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룡이배 경남오픈 탁구대회
아침 일찍, 에이스 팀의 차에 타 고성국민체육센터로 왔다.
간밤에 석민 형으로부터 톡이 왔다. 너...... 에이스 팀의 차에 타라고. 에이스 팀은 으레 석민 형 혹은 재형의 '축제' 차로 움직인다. 따라서 축제 차는 곧 에이스 팀을 상징한다. 축제 차를 타고 저녁이 되면 회식자리로 움직이는 게 보통이다. 회식은 상금으로 충당되겠지?
5부 성준 형, 6부 주중 형, 6부 석민 형, 6부 재형까지 이렇게 넷이 에이스 팀원이다. 오늘은 재형 대타로 내가 끼게 되었다. 오는 내내 걱정한 것은 '잘해야 할 텐데~'였다. 나 따위가 감히 이 차에 타도 되는 걸까? 아냐 그래도 기왕 탔으니 내 역할을 해야 한다, 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잘 못하면 에이스 팀원 중 누군가 결원이 생길 때만 낄 수 있게 되리라. 영원한 후보. 영원한 자투리. 4명 중 결원이 생기지 않으면 에이스 팀에 들어가지 못하는 그저 그런 선수. 지금은 비록 후보지만 주전으로 도약하려면 어쨌든 성적이 좋아야 한다, 는 부담이 커지는 아침.
시작은 예선이다.
나만의 '예선탈락' 징크스를 의식하여 미리 알아보지 않았다. 같은 조 선수들이 어떤 성적으로 승급했는지 그리고 최근 대회에서 어떤 성적을 올리고 있는지 따위의 여부를 조회해보지 않았다. 알면 지레 겁을 먹고 겁먹으면 포기가 빠르게 된다. 우리 조는 창원에서 오신 서 선수(40대)와 홈구장 고성 출신인 구 선수(50대) 그리고 진주에서 온 나, 이렇게 모였다. 모두 펜홀더다. 먼저 창원 서 선수와 내가 붙게 되었다. 서 선수는 서브가 다양했다. 안타깝게도 나의 쇼트가 통하지 않았다. 랠리는 길었고 점수가 쉬 나지 않았다. 우리는 조심스레 중진에서 드라이브를 주고받았다. 주로 서 선수가 강타를 때렸고 내가 수비하는 격이었다. 서 선수는 실수가 적었다. 그리고 득점 때마다 파이팅을 외쳤다. 매너가 좋았고 눈빛이 반짝거렸다. 반면 나는 초 긴장 상태에서 겨우 따라가고 있었다. 1세트를 내줬다. 아무래도 질 것 같았다. 지더라도 삼빵은 안된다. 한 세트라도 따자, 라며 이 악물었다. 나는 질 때는 큰 점수차로 지고, 이길 때는 듀스에서 겨우 이겼다. 세트 스코어 1대 1에서 맞이한 3세트. 어느덧 19대 19가 되었다. 듀스의 연속이었다. 승부처에서 중간에 공이 깨져서 심판이 교체하러 갔다.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우와~ 힘들어, 너무 잘하시는 거 아니에요?" 라고 너스레를 떨자 서 선수도 "안 뚫리네요. 저도 힘들어 죽겠어요"라고 푸념했다. 결국 3대 2로 졌다. 어차피 질 거라고 여겼기에 그리 실망하지 않았다. 그나마 2세트라도 따고 져서 다행이었다.
내가 심판석에 앉고 승리한 창원 서 선수와 고성 구 선수가 게임했다. 내심 서 선수가 이겨주길 바랐다. 서 선수가 2연승으로 1위에 가 주면 마지막 게임에서 구 선수와 내가 일전을 벌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일반적으로 예탈을 모면하는 방법이다. 나는 게임 시작 전에 조용히 서 선수에게 "파이팅, 힘내세요"라고 말했다. 서 선수가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당신이 꼭 이겨야 내가 올라갈 수 있어요, 였다. 혹시라도 당신이 지면 꼬인다, 라는 하소연도 있었다. 심판석에 앉아서 고성 구 선수를 희생양 삼아 통과해야지,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바람과는 달리 구 선수는 노련했다. 얼추 오십 대 후반으로 보이기에 동작이 느리겠지, 라고 짐작했는데 짐작과 달리 재빠르고 날렵했다. 구 선수는 이른바 공을 가지고 노는 테크니션이었다. 구력이 긴 펜홀더. 노련한 펜홀더. 내가 제일 싫어하는 유형. 예상 밖의 코스로 흘리기와 코스 빼기가 놀라울 정도였다. 전형적인 펜홀더 손목 돌리기의 선수다. 1세트에서 구 선수가 이겼다. 혼란스러웠다. 이거 큰일 났구나. 구 선수가 더 강하다니? 나는 구 선수보다 약한 서 선수에게도 졌는데, 이제 가장 강한 구 선수와의 일전만 남았다. '예탈'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미쳤다. 모처럼 에이스 팀에 합류했는데 예탈이라니. 역시 안되는구나, 찍히는 일만 남았구나. 영원한 후보가 되겠지. 내가 여기 왜 왔지? 한번 쉬어갈걸. 심판석이 좌불안석으로 변했다. 나 지금 뭐 하는 거지? 날고 기는 선수들이 난무한데 내가 지금 뭐 먹을 게 있다고 여기 있는 거람? 그래, 죽음의 조구나. 나는 왜 이다지도 예선 운이 없을까. 별의별 낙담을 하면서 점수판을 넘겼다. 결국 3대 1로 고성 구 선수가 승리했다. 패한 창원 서 선수는 나름 만족한 표정으로 심판석에 앉았다. 부러웠다. 서 선수는 1승 1패다. 이제 내가 구 선수에게 패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부담스러웠다. 서 선수를 이긴 구 선수가 너무나 커 보였다. 최소 몇십 년은 되어 보이는 구력. 그에 반해 나는 이제 고작 3년 차. 차이가 극명했다.
예상대로였다.
나는 구 선수의 리시브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농락당했다. 백 쪽으로 커트서브를 넣으니 포핸드 쪽으로 확 돌려버렸다. 나는 당연 3구가 몸 쪽으로 올 것을 기다리며 준비했으나 갑자기 포핸드로 빠진 공을 따라가지 못했다. 미치겠다. 예탈인가? 어떤 커트 서브도 통하지 않는다. 넣을 서브가 없다. 무슨 서브를 넣지? 중간 강도의 전진회전 서브를 넣어보았다. 통하지 않았다. 최고로 강하게 전진회전을 먹여 보냈다. 그러자 비로소 내가 받을 수 있는 정도의 공이 넘어왔다. 그때부터 서브를 다양하게 넣는다는 건 다음 세상으로 미루고 줄곧 전진 회전 서브만 넣었다. 힘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쇼트와 코스, 강타로만 대응했다. 하늘이 도왔나? 세트 스코어 2대 1로 이기고 4세트 10대 9에서 한 점만 더 득점하면 끝낼 수 있는 경기를 듀스에서 잡혔다. 절망했다. 5세트에서도 따라가다가 역전, 10대 9에서 이제 한 점만 더, 제발 한 점만 더, 하면서 집중했다. 슬쩍 심판석의 서 선수와 눈이 마주쳤다. 서 선수의 표정이 일그러져있었다. 왜 그러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1점만, 무조건 1점만~ 하고 집중했다. 또다시 전진회전으로 넣어 쇼트로 받고 쇼트를 받아 백으로 쇼트를 밀어 넣었다. 구 선수는 연신 "힘들다, 지쳤다"라고 중얼거리다 "이런~ 손에 맞았다"하면서 공이 공중으로 붕~날아올랐다. 순간 나는 참지 못하고 "아자아~~~~" 하고 소리 질렀다. 커다란 체육관 40여 대의 탁구대. 나는 그 중간쯤에서 경기하고 있었다. 우리 팀 돗자리는 2층 중간 어느 구석에 자리했다. 돗자리에서 김밥을 먹던 우리 구장 사람들이 모두 내 고함소리를 들었다고 나중에 알려주었다. 내가 예선 첫 게임에 고전하는 것을 보고 '아이고, 저러다 예탈 하겠구나' 하고 간식을 먹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다 내 외침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고 했다. 나는 게임이 끝난 직후 심판석에 앉아있던 서 선수에게 "한번 안아봅시다"하고 말하며 팔을 벌렸다. 그러자 서 선수는 순순히 내게 와락 안겼다. 이어서 구선수도 두 팔을 벌리며 다가왔다. 나는 구선수와도 꼭 포옹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내가 말하자 서선수, 구선수도 동시에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답했다. 시계를 보니 10시였다. 8시 30분에 시작한 예선전이 장장 1시간 30분이나 걸린 것이다.
이어서 승점 계산에 들어갔다. 놀랍게도 창원 서 선수가 예탈이었다. 그리고 내가 1등이고 구 선수가 2등이었다. 우리는 몇 번이고 승점을 보면서 확인했다. 구 선수와 나는 서로가 '승자 승'이니 내가 1위, 자신이 2위라고 말했다. 내가 종이 끝에 나 1위, 서 선수 2위, 구 선수 3위로 숫자를 적자, 구 선수가 말하길 "에이, 이럴 줄 알았어, 내가 2등이라니까, 2등으로 적어야지" 하고 자신이 구 선수임을 재차 밝혔다. 나는 웃으며 진행석에 가서 구 선수님이 분명히 2등이라고 말하겠다 하고 종이를 가지고 갔다. 진행석에 가자 진행하시는 분이 종이를 보더니, 구선수가 1위이고 내가 2위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따지자면 구 선수가 3대 1로 이기고 2대 3으로 져서 세트 득실 +1이고 나는 2대 3으로 지고 3대 2로 이겨서 득실이 0이다. 서 선수는 3대 2로 이기고 1대 3으로 져서 득실이 -1이 되는 것이다. 결론은 승자 승이 아니었다.
우리 조는 모두 1승 1패로 물리고 물렸다.
2층 돗자리로 갔다. 나는 열심히 입에 거품을 물며 예선전의 치열함을 설파했다. 슬며시 보니 경진 형과 석민 형의 표정이 어두웠다. 뒤에 들으니 예탈이라고 했다.
나는 곧 본선 1회전에서 무너졌다. 이 날 의아했던 건 과거 비교적 쉽게 상대했던 선수들이 토너먼트 상위 라운드까지 힘차게 치고 올라가는 거였다. 나만 뒤처졌나? 나는 예선부터 피똥 쌌는데 어찌 저들은 저리 쉽게 올라가나? 이상했다. 내가 너무 위축되어 있었나?
오후 단체전에서 나는 롱핌플 5부를 만나 3대 1로 졌다. 이어서 성준 형과 석민 형이 복식으로 나섰는데 패했다. 이로서 단체전 1회전 탈락. 대회를 마치고 5시쯤 차 타고 돌아왔다. 왔는데 아직 바깥이 밝았다. 해가 지지 않았다. 누가 말했다. 오늘 입상도 못했으니 밥은 다음에 먹는 걸로 하죠. 그러자 다들 그러자고 했다.
나는 에이스 팀에서 내 역할을 하지 못했다.
지금에서야 느끼는 건데 차라리 에이스 팀이 아닌 게 더 낫다는 생각도 든다. 관건은 부담이다. 부담스러워서 반드시 이겨야겠다는 생각. 그것이 자신감을 떨어뜨린다. 게임 내내 든 생각. 설마 지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이미 진 것이다. 돌아보면, 까짓 지면 뭐 어때? 하다 보면 질 수도 있는 거지, 라고 마음정리가 된다.
져도 돼. 지면 어때. 지는 게 당연하지. 그냥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 까짓 재밌게 즐기면 되는 거지. 내가 뭐 하는 거람? 괜찮아. 잘하고 있어. 이런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게임이 잘 안 된다.
어쩌면 작은 슬럼프가 아닐까 싶다. 라켓과 러버 조합을 바꿔보고 있다. 하루하루 질때면 라켓이 문제야 하면서 다른 라켓으로 바꾸고 또 지면 러버가 문제야 하면서 다른 러버를 붙인다. 이긴 게임은 의미가 없고 진 게임만 머리에 남는다. 뭐 때문에 졌을까? 실력이 문제일까? 생각이 문제일까? 사람이 문제일까? 다시 러버를 바꾸고 주력 라켓을 바꾼다.
질 수도 있다. 져도 돼. 계속 지다 보면 이기는 날도 있겠지. 그때 그 감을 잘 유지하면 되는 거야. 이기기 위해 오늘도 지러 간다. 그런 마음. 털어 내자. 난 에이스가 아니다. 에이스가 아닌데 에이스처럼 행동해서는 안된다. 에이스가 아닌데 에이스인 양 생각해서도 안 돼. 에이스가 되기 위해서는 에이스가 아닌 나날이 필요한 거겠지. 수많은 나날. 그런 나날의 시작점.
보양분이 되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