공을 끌어올려야 한다. 겉으로는 그게 쇼트로 보이겠지. 그러나 내 딴엔 백드라이브다. 커트가 섞인 상대의 서브를 어떻게든 튕겨서 끌어올려야 한다. 그게 포인트다. 내가 하는 건 백드라이브지만 실제는 쇼트, 결론은 선제를 걸어야 한다. 


또 하나, 공이 낮게 깔려서 오면 오른쪽으로 기울여 반커트 반회전으로 리시브해야 해. 백 쪽으로 휘어지게 최소 각은 맞춰야지. 물론 이것은 상대가 역회전으로 서브할 경우다. 그런데 쇼트와 반커트 리시브가 여의치 않을 때는? 결국 드라이브다. 커트 드라이브. 강하지 않게 살며시 감아야 한다. 어쨌거나 이건 리시브니까. 강하게 걸면 실수한다. 부드럽게 각 열어서 넘겨야 해. 


나는 열심히 리시브하고 스매싱을 날렸다. 내가 약자로 보이니? 약자지만 철저히 강자인 척 위장하는 전술. 말하자면 탁구 10년은 친 거 같은 건방짐. 그러다 심판이 나를 불렀다. 결과지를 내밀더니 나더러 사인하라고 했다. 아직 게임 중인데 왜 사인하라고 그러지? 하면서 들여다보니 내가 3대 0으로 이겼다고 적혀 있었다. 그제야 다시 손이 떨렸다. 내가 3대 0으로 이겼다니 믿을 수 없었다. 뒤에서 우리 팀 영삼 형과 동호가 환호성을 질렀다. 그 소리를 듣자 실감이 났다. 온몸의 털이 기립하는 느낌. 한 단계 올라선 기분. 그것은 차라리 변신이었다. 물이 수증기로 변하는 것. 구름으로 변하는 것. 초초 사이어인이 되는 것. 인간이 도를 닦아 성인이 되는 것.   


어쨌거나 팀 첫 승이자 개인적으로도 첫 승. 


"와! 대단한데? 잘했다, 잘했어!" 


우리 탁구장에서 응원 온 사람들과 코치님도 환호해주었다. 


"생각 이상인데?" 


짜릿했다. 하이파이브를 하는데 손끝에 전율이 왔다. 제정신이 들었다. 나는 공손히 상대 선수와 악수하며


"잘 배웠습니다"라고 말했다. 경기 후 서로 간에 눈 맞춤. 상대는 나를 보면서 아직도 강자를 우러러보는 눈빛이다. 알 수 있었다. 내가 수없이 강자와 대적하며 올려다보던 마음과 같은 반짝임. 


주위 사람들이 우리 팀을 보고 강적이라고 했다. 첫 시합 첫 게임에서 승리. 쭈뼛쭈뼛 뭉클하고 어떤 커다란 것이 차오르는 느낌. 이런 기분이란, 직접 해봐야 안다.




승부는 단체전이지만 결국 개인 대 개인 맞대결로 귀결된다. 

내가 이겼느냐 졌느냐, 그것이 중요했다. 팀이 이기면 좋고 져도 그만. 어차피 다음 라운드를 기대하고 간 게 아니었다. 11대 5 정도로만 지면 되듯 팀도 2승 3패 정도면 좋았다. 


나의 두 번째 상대는 윗머리가 없는 아저씨였다. 


이른바 뚜껑이 없는 머리. 탁구 치며 얼마나 고심했기에? 탁구는 역시 어려운 스포츠다. 아저씨는 사십 대 후반. 구력이 상당해 보이는 포스. 상대의 빈틈을 반드시 파고들 것만 같은 노림수. 얼굴에 살이 쪽 빠진 게 그래, 가가멜을 닮은 얼굴이다. 이 글을 그 가가멜 아저씨가 볼 확률은 낮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과감히 가가멜을 닮았다고 하는데 실제 가가멜 역시 뚜껑이 없는 머리가 아닌가. 가가멜은 옛날 스머프 만화에 나오는 악역으로 수프를 끓여 그 속에 스머프를 넣어 먹으려고 한다. 매번 실패하지만. 그의 고양이 이름은 아지라엘. 고양이도 어딘가 심술궂다. 아저씨, 노련해 보이는 당신의 표정에서 어딘가 고약한 인물과 빗대자니 가가멜이 담방 떠올라버렸어요. 제 자유의지가 아니랍니다. 죄송합니다. 가가멜 아저씨. 아저씨를 가가멜이라 불러서요. 이 담에 또 어떤 대회가 열리면 우리는 마주치겠지요. 그땐 제가 음료수를 바칠게요. 


나는 바짝 얼어서 가가멜의 서브를 받았다. 포핸드로 살짝 흐르는 커트 볼. 역시 살짝 루프 드라이브로 넘기니 상대는 어김없이 대각선 카운터 스매싱으로 쉽게 쉽게 공격한다. 다 계산된 플레이다. 3구를 노리는 서브였다. 몇 번을 그리 당하니 오기가 생겨났다. 나는 좀 더 강하게 임팩트를 주어 넘겼다. 차츰 상대의 스매싱이 무뎌졌고 그렇게 랠리를 이어갈 수 있었다. 


나는 이 대회에서 스스로 다짐한 게 하나 있는데 아무리 실력이 미천하고 모자라더라도 할 수 있는 건 하고 나오자, 였다. 할 수 있는 건 딱하나. 포핸드 스매싱이다. 정확히는 전진 드라이브다. 어쨌거나 한방 스매싱. 힘차게 휘두르고 나오자. 한 세트에 세 개씩만 꽂자. 세 개만 꽂으면 11대 5 이하로 져도 괜찮아. 그리 마음먹었다. 질 때 지더라도 상대를 멀리 공 주으러 보내야 한다. 그게 내 마지막 자존심이었기에 나는 마구 휘둘렀다. 그렇게 게임에 푹 빠져서 허우적거리는데 심판이 나더러 주먹을 내미란다. 악수 대신 주먹 부딪치기. 내가 3대 1로 이겼다고 한다. 뭐야? 벌써 끝났어요? 윗머리가 없는 가가멜 아저씨는 주먹을 부딪치며 


"몇 부 치세요?"라고 물어왔다. 


뻔히 대회 선수 명단과 부수가 용지에 나와있는데도 재차 묻는다. 나는 7부가 맞다고 대답해주었다. 내가 듣기로 질문의 뉘앙스는 당신 7부가 아닌데 7부라고 속여서 나온 것만 같네? 그래서 자신이 졌다고 따지는 것만 같았다. 가가멜 아저씨는 6부라고 했다. 따지든 말든 나는 기분 좋았다. 가가멜이여, 나는 이제 더 이상 스머프가 아니에요. 당신처럼 사람으로 변했다구요. 그리고 사람에서 탁구인으로요. 하늘 위로 훨훨. 이 맛에 대회에 참가하는구나 싶었다. 


영삼 형이 대회장 한 편의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주며 격려했다.


"너 왜 이리 잘해? 완전 대회용이잖아."


그 말에 일순 긴장감이 사라졌다. 자신감이 뿜 뿜. 낯선 이들과 대회장에 있지만 흡사 우리 구장에 있는 것만 같았다. 좋은 사람. 편하게 해주는 사람. 나를 더 높게 봐주는 시선. 그런 게 사람을 성장시키는 게 아닐까 싶다. 영삼 형은 회사에서 상사를 선택할 수 있다면 같이 일하고 싶은 스타일이다. 


우리는 음료를 마시며 세 번째 상대가 누굴까 대회장을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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