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부 초보의 험난한 탁구 체험기
큰일이다. 미친 거 아닌가. 하루하루 대회일이 다가올수록 초조한 마음뿐이었다. 이런 대진표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흡사 운명의 장난 같은 대진. 직전 산청대회에서 나는 사천의 장 형과 예선에서 같은 조였다. 창원 분이 1위를 했고 나머지 한 자리를 놓고서 장 형과 나는 격돌했다. 패배는 곧 예선탈락이었다. 물고 물리며 최종 5세트까지 갔다. 6대 6이었다. 장 형이 득점했는데 심판이 딴청 피우다 내쪽 점수판을 넘겼다. 그러자 장 형을 응원하던 박 형이 "심판! 스코어 반대로 넘겼어요"라고 외쳤다. 나는 힘겨운 상태였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어쩌면 못 본 척했는지도 모른다. 잘못을 정정하는 건 당연하지만, 간절한 심정에 밑바닥까지 내려온 상태에 박 형이 원망스러운 마음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이윽고 9대 9였다. 장 형은 내게 통한다 싶은 비장의 백서브를 넣었다. 첫 서브는 상회전이었다. 나는 백쇼트로 리시브하다가 오버아웃 범실로 10대 9 리드를 허용했고 다음 서브는 너클이었는데 커트로 받다가 붕 띄워주고 말았다. 아~ 탄식과 함께 공은 힘없이 떠올랐고 장 형은 노련한 스매싱으로 정확히 테이블을 강타~ 공을 허공으로 날렸다. 날아가는 공을 망연자실 쳐다보는 그 순간, '예탈'이라는 멍에가 내 이마에 사뿐 내려앉았다. 뒤에서 응원하던 구장 사람들의 허망한 한숨도 어깨에 내려앉았다. 믿기지 않는 순간, 이거 지금 현실? 나 예탈? 이라는 글자가 눈앞으로 지나갔다. 나는 허탈한 얼굴로 장 형께 승리를 축하드렸다. 장 형은 미안한지 "이제 내 서브를 다 들켰네, 다음엔 지겠다"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옆에 박 형도 "야! 미안하다"라며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박 형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우리 구장 사람이었다. 소속은 사천이지만 평일 운동은 진주 우리 구장에서 함께 운동한 사이다. 그래서 자기네 구장소속이자 친구인 장 형을 대놓고 응원한 것이 자못 미안하다는 뜻이다. 나는 웃으며 박 형에게 "너무해요, 너무해"라며 애써 괜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대회에서 다시 장 형과 같은 조에 속한 것이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조편성은 컴퓨터가 무작위로 한다던데. 무작위로 하더라도 최근 같은 조에 묶은 사람을 다시 묶는 게 말이 되냐고? 라고 따지고 싶었다. 그런 경우를 본 적이 없다. 물론 개개인의 사정을 내가 헤아려 조편성을 살피는 게 아니라서 일 년에 열두 번 정도 대회에 참가한다면 두어 번은 만날 수도 있겠다, 라고 생각은 든다. 그런데 나처럼 둘이서 예탈을 두고 사력을 다해 싸워서 한 명은 장렬히 예탈 했는데, 다시 같은 조라니, 것도 연속으로? 이게 말이 돼? 운명의 농간? 만일 또다시 장 형에게 져서 예탈 한다면? 2 연속 예탈도 충격인데 같은 상대에게 치명타를 얻어맞는다? 나는 그 뒤가 또 걱정되었다. 그러면 차후 사천의 장 형, 박 형을 봐도 전처럼 편안히 반가운 인사를 할 수 있을까? 앞에서는 웃고 뒤에서는 쓰라린 마음 분명 남을 텐데 하는 염려. 그리고 주변에서도 수군거릴 테다. 너에겐 장 형이 천적이다. 장 형에게는 안 되는 거다. 장 형이 저승사자다...
한편 이상하게도 작년 겨울부터 우리 구장사람과 장 형이 연속해서 같은 조에 편성되었는데 석민형과, 영삼형이었다. 석민형과 영삼형은 장 형에게 져 예탈 했었다. 그래도 그들은 딱 한 번씩이지 않은가. 나만 두 번 연속으로 장 형에게 패하고서 예탈 한다면 그 창피한 임팩트를 어쩌랴. 두고두고 회자되겠지. 술자리의 먹태처럼 자근자근 씹히리라.
구장 사람들은 내 속도 모르고서 그저 복수의 기회가 왔다라며 웃어댔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들과 같은 조라면 그들이 아무리 강자라도 괜찮을 텐데 하는 원망. 주체측이 미웠다. 나 예탈해도 좋으니 다른 조로 바꿔다오, 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필이면 또 장 형이라니.
거제실내체육관에 도착했다.
들어가 2층 벤치에서 사천 팀을 만났다. 장 형과 박 형이 아는 척을 했다. 박 형이 "야! 너네랑 좀 그만 만나자. 지겹다 지겨워"라며 넉살을 떨었다. 나도 웃으며 "장 형과 연속으로 만나는 저는 어떻겠어요?"라고 응답했다. 그러자 장 형이 빙그레 미소로 바라봤다. 자신 있다는 저 미소. 나는 무너지는 가슴을 안고 1층으로 내려가 돗자리를 펴 자리 잡았다. 배탈이 난 거 같았다. 배탈이 날까 봐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너무 긴장한 나머지 배가 아팠다. 화장실을 갈까? 했지만 화장실에 다녀오면 또 힘이 다 빠져 예선에서 허우적댈까 참기로 했다. 아픈 배를 부여잡고 탁구대로 가 몸을 풀었다.
나는 27조다.
체육관에 테이블이 24개라서 대기석에서 대기했다. 마침내 이름이 불렸다. 거제 분과 장 형과 나. 여기서 꼴등 하면 예탈. 한 번은 용서해도 두 번 연속은 안된다고 생각했다.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거제 분이 양보를 해서 나와 장 형이 먼저 게임하기로 했다. 거제 분의 실력을 잘 모르지만 만일 고수님이라면 장 형을 반드시 꺾어야 예탈을 면한다. 나는 떨리는 맘으로 장 형과 몸 풀고 게임에 들어갔다. 나름 상회전 서브를 많이 넣고 쇼트 싸움에서 정면대결을 하리란 작전으로 붙었는데 그만 1세트에서 11대 6으로 지고 말았다. 절망적이었다. 역시 안 되는 건가. 나는 장 형을 넘을 수 없단 말인가. 벤치에서 행규가 "삼촌! 지금 스윙이 안 올라가요. 평소의 반만 올라가요. 자신 있게 해요"라고 말해주었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떨렸다. 정녕 이것이 나의 한계인가. 멘털이 이다지도 약하다니. 비장한 맘으로 2세트에 들어갔다. 점수가 엇비슷하게 올라갔다. 나는 한점 앞서다가도 한점 내주었고 앞서다가 내주기를 반복했다. 2점 이상 도망가지를 못했다. 그러다 내가 때린 공이 빗맞아 멀리 날아갔다. 그때 행규가 벤치 하기를 "삼촌! 커트 넣고 드라이브해요"라고 말했다. 나는 장 형의 백 쪽으로 긴 커트를 넣었다. 장 형은 짧은 커트를 백드라이브로 묻혀 백쇼트 랠리에 특화된 분이다. 그런데 내가 긴 커트를 주니 커트로 받았다. 앞서 지난 대회에서 장 형이 긴 커트를 못 받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커트로 돌아온 3구에 루프 드라이브를 걸었다. 그러자 장 형의 4구가 오버아웃되거나 찬스 볼이 되었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서브를 커트로 넣어 커트 싸움을 시작했다. 어느 순간 행규는 "그럼 저는 가볼게요" 하고 벤치를 떠났다. 내가 하는 걸 보고 이제 되었다며 안심하고 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커트를 주고 드라이브로 내리 3세트를 따내어 3대 1로 역전했다. 승리하는 순간 "아자~!"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고선 장 형에게 "형님! 매너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다. 장 형은 웃으며 "어딜? 실력으로 내가 진 거지"라면서 축하해 주었다. 나는 "형님! 몸 풀리신 김에 먼저 게임하실래요?"라고 물었고 장 형은 "이긴 사람이 먼저 하는 거야" 하면서 얼굴에 땀을 닦으며 심판석에 앉았다. 체력안배를 위해 내게 먼저 하라고 했다. 나는 아직 예탈의 위기를 완전히 벗어난 게 아니기에 급히 심호흡하며 땀을 닦았다.
이제 거제 분이 상대편에 섰다.
자세히 전적을 살핀 건 아니지만 거제 분도 쉬운 스타일은 아니었다. 몸 푸는 랠리에서 드라이브 파워가 좋았다. 어쩌면 거제 분이 최강자일수도 있다. 내가 거제 분에게 패하고 거제 분이 장 형에게 패하면 세 명이 1승 1패로 물고 물리게 된다. 그러면 내가 지더라도 3대 2나, 3대 1로 져야 했다. 3대 0으로 지면 최종 세트 득실이 마이너스가 되기에 예탈 할 확률이 높게 된다.
드디어 거제 분과 게임을 시작했다.
거제 분이 선공으로 서브를 날렸다. 1구는 길게 하회전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근래 이렇게나 많은 커트양을 본 적이 없다. 이걸 어쩌지? 하다가 나는 루프 드라이브를 걸었다. 그런데 커트량이 많아서 들어 올리기에 부담이 들어 바닥까지 내려가 스윙과 함께 폴짝 뛰면서 걸었다. 뒤에서 벤치 보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너무 높이 뛰는데? 라는 말이 들렸다. 공은 간신히 네트를 넘어갔다. 따라서 내가 그렇게나 점프하지 않는다면 공은 네트행이 될 확률이 높았다. 다행히 루프는 잘 걸렸고 상대 분은 3구를 오버아웃 시키기 시작했다. 벤치에서 거제 사람들이 큰 목소리로 거제 분을 응원했다. 거제 분이 득점할 때마다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큰 점수차로 앞서자 나는 여유가 생겼다. 내가 가진 다양한 서브를 구사하면서 첫 세트를 따냈다. 2세트에서도 거제 분은 나의 루프를 버거워했다. 어느덧 스코어가 10대 0이 되었다. 내 서브 차례였다. 나는 높게 토스를 하고 어색한 연기로 헛스윙을 했다. 슬쩍 벤치 쪽으로 보니 사람들이 '그래도 매너는 있네'하면서 끄덕거리는 눈치였다. 다행이었다. 비교적 쉽게 승리하고 나는 심판석에 앉았다. 홀가분했다. 이게 얼마만의 예선 1위던가. 벤치 쪽에 우리 구장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어떻게 됐어? 라고 물었고 나는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아 웃어 보였다. 감격스러웠다.
이제 사천 장 형과 거제 분의 격돌. 두 분 중 패하는 쪽이 예탈 하게 된다. 예상과 달리 첫 세트를 거제 분이 가져갔다. 거제 분은 커트드라이브를 아주 잘 걸었다. 이제 보니 내가 만일 리시브를 커트로 했다면 3구 커트드라이브를 두들겨 맞았을 것이다. 장 형의 얼굴에 비장함이 흘렀다. 사천 사람들과 박 형이 다가와 장 형에게 코치를 해주었다. 박 형이 내게 "넌 어떻게 됐어?"라고 물었고 나는 기다렸단 듯 빙그레 웃으며 빅토리 표시를 해주었다. "니가 다 이겼어?"라고 박 형이 재차 물었고 난 그렇다고 끄덕였다. 박 형과 사천 사람들은 긴장했다. 거제 분에게 장 형이 져서 예탈 할 수도 있겠구나 라고 생각한 것이다. 장 형은 역시 노련했다. 지난겨울, 장 형이 개인전에서 4강까지 갔던 어느 대회를 나는 옆에서 지켜보았었다. 장 형은 예의 쇼트 파워를 늘려 상대가 공격할 기회를 차단했다. 그리고 3대 2로 역전했다. 내가 1위, 장 형이 2위가 되었고 거제 분이 예선탈락했다.
초보 6부에게는 예선이 곧 결승이다.
예선통과냐 아니냐가 전부다. 그렇기에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구장 돗자리로 돌아갔다. 뿌듯했다. 이제 사천 구장 사람들을 만나도 가볍게 웃으며 인사할 수 있다. 그것으로 족했다. 본선은 그저 덤일 뿐. 우리 구장 남자 6부는 모두 6명이 출전했다. 거기서 3명이 예탈 했고 3명이 본선에 올랐다. 다만 바랄 게 있다면 점심을 먹기 전까지 본선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점심 직전 본선 1회전이 진행되었다. 나는 양산 분이랑 만났다. 양산 분과 시합 전 다른 본선 분들 심판을 먼저 봤는데 나중에 보니 개인전 우승자의 게임이었다. 두 분 다 일펜에다가 오십 대 중반 혹은 후반으로 보였다. 인상적인 건 두 분 다 서브 하나하나가 일품이었다. 서브마다 같은 서브가 하나도 없었다. 전략적으로 회전과 커트와 백서브를 적절히 섞었고 기다렸다는 듯 리턴되는 3구를 냅다 때렸다. 일구일구마다 온몸을 날려 전력을 다해 스윙했다. 두 분의 헉헉거리는 숨소리와 흘리는 땀방울, 진지한 눈빛, 점수가 날 때마다 터지는 한숨과 탄식 그리고 파이팅. 아, 이게 탁구구나 싶었다. 이 정도로 진지한 열정. 이게 곧 실력이구나 하고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나는 본선 1회전에서 1세트를 뺏기고 포기하려다가
건너 건너 영삼 형이 본선 1회전을 이기는 걸 지켜보고서 그래도 어떡하든 해보자 하고 이 악물었다. 나도 해보자 하며 힘냈다. 양산 분은 뒷면이 숏핌플이었다. 때문에 내가 잘하는 백싸움을 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포핸드 싸움으로 극복해야 했는데 어찌어찌 5세트까지 가서야 겨우 승리할 수 있었다.
본선 2회전을 통과하고 3회전에서 익히 알고 있었던 대학생에게 패했다.
단체전에서 롱핌플을 만나 진땀을 흘린 끝에 승리했고 복식까지 치렀다. 복식에서 영삼 형과 호흡을 맞췄다. 먼저 2세트를 헌납했지만 내리 3세트를 따내어 승리했다. 2회전에서는 단식에서 세 명이 패하는 바람에 복식은 하지도 못하고 떨어졌다. 그래도 갓 승급한 우리 멤버가 처음으로 단체전 2회전까지 진출한 의미가 있었다.
이 날의 보람이라면, 팀원 중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형! 이제야 예전 자신 있던 모습이 나타난 거 같아요."
나는 6부로 올라와 처음 몇 번은 상승세로 맞섰지만 이후 고비를 만나 금세 멘털이 무너져 게임에서 허우적거렸다. "형! 탁구 초보로 돌아간 줄 알았어요"라는 말도 들었다. 내가 배운 한 가지, 되든 안되든 자신 있게 플레이하는 거다. 드라이브가 날아오면 수비만 할 게 아니라 맞드라이브를 날려야 한다. 쇼트만 대고 있을게 아니라 돌아서서 회심의 드라이브를 날려야 한다. 탁구대 밖으로 흘러나오는 걸 건드리지 못하고 넘기면 결국 뚜드려 맞는 거다. 길게 끝스윙을 가져가지 못하면 득점하지 못한다. 이 단순한 명제를 이제야 깨닫는다.
나름 좋은 기억으로 거제 대회 후기를 마친다.
ps. 승덕 형 입상과 승급 축하드립니다. 정말 멋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