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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Oct 27. 2022

탁구 리그전 처음 나간 날(4)

힘을 뺀다





일곱 번째 게임.


머리띠를 맨 통통한 남자.

사십 대 초반. 모범생으로 보인다. 언뜻 착하게 생겼다. 착해서 아내가 주는 대로 먹었을 것이고, 많이 먹어, 한 그릇 더 먹어, 라는 말을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탁구를 쳐도 살이 통통하니 일정 유지가 되었을 터. 눈빛을 보니 탐구하는 자세와 상승 의지가 강해 나름 노련해 보인다.

이 분도 안경을 꼈다. 이른바 과장님 안경이다. 나는 부장이든 과장이든 '장'자가 들어간 이를 꺼려한다. 장들은 어떻게든 장값을 하기 때문이다. 대개 장들은 각종 장 밑에서 숱하게 구르고 굴렀을 테다. 구르고 구르면서 어떻게 해야 살아남는지 터득했을 것이다. 터득한 그들이 마침내 장 자리에 오르면 그들은 공짜로 장이 된 게 아니므로, 공짜로 장이 되지 않은 장답게 대체로 그 값을 한다. 내가 어떻게 장을 달았는데. 장만 달면 그 값을 해주마 하고 이를 악물었던 나날, 눈물의 붕어빵을 먹 초보시절. 악무는 데 있어서 느슨하게 무는 이는 없다. 악악, 기합과 함께 윗니와 아랫니를 우드득 문다. 그래서 어떤 위기나 난관도 헤쳐나갈 힘을 가졌다. 악 물고 악 물어서 그 힘으로 탁구 5부가 되었을 터. 착하게 생긴 과장님은 5부다. 나는 나의 일곱 번째 상대, 과장님을 살폈다. 과장님! 살이 쪘네요? 살이 쪄 통통하니 움직임이 느리겠지요? 했다.


과장님은 내게 기습적으로 긴 서브를 보내왔다. 나는 쇼트로 받았다. 어차피 백 쪽으로 올 것이다. 긴 것은 쇼트, 짧은 건 커트다. 대회를 치르면서 그리 정해놓았다. 긴 서브에 하회전이 섞여도 상관없었다. 달리 다른 방도가 없기도 하다. 다른 기술이 없다. 머리를 굴려봤자 최악의 수만 안 나오면 다행이다. 되도록 쉽게 가자고 다짐했다. 그러니 커트 핏이 있더라도 최대한 올려치며 쇼트로 넘겼다. 다행히 공은 네트를 스치며 넘어갔다. 과장님은 네트에 물린 공에 스탭이 엉켜 실수해주었다. 좋아하는 티를 내지 말자, 고 생각했다. 최대한 7부 답지 않게 보이려고 노력했다. 무늬만 7 부지 준 과장급에 속하는 실력자라고 어필하고 싶었다. 나는 과장님에게 빙긋 웃어주었다. 물론 웃으면서 슬쩍 왼손을 들었다. 이 정도 매너는 기본이지요. 미안하다는 표시다. 미안한데 왜 웃느냐고 따질 수도 있지만 웃음이 나오는 걸 어떡하란 말인가. 조금 느긋한 웃음처럼 보이지 않나요?


뚱뚱한 과장님의 안경 속 눈알이 반짝거렸다. 그가 과장까지 달면서 살아온 나날 학습하고 학습했던 중, 되짚어보면서 예측 가능한 변수는 몇 가지나 될까. 수백 가지? 수천 가지? 나는 수천 가지를 벗어날 수 있는 변수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그가 유추할 수 있는 세계의 범위 밖. 7부가 할 수 있는 플레이를 벗어나 보자.


나는 백 쪽에 서 있는 과장님을 보면서 시선을 그쪽으로 유지한 채 반대쪽으로 틀어 보냈다. 마치 라켓에 빗맞은 것처럼 의도를 벗어난 스윙을 했다. 역시 과장님은 여느 과장님처럼 과장님의 범주만 예상하고 있다가 속아주었다. 어느 쪽으로 치는가? 상대가 탁구공을 칠 때 서브를 빼고는 전체를 보기 마련. 몸동작 회전을 보고 시선을 보고 라켓을 본다. 미리 판단하면 속는 것이다. 오른쪽으로 칠 줄 알았는데 뒤늦게 왼쪽으로 쳐 버리는 술수. 오른쪽을 보면서 스윙만 왼쪽으로 해 버리는 트릭. 빨리 칠 줄 알았는데 한 박자 지나서 상대가 움직이는 방향을 보고서 반대로 쳐 버리는 스킬.

그렇게 변칙 공격을 계속하였다. 스코어는 어느새 6대 0. 과장님의 등 뒤편에 졸졸이 앉아서 응원하는 영삼 형과 꺽다리도 놀라는 눈치다. 그들의 눈치를 보고 있자니 점점 가슴이 떨렸다. 5부를 상대로 이렇게나 쉽게? 이긴다? 떨기 시작하는 걸 눈치챘을까.


"타임!"


과장님이 타임을 외쳤다. 순간 과장님은 가운데 손가락으로 자신의 안경테 가운데를 올린다. 그러면서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응시한다. 이 정도는 아닌데 이상하게 자꾸 당하네? 하는 눈빛. 나도 그의 눈빛을 마주 보는데, 들키면 어떡하지? 이 정도는 아닌데 계속 이기네? 하며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그 순간을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나는 결국 7부답게 차츰 스코어에 잠식당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길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들 때부터, 안전 플레이가 시작되었다. 변칙은 벌써 사라졌고, 과감도 사라졌다. 팔을 올려야 하는데 올라가지 않았다. 과장님은 과장님답게 잊지않고 장값을 했다. 거기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안전 플레이, 점수 지키기가 지맘대로 작동되어 바보가 되었다. 결국 따라 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졌다.




여덟 번째 게임.


이름이 김재홍?

김재홍은 내 친구 이름인데? 내 친구 김재홍도 탁구 치는 사람이다. 탁구 치는 사람 중 어떤 이가, 내 친구이면서 동시에 이름마저 김재홍일 확률은 높지 않다. 더구나 여기는 작은 도시. 달리 말해 작은 도시에서 이름이 김재홍이고 내 친구이면서 탁구 치는 이는 흔치 않다.

그런데 얼굴이 다르다. 동명 이인이다. 동명 이인이라도 내 친구 김재홍과 이름이 같아서 나는 지레 포기하였다. 아니 왜? 왜냐하면 김재홍은 어릴 적부터 탁구를 잘 쳤기 때문이다. 나는 내 친구 김재홍에게 단 한 번도 탁구를 이기지 못하였다. 그는 그야말로 탁구공을 갖고 놀면서 탁구를 쳤다. 그는 내게 언제나 탁구 고수였다. 그래서 나는 탁구대 앞에서 김재홍이라는 이름과 접하면 지레 포기하게 되는 이른바 조건반사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이 합리적인 인과가 맞는지 모르지만 사람의 마음가짐이란 건 비교적 단순한 것이어서 그렇게 간단하게 강자, 약자의 관계가 형성될 수도 있다. 절묘하게도 실제 내 친구 김재홍도 5 부고 내 앞에 선 어르신도 5부다.  


수십 년 동안 이기지 못했는데 이제 와서 이길 수가 있나?

내 앞에 선 상대가 비록 동명이인이라도 탁구대 앞 그 이름이 가진 무게가 비단 가볍다 할 수는 없을 진데. 아무렴 처음에는 마음을 비우고 그를 쳐다봤다. 그는 오십 대 후반 혹은 육십 대 초반으로 보였다. 연세가 지긋하신 어르신이다.

둘러보니 곧 그와 맞붙어야 하는 탁구대가 저기 왼쪽 맨 구석에 하필이면 응원석이 기다랗게 둘러싸인 곳에 있다. 응원석에 사람이 가득하다. 탁구대 옆으로 앞뒤로 앉아서 볼 좌석이 늘어서 있다. 그래서 다른 곳보다 많은 이들이 앉아서 구경하고 응원하는데, 흡사 거기가 공식 시합 탁구대처럼 보일 정도다. 그처럼 느껴지는 건 단지 내 기분 탓일까. 여기 대회가 치러지는 탁구장에서 가장 많은 이들이 주목하는 위치다. 그래서 관심을 가장 많이 받는 탁구대. 많은 이들이 지켜본다. 이것은 내가 가장 우려했던 장면이다. 게다가 지켜보는 이들도 모두 탁구인들이고 탁구인들이 탁구 치는 나를 보노라면 내가 어떤 인간인지 낱낱이 알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탁구인으로서의 가치와 연륜. 따라서 내가 어떤 인간인지 바닥부터 들통날 시간이 머지않았다는 말이다.


이제 곧 시작된다.


김재홍 어르신은 내 앞에서 내 친구와 다른 얼굴로 담담히 내 얼굴을 쳐다본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등 뒤에 달린 이름표가 보인다. 김재홍. 한 글자도 다르지 않다. 갑자기 진짜 재홍이가 보고 싶어 져서 재홍이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진 재홍이라면 이렇게 관중 많은 탁구장에서, 내게 아량을 베풀어서 점수를 근접하게 끌고 가줄 텐데, 하는 생각. 보는 시선이 많으니 친구를 배려해서 적당히 한 세트 정도는 져 줄텐데, 하는 바람. 그 때문일까?


심판의 호령 뒤에 나는 보다 공손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는 예의 바른 사람입니다. 그러니 되도록 살살 좀 상대해 주세요, 라는 비굴함도 담아서 인사를 건넨다. 거의 구십도 가량 배꼽인사를 한다. 천천히 숙여서 실제 김재홍 어르신이 이미 고개만 까딱 인사를 끝내고 나를 지켜보는데 한참을 숙였다가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온화한 눈으로 쳐다본다. 저의 이 간절한 인사를 부디 거절하지 마시어요.


그가 내 마음을 알아차릴까?

당신의 이름은 '죽마고우'인 내 친구랑 같아요. 제 불알친구죠. 우린 어릴 때부터 강에서 홀딱 벗고 같이 수영도 했구요. 목욕탕도 줄기차게 함께 다녔답니다. 그러니 정말로 불알친구가 맞아요. 불알이 어떤 건지 아시죠? 제 눈을 보세요. 벌써 촉촉하잖아요. 이것은 낯선 타인을 보는 게 아니라 정다운 친구를 보는 눈이랍니다. 물론 당신은 다른 사람이지만 그 이름에 갖는 제 마음은 애증이 담겨 있답니다. 이 절절한 애증을 봐서라도 살살 좀 해주세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잖아요. 제발 좀 부탁드립니다 하고 텔레파시를 보내 보았다. 그가 내 텔레파시를 알아차렸을까. 라디오처럼 주파수가 있다면 생각을 전할 주파수를 찾고 싶었다. 어떻게든 절박한 마음 전하고 싶었다. 그만큼 두려웠다.


수많은 탁구인들이 빙 둘러앉아 나만을 지켜보는 것만 같다. 고개를 드니 역시나 조금 전 여섯 번째 상대했던 부장님도 구경 무리에 끼여 나를 지켜본다. 나를 무참히 하대했던 부장님. 내가 탁구대 앞에 서니, 그가 나를 보면서 옆에 지인과 이렇게 대화하는 것만 같다.


"저 사람, 조금 전 나랑 붙었는데 말이야, 한마디로 형편없더라구, 이번엔 몇 점이나 내는지 지켜보자고, 비웃을 준비됐어?"


내가 물끄러미 보자니 부장님은 쉴 새 없이 떠든다.


"저따위 실력으로 여기 나올 생각을 어떻게 했지? 탁구에 대한 모독? 여기는 최소 과장 이상, 그러니까 5부는 되어야 나올 자린데 말이야. 그저 올림픽 정신으로 개나 소나 나오니 원. 하긴 저분은 개도 아니고 강아지더라고, 복슬강아지, 왈왈!"


그런 대화 소리가 내 귀에 들리는 것만 같아서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대회 마지막 게임인데 마지막에 와서야 긴장감이 살아난다. 제발 망신만 당하지 말자, 가 나의 초심이었다. 내가 초심을 잊고 분수에 맞지 않게 게임을 즐긴 것을 들켰구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나는 어쩌자고 오만했을까.


탁구를 처음 배우기 시작한 마음. 부디 랠리라도 이어가게 해 주세요, 라는 초심자의 의지. 나와 함께 탁구 치는 이들이 지루해하지 않게, 불편해하지 않게 해 주세요. 나랑 함께 탁구 치는 이들이 계속 나랑 탁구 치고 싶게 해 주세요 라는 마음. 나는 열심히 오는 공에 집중해 정성 들여 쳐야 했다. 오가는 공 흐름에 방해되지 않게. 속도를 맞춰서. 박자에 맞춰서 보내야 했다. 보내면 금방 돌아온다. 돌아온 공을 똑같은 리듬에 맞춰 다시 보내야 한다. 그러기를 반복한다. 곧 무아지경에 빠진다. 무심결에 치는 공이 정박자로 들어간다. 내가 탁구를 치는 건지 춤을 추는 건지 모르게 된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건지는, 공이 탁구대 밖으로 벗어야 비로소 알아차리게 되는 경지. 그것을 좇아 여기까지 왔는데, 마침내 지금 이 순간 나는 탁구인들 앞에서 어디까지 연습했는지 어디까지 수련했는지 그 실력을 고스란히 들키게 생겼다. 야단 났다. 시험관들 앞에서 실기시험을 치는 심정이 이러할까. 내가 하는 동작을 그들은 죄다 지켜볼 것이다. 지켜보면서 내 수준을 체크할 터다. 체크하고서 이내 비웃을 터다. 비웃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리면 어떡하지? 그들의 탄식과 하품과 비웃음과 동정이 내 폐부를 찌르면 어떡하지? 나는 지켜보는 이들의 눈과 입을 쳐다보지 못한다. 오로지 내 친구 김재홍이 다른 얼굴로 현혹하는 기술에 휘둘리기만 한다. 휘둘리면서 나는 실체가 아닌 상대를 친구로 가정해두고서 마냥 무릎 꿇는다. 털썩.  


안 돼!

그동안 내가 얼마나 애써왔는데. 얼마나 연습했는데.

저녁시간 초등생 딸아이 밥 챙겨 먹이고 숙제 봐주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음식쓰레기를 챙겨 분리수거장에 들렀다가 틈새를 쪼개어 탁구장에 나갔다. 레슨을 받고 감사합니다, 인사하고 흩어진 공을 주워 담았다. 배운 기술을 시험해보려고 탁구로봇이랑 얼마나 씨름했던가. 공을 치고 공을 줍고 넣어서 다시금 공을 쳤다. 레슨실에서 나와서 함께 탁구칠 이가 없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적당한 상대는 쉬 나타나지 않았다. 만고의 인내를 발휘해 고수에게 한 번만 잡아달라 부탁했다. 고수들은 상대하더라도 아쉽기만 했고 때때로 야속하기까지 했다. 비슷한 상대. 비슷하면서도 나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 당장 그런 이가 없었다. 없어서 포기하려다 겨우 만났다. 그렇게 재미를 붙여 여기까지 왔다. 영삼 형과 기타 7부 사람들.


문득 옆을 보니 옆 테이블에서 영삼 형도 게임 중이다. 그 옆에 동호도 게임 중이다. 우리 팀과 상대팀은 먼젓번처럼 순서대로 게임을 하는 게 아니라 1, 2, 3번 테이블에서 동시에 게임하는 중이다. 어쩌면 최강팀일지도 모르는 상대팀과 맞서서 우리 팀 7부 셋은 열심히 혼나는 중이다. 돌아보니 저마다 사력을 다해 쥐어짜 낸다. 스코어를 따라가기 위해서. 익혔던 움직임을 태고적부터 끄집어 내 버티려고 한다.

영삼 형은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공을 주으러 다닌다. 동호도 휘청거리며 허리를 굽힌다. 우리는 모두 공을 줍는다. 공 줍는 우리는 각자의 스코어판을 흘낏 보며 안심 한다. 나만 당하는 게 아니구나. 혼자가 아니구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세차게 흔들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정신 차려. 짧은 시간이지만 이번 대회 예상보다 잘 치렀다. 정신 집중. 무념무상에 빠져 게임에 집중하자.

나는 김재홍을 쳐다봤다. 쳐다보니 김재홍은 내 친구가 아니다. 내 친구가 아니기에 내가 주눅 들 이유도 없다. 아무 이유도 없이 내가 소극적으로 임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실력으로 밀리는 거. 애당초 내가 마음먹었던 것만 하기로 한다.

딱 4개다. 한 세트에 4개만 꽂자. 4개는 스매싱이다. 한방 드라이브다. 한 세트에 4개를 꽂으면 4점을 딴다. 4점을 따면 그 외 보너스를 합쳐 11대 5로 진다. 그 정도면 된다. 지켜보는 탁구인들도 납득할 테지. 우선 하나다. 내리꽂자. 날리자. 나는 김재홍 어르신이 올려준 루프 드라이브를 낮은 카운터 스매싱으로 받아쳤다. 받아친 스매싱이 잘 들어갔다. 아아, 살았다. 11대 빵은 아니구나. 다행이다, 하면서 스코어를 보았다. 내 점수판을 잘 넘기나 안 넘기나 확인해야 했다. 내가 분명 이겼는데 심판이 상대의 점수판을 넘기는 게 아닌지 똑똑히 지켜보았다.


김재홍 어르신의 아리송한 공도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휘둘렀다. 무서울게 뭐가 있단 말인가. 꽂았다. 내리쳤다. 내려치기에 애매한 공은 하늘로 쳐 올렸다. 슬며시 길게 감아야 할 공도 공을 채면서 날렸다. 스매싱. 결국 남자는 스매싱이다. 휘두르자. 긴 호선을 그리며, 큰 동작으로 날리자. 스코어판을 보는데 아아, 3점씩이나? 어라? 4점, 5점이구나. 대박이다. 성공이다. 이제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5점이나 땄으니 더는 욕먹을 이유가 없다. 나는 스매싱 다섯 방을 내리꽂았다. 그때마다 김재홍 어르신은 저 멀리 공 주으러 가고 그 뒷모습을 보면서 희열을 느꼈다. 김재홍! 너도 공을 줍는구나. 그것도 내가 친 볼을 말이야. 그대도 별 수 없는 인간, 절대 강자가 아니로구나. 그걸 보는 것으로 족했다. 비록 졌지만 기분 좋은 장면. 그렇게 11대 5 언저리에서 3세트 연속해서 졌다.  




옆을 보니 영삼 형도 이미 3대 0으로 깨지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란히 3대 0으로 완패. 영삼 형이 씩 웃어 주었다.


"수고했다. 잘했어. 시원하게 날려주더라."


영삼 형의 그 말이 어찌나 위안이 되던지.


"그래요, 우리 팀 전부 정말 잘했어요."


나와 동호와 영삼 형은 손을 맞잡았다.


우리 팀 일정이 종료되고 우리는 짐을 챙겨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배낭을 메고 나서는데 대회장 출구 쪽 탁구대를 보니, 약자가 강자에게 처절히 당하는 것을 봤다. 강자는 단 한점도 허투루 내주지 않았다. 스코어는 11대 1, 11대 2 정도. 심지어 11대 0도 보였다. 구경하던 이들이 중얼거리던 그 말.


"저 사람 불쌍하다."


불쌍하다는 말. 그 말은 곧 가혹하다는 뜻. 승부에 있어서 봐준다거나 살살한다거나 그런 건 있을 수 없다. 탁구는 멘탈 게임. 멘탈이 안 들어간 종목이 없겠지만 탁구는 멘탈이 무너지면 제 기량의 30%도 나오지 않는다. 탁구공이 특히 작고 가볍기 때문이다. 공이 섬세해서 손끝이 떨리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멘탈이 반영된다. 100% 전력으로 붙어도 될까 말까 한데 30%의 실력으로 강자를 상대하면 11대 0의 스코어가 나온다. 11대 0은 뇌리에 박혀 언제까지고 남게 된다. 지켜보는 마음, 씁쓸하기 그지없다. 나도 저리 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타인의 게임을 보는 것만으로도 힘들다. 나 역시 강자를 만나 쉬 포기 상태가 되는 것을 경험했다.


승부는 때때로 무서운 것.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면 백전백패가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나만이 구사할 수 있는 기술. 마지막 벼랑에서 상대의 창이 가슴팍에 들어와도 휘두를 수 있는 단 하나. 자신 있는 스윙. 그것을 익히기 위해 수천번 휘둘러본다.


포핸드 스윙.


나는 탁구대 앞에서 오른발을 뒤로해 보폭을 조절한다. 중심 이동을 한다. 팔에 힘을 뺀다. 몸통을 돌리면서 스윙한다. 기본 스윙을 하면서 초심을 다잡는다. 두려워도 도전하는 것. 끊임없이 경험을 쌓는 것. 그렇게 구력을 다져 나간다.


낯선 이를 만나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용기. 비단 탁구뿐만이 아니다. 며칠 전 새해가 왔다.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는데 당장 나이부터 받아 들었다. 새로운 나이. 당신 나이가 몇 살이오? 묻는데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다. 다만 탁구에서 배운 점이 있다면,


낯선 나이로 낯선 삶을 살아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용기, 배우고 익혔던 것을 하는 의지, 가 아닐까 싶다.


나는 탁구를 치기 전 기본 스윙을 한다. 중심 이동을 한다.  


그리고 힘을 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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