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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Oct 27. 2022

탁구 리그전 처음 나간 날(3)

실감나는 하루





다섯 번째 게임


바싹 마른 남자. 

너무 말라서 입고 있는 유니폼이 헐렁이는 남자. 소매 위로 드러난 팔이 흡사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보인다. 어라! 나뭇가지가 탁구 라켓을 들고 있네. 거기다 휘두르기까지 한다. 신비롭다. 마치 겨울왕국에 나오는 눈사람, 올라푸 같은 형상이다. 얼굴에 볼이 말라서 눈이 도드라지게 보이고 턱은 뾰족해서 포크 대신 콕콕 사용 가능할 것만 같다. 걷거나 움직이는 동작도 느리다. 결코 빠르다거나 박진감이 넘친다거나 파워 있게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남성의 가죽을 뒤집어쓴 여성일지도 모른다. 메마른 몸매. 황혼에 다다른 노인이 젊은이의 살가죽을 덮어쓰고 있다. 만화 '라바'를 보면 작은 바람에도 온몸이 휘날리는 벌레가 있다. 벌레 이름이 도통 생각나지 않는데 사마귀였던가, 배짱이였던가, 아무튼 뼈 마디밖에 남지 않은 벌레다. 워낙 말라서 작은 바람에도 몸이 나부낀다. 정말 닮았는데...


사뿐사뿐 가는 팔이 라켓을 휘두른다. 라켓은 제법 공을 잘 맞추지만 최소 며칠은 굶었을 것만 같은 저 표정. 점심때부터 오후 늦은 지금까지 줄곧 배고파 보인다. 뭐라도 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끔. 저기요? 밥 좀 드시고 탁구 치세요. 배고파 보이니까 자꾸 마음 쓰이잖아요. 머릿속 깊숙이 자리 잡은 부성애가 뜬금없이 작동한다. 그러나 그러한데 그렇다 하더라도 있잖아요, 만약 그런 남자가 네 상대라면? 어이쿠,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거절 안 할게요. 지금껏 쉬운 상대가 하나도 없었는데 이게 웬 떡 입니까요? 하고 넙죽거릴 자신이 있다. 듬뿍 있다. 나로 하여금 절로 넙죽거리게 만드는 남자. 지극히 그 정도의 가치를 가진 남자, 그런 남자를 지금부터 감히 헐렁님이라고 지칭해 보고자 한다. (헐렁님 거듭 죄송합니다. 다음에 만나면 꼭 밥 살게요.) 


헐렁님은 여기 시합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내 눈에 아니 모두의 눈에 확 띄었으리라. 띄자마자 상대하고 싶은 사람, 1순위가 되었다. (어디까지나 제 생각) 

"영삼 형! 저기 보세요. 저분이랑 붙고 싶어요."

"나도 저분이랑 붙고 싶다."

"아니야, 내 거야."

"미안한데 진짜 내 거 하고 싶구나. 그것도 몹시, 많이, 무척이나."

우리는 서로 싸웠다. 그 사람을 두고서. 그 사람은 우리가 안중에도 없는데 우리는 서로 그 사람을 차지하겠다고 싸웠다. 그 사람은 헐렁님. 겉모습에서부터 보는 이들을 마구 현혹시키는 몸매. 그래서 다들 말은 나누지 않았지만 그 사람을 두고서 속으로 생각했을 터다.

'저 사람과 상대하고 싶다. 진정으로 만나고 싶다. 가슴 깊이 진심으로. 가볍게 1승.'


탁구 대회가 열리는 탁구장에서 지켜보는 이들 모두가 선망하는 사람. 

모두의 사랑을 받고, 모두의 마음을 휘어잡은 존재. 넘치는 매력을 가진 남자가 바로 헐렁님이다. 명단 표를 보니 헐렁님은 당당한 6부. 이미지로 봐선 대뜸 7부처럼 보이는데 6부라니. 어쩜 당신은 6부가 되기 위해 애쓰느라 그리 마르셨나요?  


탁구 구력이 제법 되시는구나 하는 경계심이 피어날락 말락 하는데, 헐렁님이 상대와 몸풀기를 개시하자, 역시나 탁구 치는 파워가 어김없이 경계심을 가로막는다. 스윙 속도가 헐렁헐렁. 바람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좋은 말로 사뿐사뿐. 힘없이 움직인다. 그는 남자답게 파워로 승부하는 스타일이 아니고 공을 살랑살랑 굴리는 기질을 가졌다. 기질은 몸에서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습성. 공을 때리기보다 굴리며 플레이하는 남자. 우리의 헐렁님. 매력덩어리. 


저는 사무치게 당신을 원한답니다, 하고 영삼 형과 나는 싸웠다. 언제고 저 팀이랑 붙을 때 부디 헐렁님을 저에게 하사 하시옵소서, 빌었다. 헐렁님은 우리의 존재조차 모르건만 우리는 무얼 두고 싸운단 말인가. 설령 우리가, 우리 중 누구를 그의 상대로 합의하고 인정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만의 얘기일 뿐이다. 그도 우리를 보고 선택해야 한다. 아, 그것도 아니다. 디비전 시리즈. 종합하자면 게임 상대자는 팀별로 모르는 상태에서 1번, 2번, 3번 번호대로 뽑힐 뿐. 사람을 보고서 선택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 그래서 그 이를 상대코자 일부러 순번을 배정할 수는 없다. 만남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리는 선물. 


"형! 저 정말 쉽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요, 자신 있단 말이에요, 제가 이런 말 한적 없잖아요?"


라고 말했던 유일한 선수가 바로 헐렁님이다. 


여기 대회장에서는 지금껏 어떤 사람, 어떤 이를 보아도 죄다 나보다 잘할 것만 같은 포스를 지녔다. 나이 많은 어르신도 무섭고 팡팡 튀는 젊은이도 무섭다. 저마다 하나 이상의 비기를 가지고 이곳에 왔다. 비기가 통하는지 안 통하는지 시험하기 위해서 여기 중원에 모였다. 천하제일 무도장에 모였다. 어디까지 통할까. 즉 겨루기 위해서다. 이기기 위해서다. 여기서 비기가 없는 이는 나뿐이다. 비기라고 해봤자 단순히 파워 스매싱 한방뿐. 스매싱은 아무나 날리는 흔한 기술이다. 아무나 가진 기술 하나를 믿고서 나는 여기에 잘도 서 있다. 간도 크지. 중원이 어떤 곳인데. 죽고 죽이는 살벌한 무도장.

 

나는 맨 아래 초보일 수밖에 없다. 5부부터 7부까지 모아 놨는데, 나는 최하 부수 7부니까. 7부에게 만만한 상대라곤 동급 7부뿐. 이 봐! 정말 동급인가? 그마저도 아니다. 어디 7부를 세밀히 나누어보자. 따져보니 7부 중에서도 맨 끄트머리, 이제 갓 7부에 입성한 단계. 그게 바로 나다. 그런 내가 당당히 만만하다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그게 헐렁님이다. 


"정말 원한다구요. 제가 이런 말 한 적 있던가요?" 



딩동댕동~짜잔~현실 타임. 

시간이 지나 드디어 헐렁님이 속한 팀과 우리 팀이 맞붙을 차례가 왔다. 우리 팀 셋은 애당초 약속한 대로 

'저는 언제라도 좋아유~'라는 동호가 전천후 1번, 

'상대의 에이스는 내가 잡겠다'라는 가장 강력한 우리 팀 에이스 킬러, 영삼 형이 2번, 

'기적은 이루어진다'며 버리는 패든가 아니면 혹시나 하는 승부수, 나를 3번으로 하여 오더를 적어 내었다. 


이윽고 상대팀의 오더가 나오고 심판이 양 팀을 인사시킨다. 탁구대를 마주하고 팀별로 삼대 삼이 섰다. 나는 맞은편 헐렁님을 보자 반가웠다. 가슴이 떨렸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 같았다. 그가 시선을 준다. 

심판이 이름을 부르는 순서대로 서라고 했다. 착착 서는데 이게 어쩐 일! 야호! 할렐루야! 알라신! 오딘이여! 실제 기적이 일어났다. 얼씨구나, 하느님 부처님 감사합니다. 


헐렁님이 내 상대가 되었다. 


헐렁님도 3번이었다. 나는 영삼 형의 옆구리를 찌르며 환희 웃었다. 연예인처럼 빛나는 선수, 어쩜 저리도 말랐을까 하는 감탄사를 유발하는, 뼈다귀밖에 안 남았네 하는 탄식을 부르는, 대회장의 수많은 시선을 사로잡은 선수. 나는 헐렁님을 보고 씩 웃어주었다. 내가 웃으며 저를 보는데 헐렁님은 웬걸 냉담한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그 표정은 마치 '웃지 마라. 우리는 곧 전쟁을 치를 사이 아닌가'라고 말하는 듯했다.


TV나 극장에서 일방적 시선으로 우러러보던 존재가 별안간 나를 쳐다본다. 마주 본다. 나를 객관화하여 본다. 존재는 화면에서 척척 걸어 나와서 나를 본다. 응시한다. 나는 TV 속 존재의 시선을 느낀 적이 없던 터라 그 시선의 무게감에 자못 어쩔 줄 몰라한다.

 

그간 마냥 멀리서 볼 때는 가볍게만 보였는데 막상 당사자로서 상대가 되어 마주하니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어쩐지 무거운 부담 같은 게 느껴진다. 우리는 게임 상대자로서 서로가 서로에게 관계된다, 는 그런 인연의 무게 아닐까. 보다 진지하게 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저 스쳐가거나 관객으로 지켜볼 때면 우리는 타인일 뿐이고 사라지는 시선일 뿐이지만 이렇게 게임을 통해 손을 맞춘다거나 어떤 형식에 의해 얽매인다면 그것은 결코 가벼운 인연이 아닐 것이다. 지금이라는 시간을 겪은 뒤, 이다음에 언제고 다시 만난다면 우리는 곧장 서로를 인지할 수 있게 되는 것. 즉 특별한 사이가 된다. (헐렁님, 꼭 밥 한번 사고 싶습니다.) 


나는 그러한 인연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탁구라는 세계. 실력을 떠나서 그 구력을 결코 가벼이 치부할 수 없다. 오랫동안 탁구 친 시간. 구력은 마법 같은 것이다. 비록 실력이 떨어져도 언제 어느 때고 구력의 마법을 통해 이따금 저보다 강자를 잡아먹기도 한다. 평소와 다르다. 자극하고 자극하고 자극한다면 한 번씩 숨겨진 입을 쩍 벌려서 덥석 잡아먹는다. 마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가오나시'처럼. 착한 척, 힘없는 척하다가 저 밑에 꽁꽁 봉해진 구력의 부적이 떨어진 날, 상대는 잡아먹히는 것이다. 아직 게임에 들어가기 전인데 나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무튼 그래 봐야 너는 당장 헐렁님일 뿐이다. 헐렁님은 헐렁이니까 헐렁이답게 나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어 다오, 라고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부담가지면 안 된다. 처음 보였던 만만한 그 느낌을 기억하자. 만만해 보이는 헐렁넘, 너는 무척이나 쉬운 상대, 그래서 몹시 원했던 사람. 만만하다, 만만하다, 만만해. 나는 애써 마인드 컨트롤에 들어갔다. 



막상 게임이 진행되고 1, 2번 모두 우리 팀이 패했다. 

동호와 영삼 형이 연달아 쓰러졌다. 뭣이? 저 팀이 저리 강 팀이란 말인가! 헐렁님의 팀인데. 나는 놀랐다. 1번, 2번이 저리 세다니. 그렇다면 3번 헐렁님도 세다는 뜻? 그러고 보니 헐렁님의 게임 결과를 여태 몰랐다. 다 졌겠지 했는데 알고 보니 대략 절반의 승률. 그도 이기는 선수였다. 그가 이겼던 게임을 나는 눈여겨보지 않고 줄곧 그의 몸매만 눈여겨봤던 것이다. 아뿔싸, 나는 아직 그의 전술 전략을 모른다. 


어쨌거나 팀 자존심이 걸린 대결. 나마저 진다면 내리 3연패. 최소 1승이라도 거둬야 한다는 중압감. 영삼 형이 내게 "너밖에 없다"라며 힘없이 웃음 지었다. 고개를 드니 다행히 내 상대는 헐렁님. 그런데 그런 헐렁님에게 만약 진다면? 그것이 단순한 1패일까? 지켜보는 이들이 뭐라고 할까? 우리 팀 동호와 영삼 형이 말할 터다. 헐렁님에게 지다니, 네가 사람이가, 네가 인간이가, 라고 면박을 줄지도 모른다. 어쩌면 두고두고 놀림감이 될 지도.  


아직 머릿속이 아득한데 그가 서브를 넣는다. 서브가 들어오는데 서브가 젠장, 다양하다. 한 가지가 아니다. 일정하게 날아오는 게 아니라 포핸드 짧은 서브부터 백핸드 사이드로 슉 찔러주는 것까지, 날카롭기 그지없다. 역시 6부 타이틀은 공짜가 아니구나. 6부는 7부를 넘어야 6부가 되는 것이다. 7부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부수. 탁구에 입문하고 1~3년 열심히 정진하면 7부가 된다. 공짜다. 시합에 참가하면 자동 7부다. 그러나 7부에서 6부로 올라서기란 다른 문제다. 연차가 쌓였다고 해서 자연 승급이 되지 않는다. 7부 대회에 나가 개인전이든 단체전이든 일정 이상의 성적을 올려야 한다. 공식 대회에 나가 입상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래도 일단 6부가 되면 5부랑도 맞먹고 4부까지 넘볼 수가 있으니 6부는 상위 부수로 가는 첫 계단이라 할 수 있다.  



다행이다. 

헐렁님에게는 역시 드라이브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6부가 되었을까. 드라이브가 없는 대신 다양한 서브와 연결 랠리가 있다. 내가 2구 리시브를 포핸드로 받으면 4구는 백핸드로 받게끔, 그리고 6구는 다시 포핸드로 받고, 내가 왜 이렇게 왔다 갔다 하지? 헐렁님의 연결 랠리는 수준급이다. 이쪽저쪽 코너를 다양하게 찌르는데 나는 숨을 헐떡이면서 겨우겨우 받아낸다. 헐렁님은 땀방울 하나 흘리지 않는데 내 유니폼은 벌써부터 축축하다. 역시 노련해. 그의 생존 무기는 서브와 랠리. 감탄할 때가 아니다. 이게 아닌데, 야단 났다, 지면 끝장이란 부담이 커진다. 잡을 수 있는 상대는 잡아야 한다. 벌써 4대 0까지 벌어졌다. 5대 1, 6대 2. 

별수 없다. 나는 휴우, 심호흡을 했다. 연막 작전. 오냐,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다. 나는 첫 세트에서 간을 보았다. 이를테면 첫 세트를 버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상대라 직감했다.

 

헐렁님의 포핸드 짧은 서브는 커트하면 안 돼. 커트하니까 붕 뜨고 붕 뜨서 찬스 볼을 준다. 너클이구나. 커트를 거는 폼은 트릭이다. 플릭으로 가야겠구나 하고 마음먹었다. 

헐렁님의 백핸드 긴 서브는 왼쪽 끝 사이드로 빠진다. 그것을 돌아서서 퍼 올리기는 한계가 있다. 백핸드로 오면 쇼트로 받자고 다짐했다. 

헐렁님이 역회전 서브를 보내면 나의 리시브하는 라켓 면도 오른쪽으로 기울여 받자고 맘속으로 정해두었다. 이렇게 세 가지 경우의 수. 리시브를 할 때 미리 결정하거나 멍하니 기다리지 않는다. 집중하자. 공이 라켓에 맞는 순간까지 기다렸다가 짧게 오면 바로 플릭이고 길게 오면 쇼트다. 플릭이냐 쇼트냐, 그것만 생각하자. 역회전은 서브 전 팔 동작으로 미리 알 수가 있다. 따라서 나는 미리 라켓면을 오른쪽으로 기울여 어느 쪽으로 밀까, 만 염두한다. 여기까지 생각이 정리되자, 1세트는 벌써 끝나 있었다. 내가 졌다. 이 서브에는 이렇게 리시브하니 안 되는구나, 자꾸 실힘해본 결과다. 헐렁님은 내가 리시브에 연속 실패하자 자신감을 얻었을 터. 자신의 서브가 아주 잘 통한다고 기고만장할 것이다. 나는 그 틈을 파고들어야 한다. 


이제 2세트.

뒤에서 지켜보던 코치님이 잠시 와보라 해서 가니 귓속말로 

"상대가 공격을 안 하는데 왜 자꾸 물러서? 물러서지 말고 때려"

라고 말해 주었다. 코치님은 첫 출전하는 내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줄곧 기합을 넣어 주셨다. 영삼 형도 내게

"너 잘하는 스매싱 있잖아, 앞 세트에서 한 번도 안 때리더라"

라고 조언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못 때렸구나. 앞 세트가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나는 번뜩 인지하게 되었다.


헐렁님의 공은 언뜻 보면 때리기 쉽게 보이지만, 실제 때리면 미스가 많이 나는 공이다. 예상보다 천천히 오는 느낌. 

나는 이미 백스윙에 들어갔는데 공이 오지를 않는다. 탁구공아! 너 아까부터 내내 날아오지 않았니? 그래서 내가 이거다! 하고 금방 저 뒤로 백스윙을 했잖아? 지금 타이밍으로는 벌써 휘두르고 공이 잘 들어갔나 바라봐야 하는 시간인데 어찌하여 너는 아직도 날아오는 중이니? 높지도 낮지도 않게 그리고 길지도 짧지도 않게. 

어중간하다. 도무지 이거다 하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설핏 처음에는 찬스 볼인가 해서 보면 찬스 볼이 아니고 긴 볼인가 하면 긴 볼이 아니다. 헷갈린다. 공이 오는 속도가 느려. 느려서 오히려 미스를 부른다. 이른바 느림의 미학. 그동안 빠름만을 추구하던 욕망. 빠르지 않으면 안 돼. 빠를수록 좋은 거라던 편견. 빠른 볼을 더 빠르게 칠 수 있어야 고수가 된다, 는 믿음. 


습관처럼 본능처럼 미리 백스윙이 들어가는 것을 조절하지 못한다. 그러나 최소한 휘두르는 박자는 조절해야 해. 나는 공이 다가올 때까지 버티고 버텨서 몸통 회전을 되도록 오랫동안 가져간다. 왼손이 진작 왼쪽으로 돌아가고 이어서 왼쪽 골반이 왼쪽으로 틀어진다. 가슴도 돌아간다. 돌아가고 틀어지는 새에 오른쪽 골반이 정면으로 나왔다가 왼쪽으로 따라간다. 돌아가고 틀어지고 따라가는 새에 허벅지와 장딴지와 운동화가 돌아간다. 돌아가고 틀어지고 따라가고 다시 돌아가서 이이상 틀어지고 따라가고 돌아갈 게 없다. 

이제 남은 게 없어요, 없단 말이에요 하는데 그제야 오른손이 출발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백스윙 중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백스윙을 해본 적이 없다. 왜 저를 잊고서 모두 떠나가나요? 저도 데려가셔야죠. 결국 저를 위해 먼저 떠나간 거잖아요? 한분도 남김 없는 지금. 제가 얼마나 오래 기다린 줄 아세요? 하염없이 기다리며 얼마나 외로웠는지 아세요? 하며 오른손이 자꾸만 읍소한다. 기다리고 기다릴 수 있을 만큼 기다리다 마지막에야 쫓아 나온 거예요. 그러니 저를 미워하지 마세요, 라고 하는데 비로소 헐렁님의 공에 타이밍을 맞출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처음 참가하는 오늘 이 대회에서 처음으로 느린 볼의 위력을 리얼하게 실감하는 중이다. 실감하는 중 2세트도 끝나 있었다. 또 내가 져서 세트스코어는 2대 0이 되었다. 서브와 타이밍 학습에 2세트를 내줬다. 영삼형이 날 보며 "너, 이 자식, 왜 그래?" 한다. 코치님도 "정신 차려, 평소에 잘하면서 왜 그래?"라고 말한다.


헐렁님은 여전히 냉담한 표정으로 나를 대한다. 여느 하수를 대하듯, 고수로서의 냉기를 차갑게 내뿜는다. 저 표정에 패한 자들은, 넘을 수 없는 세계, 근육이 다가 아니구나, 파워가 다가 아니구나, 하면서 탁구만의 구력 마법을 체감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이제 뼈를 취할 시간이다.


3세트가 시작되자 차츰 스코어는 유리해지고, 어느새 기다림에 익숙해진 오른손은 더는 샐쭉해하지 않으며 기다리게 되었다. 

헤헤 지금인 줄 알았어요. 나 잘 기다렸죠? 하면서 나의 스윙은 헐렁님의 공을 마침내 정확히 때리게 되었다. 때로는 민볼 스매싱. 때로는 한방 드라이브. 그것이 나의 특기다. 타이밍이 맞자 특기는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소리는 찰싹. 호선은 직선. 목표는 승리. 갑작스러운 공의 파워에 헐렁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하수였잖아? 하는 눈빛이다. 방금 전까지 헤매었잖아? 하는 표정이다. 뭐야? 사람이 바뀌었나? 놀라는 얼굴이다. 


1, 2 세트에서 리시브에 헤매고 느린 볼에 헛스윙만 하던 나. 차츰 공을 맞추게 되자 금세 게임은 끝났다. 3대 2로 역전승. 


그렇게 쉽게 보았던 헐렁님에게 한마디로 크게 혼이 났다고 해야 할까. 역시 밖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보는 것과 한 발자국 안에서 보는 건 차원이 다르다. 사람은 겪어보지 않고서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런 게 세상사 진리가 아닐까 싶다. 미리 판단하지 말자. 겉모습이 전부가 아니다, 라는 교훈. 

헐렁님! 잘 배웠습니다.




여섯 번째 게임.


부장님용 안경을 낀 오십 대 아저씨. (이하 부장님이라 지칭합니다.) 

부장님과 나는 탁구대 맞은편에 서서 몸풀기 랠리를 한다. 포핸드 주고받기. 이어서 쇼트, 를 해야 하는데 심판이 시간 됐다면서 가위바위보를 하라고 한다. 내가 이겼다. 서브를 보내는데 부장님이 헛치고서 불쑥 나이스를 외친다. 자신이 못 받아서일까. 상대를 응원하기 위함일까. 아니면 도발하기 위해서일까. 나 자신이 삐딱하여 왠지 다정하게 들리지 않는다. 


우린 전투에 들어간 병사들. 내가 당신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는데 그런 나를 보면서 나이스라니? 지금 잘 찔렀다고 칭찬하는 거죠? 그 정도는 눈도 깜빡이지 않는다? 아프지 않다는 뜻. 


이번에는 부장님이 리시브한 공을 그대로 3구 드라이브로 득점했다. 기분이 좋을락 말락 하는데, 다시 울리는 부장님의 파이팅 소리. 김샌다. 내가 점수를 앞서는데 나를 향해서 잘한다고 손뼉 치는 사람. 보통의 경우라면 다독여주고 챙겨주는 쪽이겠지만. 지금은 전쟁 중이다. 파이팅이 전혀 므흣하지가 않다. 


다짜고짜 상대를 하대하는 파이팅. 어째서 저분이 나를 하대할까? 나는 당신의 부하 직원이 아닌데. 거기다 상대를 꿰뚫어 보는 혜안. 어찌하여 저를 꿰뚫어 보시나요? 그만 보세요. 

부장님의 시선이 날아온다. 날아와 가슴팍 유니폼을 통과해 살갗을 짓누른다. 뭐야 갑자기? 조그맣게 핏방울이 맺히고 시선이 파고든다. 뭐하시는 거예요? 기어이 피부 표층을 뚫고 내장을 살피고는 등 뒤 살가죽을 헤집고 관통한다. 미쳤나 봐. 아아, 당신의 혜안이 부담스러워. 저를 보면서 너털웃음을 짓지 마세요. 우린 이제 겨우 만난, 초면이잖아요. 그럼에도 부장님은 벌써 나의 전부를 파악해버렸다.


동그란 얼굴에 짧은 머리. 시커먼 얼굴에 예리한 눈빛. (내 시각에서) 수많은 부장님들이 끼는 금테 안경. 금테는 그의 작게 뜬 눈과 닮았다. 애걔~ 지금 눈 다 뜬 거예요? 내가 보이시나요? 금테의 두께는 윗 눈꺼풀과 아래 눈꺼풀이 벌어진 폭만큼 얇다. 동그란 얼굴에 얇은 선이 그려져 있다. 이른바 언밸런스. 동그라미 안에 가로 선. 좋게 말하면 예리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날카로운 거다. 안경 속 눈알이 다 보이지 않아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파이팅 소리로 짐작할 뿐. 그가 실제 부장님인지 물어보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세상사 거친 환경을 다 거쳐와서 다 안다는 느낌이 전해온다.

 

탁구라는 세계에서도 어지간한 볼은 다 접해봤기에 이제는 놀랄 공도 없고 대처 못할 공도 없다는 느낌. 네가 뭘 하든 내 앞에서 재롱부리는 품을 넘지 못하니, 한번 까불어봐라, 하는 눈이다. 그것은 마치 손오공이 어떤 재주를 부려도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것처럼 한계가 명확하다. 내가 스윙하여 보내는 공이 하나의 선을 그리며 그에게 이어진다. 명확한 한계 속에서 내가 어떻게 선을 그어도 그 선은 부장님의 선을 넘지 못한다. 따라서 나의 짧은 선은 언제나 그의 긴 선에 잠식당한다. 그것이 일직선이든 동그라미든 관계없고 검은색이든 빨간색이든 상관없다. 그는 드라이브든 커트든 죄다 한수 위의 스킬을 구사한다. 그는 5부다. 관록 있는 5부. 구력 깊은 5부. 오랜 시간 5부. 세상사 거친 수풀을 헤치고서 이제는 나무 위에 올라타 내려다보는 부장님. 그에 반해 수풀 위에 매달려 올려다보는 나.


"자, 해보세요"


하면서 그가 먹기 좋은 서브를 보낸다. 나는 잘 먹겠습니다 하고 숟가락을 든다. 들어서 자신 있게 휘두른다. 공은 생각보다 더 세게 날아가 부장님의 배꼽에 정확히 꽂힌다. 꽂힌 볼을 가만히 보며 부장님은 "나이스"를 외친다. 그리고는 공 주워온다. 


"한번 더 해보세요"


라며 다시 먹기 좋은 서브를 보낸다. 나는 똑같이 숟가락을 휘두른다. 숟가락은 맛난 드라이브를 얹고 내입에 들어온다. 잘 때렸다는 생각이 든다. 금방 먹을 수 있으리라 여긴다. 그런데 먹이가 내 입속에 들어오기 직전, 부장님은 그것을 툭 쳐서 빼앗는다. 한 발짝 물러서서 카운터로 날린다. 카운터는 내가 날린 것만큼이나 빨라서 나의 포핸드로 꽂힌다. 나는 멍하니 쳐다본다. 내 입 바로 앞에서 떨어진 먹이를 부장님이 주워서 와작와작 씹어 먹는다. 


먹이를 빼앗겼다. 먹이를 빼앗긴 나는 먹이를 빼앗긴 복슬강아지가 된다. 복슬강아지는 먹으려던 먹이를 빼앗겨 침통하다. 침통한 복슬이에게 다시금 부장님은 흐뭇한 표정을 지어 보낸다. 나이스를 외친다. 복슬이는 화가 났다. 화가 나 더 세게 주둥이를 갖다 댔다. 이번엔 이빨로 물었다. 젖니가 아프도록 힘차게 물었다. 다시는 빼앗기지 않으리라 하는데 부장님이 툭 쳐서 먹이를 바닥에 떨어뜨린다. 떨어진 먹이를 부장님이 라켓으로 냉큼 주워다 먹는다. 그가 먹는 모습을 복슬이가 쳐다본다. 쳐다보는 복슬이의 얼굴이 침울하다. 침울한 표정으로 보는데 부장님은 먹으면서 연방 미소를 짓는다. 배가 고프다. 침울한 복슬이 앞에서 부장님은 미소 쟁이가 된다. 미소 짓지 마세요. 복슬이는 미소 쟁이가 싫다, 고 왈왈 짖어보지만 부장님은 그저 귀엽다고 웃음 짓는다. 옛다, 이거나 물어와라, 하고서 높다랗게 찬스 볼을 띄워준다. 복슬이는 신나서 이번에야말로! 멍멍! 짖으며 스매싱을 때린다. 잘 때렸는데 부장님은 예상했다는 듯 저 멀리 물러나 있다가 그것을 받아낸다. 복슬이가 포핸드로 때리면 화 쪽 끝에 가 있고, 백핸드로 때리면 백 쪽 모서리에 가 있다. 복슬이가 어디로 치든 그는 방향을 다 안다. 


손오공은 지쳤다. 복슬이는 결심했다. 더는 눈앞 먹이에게 속지 않기로 다짐했다. 강아지 주제에 합리화를 한다. 체력을 아껴야 한다. 아직 남은 게임이 있으니. 버리자, 징그러운 부장님을, 법정 스님 도와주세요, 무소유의 마음을.  


제발 고개 좀 그만 끄덕거려 주세요. 당신이 다 아는 거 알아요. 어쨌거나 당신은 부장님이잖아요. 일개 사원이 아무리 혁신 기안을 올려도 그것은 당신이 소싯적 다 해본 기안인 것을. 

이번에는 뭘 기안해볼 테냐? 


서류가 열한 개 올라가면 결재 사인은 하나둘 겨우 떨어진다. 


제가 못 올리는 게 아니라 안 올리는 거거든요, 하면서 애써 자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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