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천주교 대구대교구장을 지내셨던 이문희 대주교님의 서거 소식을 접하고 나니, 5년 전 대구시민사회에서 교회 쇄신을 위해 활동하던 시기가 생각 났다. 특히 천주교 대구교구는 교구에서 운영하던 '대구시립희망원'으로 인해 장애인 탈시설운동가였던 본인과 직접 부닥쳤다.당시 '가톨릭네트워크'에서 [한국가톨릭교회,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주제로 개최한 토론회에서 본인이 발제했던 글을 가져와 올린다.
지난 2016년 11월 7일 장애인·노숙인 거주시설 대구시립희망원의 운영권이 천주교 대구대교구에서 대구시로 반납되었다. 대구시립희망원을 36년간 운영해 온 대구구천주교회유지재단이 인권유린과 식재료 납품비리 등 의혹이 불거져 국가인권위 직권조사와 검찰 수사 그리고 대구시 특별감사를 동시에 받는 상황에서 온 국민을 충격 속으로 몰아넣은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보도 등 추가 의혹이 잇달아 제기되자 더 이상 정상 운영이 어렵다고 판단한데 따른 것이다.
이번 천주교 대구대교구측의 희망원 운영권 반납은 지난 10월 12일 대구대교구 조환길 교구장과 희망원측에서 사과문을 통해 밝힌 희망원 생활인들인 장애인과 노숙인의 탈시설-지역사회 정착 약속 실천을 비롯해, 사회적 합의를 통해 보다 전향적인 방향으로 희망원 사태가 해결되기를 희망했던 우리 사회의 바램을 짓밟는 처사로 무책임하고 안일하고 아쉬움을 남긴 결정이었다.
하기는 그동안 대구교구와 희망원측에서는 2년 8개월 만에 129명이나 사망했지만, 그것은 죽을 때가 된 사람들이 들어와서 많이 죽었을 따름이고, 인권침해 역시 일부 직원들의 잘못이고, 썩은 사과는 어쩌다 나온 것이고, 횡령은 납품회사가 빼돌린 것으로 자체 감사에서 드러났는데 그것을 가지고 국민의당을 비롯한 정치권과 시민단체나 언론이 부풀려 이야기해 억울하다는 변명만 거듭했다. 심지어 대구교구 정평위에서는 정평위 활동을 하는 신자들에게 희망원 문제와 관련해 활동하는 위원들은 정평위 활동을 그만두라는 결정을 내리기까지 해 교구설정 100주년을 맞아 부활했던 정평위의 취지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대구교구, 한국가톨릭교회는 대구가톨릭교회와 그 밖의 가톨릭교회로 나뉜다 했지만, 이번 희망원 사태도 한국가톨릭교회에서도 가장 보수적이고 관료적인 대구교구의 특성과 대형 거주시설이 지닌 폐쇄성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대구의 <조선일보>라는 <매일신문>을 교구가 소유경영하면서 사제가 사장이 되고, 그것이 관계와 언론계 그리고 교구 사이에 마피아적 커넥션을 만드는데, 이번 희망원 사태에서도 그것이 어김없이 작동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심지어 이중장부 작성 의혹이 있는 회계과장 수녀가 국감의 증인으로 채택되어 그 명단이 언론에 공표까지 되었는데도 대구지역 여당 국회의원이 나서 국회 보사위에서 증인채택을 무산시키겠다는 압력으로 결국 다른 증인으로 교체시켰고, 대구시립희망원 인권유린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린 국민의당을 향해서도 끊임없는 압력이 가해져 왔었다.
하지만 이것이 유독 대구교구만의 문제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한국가톨릭교회에서 보다 탈보수적인 교구라고 여겨졌던 인천교구에서 지난 몇 년간 펼쳐졌던 인천국제성모병원을 둘러싼 갈등이 그 좋은 예라고 본다. 꽃동네를 둘러싼 청주교구, 더 나아가 정진석 추기경을 비롯한 교회권력의 문제점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것은 한국가톨릭교회의 동맥경화증이 어느 특정교구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기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2014년 교황청의 고질병으로 열거한 15가지 질병 목록 곧 성직자 특권의식, 권위주의, 자기비판력 부재, 관료주의, 동맥경화증, 공감력 상실, 사이비 신비주의, 마피아적 이너 서클 파벌 권력, 형식주의, 세속주의, 영적 치매, 실존적 정신분열, 위선적인 이중생활 등 그 가운데 한국가톨릭교회와 무관한 것이 하나라도 과연 있을 것인가. 한국가톨릭 장애인복지사업의 문제점은 바로 한국가톨릭교회의 문제점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물론 한국에서 지난 1세기 동안 복지, 특히 장애인 복지 면에서 한국가톨릭교회가 큰 공헌을 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잿더미로 변해 버린 땅에 교회는 우리 사회를 재건하는 데 버팀목이 되었다. 그런데 1980년대 들어 국민들의 복지 요구가 엄청나게 늘어나면서 정부가 감당을 못하자 이를 민간에 넘겨 정부가 예산을 지원하고 민간이 운영하는 혼합식 위탁이 이뤄졌는데, 당시 이미지가 좋던 천주교에 자연스레 몰렸다. 그리하여 꽃동네와 대구시립희망원 등 대한민국 최대규모 복지시설 운영주체가 모두 가톨릭교회가 되었다. 1년에 희망원으로 지원되는 정부 예산이 100억, 꽃동네는 500억에 이른다. 그렇게 국가 예산을 지원받아 기업화·대형화 되고 정부 지원예산에 집착하면서 예산의 굴레에 묶여 가톨릭 복지 정신이 왜곡되고 고유의 카리타스 정신이 훼손되고 있다. 결국 사람을 수백 명, 수천 명 넘게 수용하는 환경에서 어떻게 인간적인 보살핌이 가능할 것인가. 희망원 사태를 두고 몇몇 직원의 범죄행위는 처벌받아야 하지만, 그 이상의 근본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보는 이유다. 이것은 결국은 대규모 시설이 지니는 구조적 문제라 할 수 있는데, 장애인들이 ‘탈시설’을 외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거기에다 세계적으로 장애인복지의 추세가 사회통합과 자립생활을 지향하고 있는데 아직도 한국의 장애인복지는 대형 수용시설 중심이고 장애인복지 예산의 많은 부분이 거기에 집중되고 있다. 예산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대규모 수용시설들은 장애인들이 사회통합해 자립하는데 국가가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지 못하게 하는 장애가 되고 있다. 이제껏 우리나라 장애인복지에 디딤돌이 되어주었던 가톨릭교회가 시대의 흐름을 쫓아가지 못하면서 걸림돌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러지 않으셨다. 복음사화 그 어디에도 그분께서 장애인들을 시설에다 모아놓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며 자선사업을 펼쳤다는 이야기는 없다. 심지어 물고기를 잡아 세금을 바칠지언정(마태 17,24~27) 자선금을 내신 적은 없으셨다. 오히려 예수는 그 시대에 격리되고 소외당한 장애인들을 찾아가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여주는 것을 복음선포와 함께 자신의 핵심 과업으로 삼으셨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되찾는 이야기에서 드러나듯이 예수운동은 소외된 이들을 이스라엘공동체 안으로 불러들이려는 공동체 복원 작업이었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내 백 마리 양떼가 함께 모여 있어 소외된 이가 없는 사회공동체를 그분은 하느님나라라고 하셨다. 요즘말로 하면 복지공동체다. 꽃동네 창설자 오웅진 신부 한 사람만 이름이 남고, 수천 명의 장애인들은 이름도 없이 살다 죽어가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복음서에는 자캐오, 라자로, 바르티매오 같은 숱한 장애인들과 예수의 인격적 만남 이야기들로 넘쳐난다.
그런데 교회와 성직자들이 장애인복지를 격리수용하는 자선사업으로 왜곡시켜온 것이다. 대규모 수용시설에 장애인들을 가둬놓고 그들의 사회통합을 가로막는 꽃동네 방식은 예수의 복지 정신과 그 실천적 모범에도 어긋나는 반(反)예수적 장애인복지라 아니 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흐름은 콜카타의 성녀 마더 데레사의 사랑의 선교회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 가톨릭만의 문제는 아니다. 2천 년 교회의 전통적 사회복지 정신이었던 것이다.
이런 왜곡의 뿌리는 어디인가. 바로 장애인복지와 자선사업의 잘못된 조우에 있다. 초대 그리스도교회 이후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되면서 신자로 대거 들어온 귀족 상류층들에 의해 자선행위가 나름의 예수 가르침을 실천하는 신앙행위로 여겨지면서 자선사업이 교회 내에 자리 잡게 된다. 그 자선사업이 제도화되고 자선 대상이 장애인이 되면서 왜곡되고 오도된 자선사업과 장애인복지가 결합하는 잘못된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미 2~3세기만 되면 사회통합을 지향했던 예수의 장애인관은 사라지고, 자선기관들이 필수사업인양 각 교구마다 들어서고, 주교들은 신자들에게 자선을 구원과 연결시켜 권장한다.
이러한 그리스도교회의 자선 위주의 편향된 장애인사업 방식과 장애인관은 치유행위에서 드러난 예수의 장애인관에 대한 교회구성원의 잘못된 해석과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후 자선은 2천년 가까이 그리스도교 장애인복지의 기본 틀로 굳어져 버렸다. ‘교회가 있는 곳에 장애인사업이 함께 한다.’는 말이 있듯 비록 교회가 그동안 인류복지에 기여한 바가 지대하고, 또한 비록 시대적 역사적 불가피한 측면과 원인들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장애인사업에서 장애인당사자는 주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 사업의 피동적 수혜자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할 따름이었다.
따라서 교회는 예수처럼 사회정의 실현을 통한 공동체 회복에 나서야한다. 신자유주의로 인해 공동체가 붕괴되면서 파편화 되어버린 개인, 갈수록 심화되는 빈익빈 부익부 양극화의 비인간적인 현실, 비정규직 문제에서 나타나듯 더욱 교묘해지고 정교해지면서 민중의 삶을 옥죄는 비인간적이고 반공동체적인 장치들이 산재하는 사회현실은 교회 복지사업에도 새로운 부르심으로 다가오고 있다. 새로운 사태의 도전 앞에서 교회 복지사업은 복음 원칙인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우선적 관심을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실천할 기회를 다시 맞고 있다. 교회의 정체성 그 신원을 회복할 기회가 온 것이다. 교회의 처지는 늘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마르 1, 38)는 예수의 말씀 그대로여야 한다.
마침 지난 5월 17일, 세계 각국 천주교주교회의 산하 사회복지 담당기구인 카리타스들의 연합체인 국제카리타스(Caritas Internationalis) 제20차 총회에서 로메로 대주교가 이제까지의 수호자 성 마르티노 데 포레스와 콜카타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공동 수호자로 추대되었다. 교회의 이런 변화를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리스도교회의 사회복지가 마더 데레사로 상징되는 시혜적 복지에서 한 걸음 진보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까닭이다.
기존의 그리스도교회의 사회복지‘사업’에 익숙한 이들은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을 하다 암살당한 로메로 대주교가 사회복지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의아해할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꽃동네에서 “자선사업에서 나아가 인간 성장과 인간 증진을 도모하라”고 강론했는데, 바로 로메로 대주교야말로 인간 성장과 인간 증진을 도모하는 삶을 살다 순교 당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로메로 대주교를 통해 사회정의를 세우기 위한 투쟁이 카리타스 영역으로 들어온 것은 의미 깊다. 이제껏 교회는 사회정의를 광야의 소리로만 외쳐왔었는데, 이젠 사회복지분야에서도 교회가 사회정의 실현 위한 투쟁에 나서야 하고 예수께서 그리하셨듯이 빈익빈 부익부를 낳는 구조악과 실제로 싸워야한다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을 옹호하며 정의와 해방을 촉진시킨 로메로의 거룩한 삶을 카리타스가 모범으로 받아들인 것은, 교황이 앞에서 언급한 대로 교회의 실체인 카리타스, 그 교회의 심장 한 가운데에 복자 로메로의 삶이 자리 잡은 것이 된다. 동시에 그것은 지난 2000년 동안 그리스도교 사회복지가 잃어버렸던 예수의 마음, ‘구조 혁파를 통해 소외된 이들을 사회로 통합시켰던’ 그 복지 마인드를 다시 되찾았다는 소중한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황청의 정의평화평의회, 사회복지평의회, 이주사목평의회, 보건사목평의회를 합쳐 “인간발전성”을 만든 것에서도 확인된다.
2천 년 전 나자렛 사람 예수에 의해 치유 현장에서 실천되어졌던 통전적인 영육일원론의 장애인관이 현재 전세계 장애인운동의 새로운 흐름인 자립생활패러다임과 근본적으로 상통한다. 예수 시대 이후 자선 위주로 넘어간 교회의 장애인사업으로 인하여 오랜 기간 사라졌다가, 반세기 전에 자기 삶의 주인이 되려는 장애인당사자들의 자립생활운동을 통하여 비로소 찾아진 장애인관이 예수에 의해 실천되었던 바로 그 장애인관이었던 것이다.
이제 교회도 대규모 시설 위주의 장애인사업을 지향하고, 지역사회와 함께 살아가는 소규모 생활시설이나 이용시설이 그리스도교 장애인사업의 본 얼굴이요 주류가 되어야할 것이다. 교회 장애인복지 사업 주체들도 장애인사업의 권리주체요 당사자인 장애인들과 파트너쉽 차원에서 연대하고 그들의 권리와 삶에 대한 자기결정권과 자기선택권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특히 자립생활 실현을 위한 탈시설 전환에 교회의 이제껏 쌓아온 풍부한 물적 인적 복지자원을 투신해야할 것이다.
한국 장애인복지사업을 움켜쥐고 있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장애인 당사자들의 반감이 높아져만 가고 있다. 세월호와 한진중공업, 쌍용자동차 투쟁 시위현장에는 사제들이 나서면서, 장애인들이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며 투쟁하는 시위현장에는 사제들이 보이지 않는가. 장애인 ‘특수사목’ 사제들은 어찌하여 죄다 복지시설의 시설장으로만 있는가. 지금 이 시대 예수께서 오신다면 그분은 어디로 가실 것인가. 시설장일까. 시위 현장일까.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예수께서는 시위 현장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교 장애인사업의 미래는 여기에 있다고 본다.
그럴 때 희망원은 어찌할 것인가.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6월 12일 장애인과 병자들을 위한 자비의 특별희년 주일 강론 “병자와 장애인들을 보이지 않는 곳에 숨기거나 수용소에 가두지 말고 사회에 함께 살도록 하라”는 권고대로만 하면 된다. 희망원 사태의 근본 원인이 여기에 있고, 그 해결책도 여기에 있다. 희망원 사태는 그들을 사회에서 배제하려 격리시키는 우리 사회의 반공동체적 가치관이 문제의 핵심이다. 수천 명이 넘는 규모의 대형수용시설을 누가 만들었는가. 보고 싶지 않는 사람들을 보이지 않는 곳에 격리해 배제시키고자 했던 우리가 만들었다. 그것은 꽃동네와 희망원 및 형제복지원 같은 대형수용시설들이 급성장한 시기가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외국인들에게 부끄럽다’며 부랑인들을 마구 잡아 가두던 때인 제5공화국 전두환 대통령 시대인 것만 봐도 그러하다.
따라서 희망원 사태의 궁극 해결책도 당연히 잃어버린 공동체 정신을 회복해 수용시설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우리 사회가 다시 껴안는 것뿐이다. 지금 우리나라 예산 총액은 500조에 이를 만큼 천문학적 규모다. 우리 사회가 그들을 껴안기로 마음만 먹는다면 그들의 사회통합은 불가능한 일이 결코 아니다.
자비의 특별희년이 저물어간다. ‘하느님의 자비로 들어가는 문’을 상징하며 희년 동안 열렸던 성 베드로 대성전, 라테라노 대성전, 성모 대성전, 성 바오로 대성전 등 로마의 4대 대성전의 문들은 다시 닫힐 것이다. 하지만 세상을 향한 교회의 자비로운 마음의 문은 결코 닫혀선 안 될 것이다. 우리의 문은, 교회의 문은, 닫힌 세상을 향해 더욱 활짝 열려져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