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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중규 Apr 14. 2021

문재인 정권에서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졌는가

스티븐 레비츠키의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를 읽으며


스티븐 레비츠키(Steven Levitsky)와 대니얼 지블랫(Daniel Ziblatt)의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


저자는 트럼프 대통령을 분석하기 위해 썼지만, 이 책을 읽으며 우리가 자연스레 연상하는 것은 신기하게도 문재인 정권과 작금의 정치 현실이니, 그야말로 절묘한 타이밍의 발간이다.


책소개글의 첫 문장부터가 그러하다.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투표장에서 붕괴한다. 서로 적대하는 정당, 양극화된 정치, 파괴되는 규범, 선출된 독재자..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다분한 극단주의 포퓰리스트들이 어떤 조건에서 선출되는지, 선출된 독재자들이 어떻게 합법적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지..‘후보를 가려내는 역할을 내던진 정당’, ‘경쟁자를 적으로 간주하는 정치인’, ‘언론을 공격하는 선출된 지도자’ 등 민주주의 붕괴 조짐을 알리는 명백한 신호들..결과적으로 민주주의를 지키는 건 헌법 같은 ‘제도’가 아니라 상호관용이나 제도적 자제와 같은 ‘규범’..선출된 독재자들이 부상하며 민주주의가 쇠퇴하는 이 시점"


이 모든 것이 한 마디도 어긋남이 없이 지금의 우리 정치 현실을 그대로 그려주고 있지 않은가.



특히 "민주주의를 지키는 건 성문화되지 않은 규범이고, 그 가운데서도 핵심 역할을 하는 건 ‘상호 관용(mutual tolerance)’과 ‘제도적 자제(institutional forbearance)’다. 상호 관용은 자신과 다른 집단과 의견도 인정하는 정치인들의 집단 의지를 뜻하며, 제도적 자제는 주어진 법적 권리를 신중하게 행사하는 태도를 뜻한다. 둘 모두 언뜻 보면 매우 당연한 개념인 것 같지만 이 규범들이 무너질 때 민주주의도 함께 허물어진다."는 주장은 나 역시 평소에 생각하는 민주주의 사회의 그림으로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적대적 진영정치에 짓눌린 우리의 정치에서 언제쯤 이러한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의 정치'를 볼 수 있을 것인가.


저자들이 그토록 염려하던 트럼프도 대통령에서 물러났지만, 야당은 내년에 문재인 세력의 재집권을 막고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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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민주주의는 유사한 방식으로 무너진다”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가 보내는 경고신호


잠재적 독재자는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선출된 독재자는 어떤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며, 독재자가 집권하기 전까지 어떤 징후들이 나타날까? 이 책의 저자들은 세계 여러 나라의 경우를 비교한 끝에 민주주의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과정을 거쳐 무너졌음을 발견했고, 몇 가지 신호를 패턴화했다.


-잠재적 독재자를 감별하는 네 가지 신호


많은 독재자는 권력을 쥐기 전에 독재 조짐을 드러낸다. 히틀러와 차베스는 무장봉기를 일으켰던 적이 있고, 무솔리니는 의회를 대상으로 한 폭력에 가담했다. 하지만 모든 독재자가 이런 두드러진 특징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민주주의 규범을 성실히 따르다 나중에 본색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 책의 저자들은 잠재적인 독재자를 감별할 수 있는 네 가지 경고신호를 개발했다. 말과 행동으로 민주주의 규범을 거부하는가, 경쟁자의 존재를 부인하는가, 폭력을 용인하거나 조장하는가, 언론의 자유를 포함하여 반대자의 기본권을 억압하려 드는가. 주로 포퓰리스트 아웃사이더 정치인들이 이에 해당하며, 책에는 더 구체적인 항목의 독재자 감별법이 제시되어 있다.


-심판 매수, 비판자 탄압, 운동장 기울이기


선출된 독재자는 심판을 매수하고, 비판자와 경쟁자를 탄압하며, 운동장을 기울인다. 이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기에 시민들 다수가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쉽게 알아채지 못한다. 심판 매수는 주로 공직자나 비당원 관료를 해고하고 측근을 임명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헝가리 빅토르 오르반 총리의 경우 검찰과 감사원, 헌법재판소 등을 친 여당 인사로 채워 넣었다. 다음으로 비판자와 경쟁자는 입막음을 당한다. 에콰도르의 라파엘 코레아는 일간지 〈엘 우니베르소〉가 자신을 ‘독재자’로 칭하자 4천만 달러의 명예훼손 소송을 걸어 승소했고, 터키의 에르도안과 러시아의 푸틴은 법률을 활용해 각각 자신에게 비판적이고 야당에 우호적인 언론 대기업 도안 야인과 NTV 소유주에게 거액의 벌금을 부과하는 등의 방법으로 경영권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한발 더 나아가 독재자는 게임의 규칙을 바꾼다. 저자들은 말레이시아와 헝가리의 게리멘더링, 미국에서의 흑인 선거권 제한 등을 사례로 제시한다.


-무조건적 반대, 권한 남용, 반국가 세력 낙인 찍기


칠레에서 좌파 아옌데가 집권했을 때, 처음부터 우파 진영은 그를 끌어내리는 데 혈안이 되었다. 자신의 사회주의 정책을 제대로 펼 수 없게 된 아옌데는 의회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 직속 권한으로 법안을 통과시키려 했고, 야당이 다수였던 의회는 아옌데가 임명한 장관들을 해임했다. 아옌데의 측근들은 야당을 ‘파시스트’ 또는 ‘국민의 적’이라고 불렀으며, 야당은 아옌데 정부를 ‘전체주의 정권’이라 불렀다. 서로를 적대하며 극단의 대립과 혼란으로 치달은 끝에 군부가 등장해 17년 동안 칠레를 지배했다. 저자들은 미국에서도 오랜 시간 동안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에 이와 유사한 대립이 있었음을 보여주며, 미국 민주주의가 위험에 처했다는 신호가 진작부터 존재했음을 말한다.


잘 설계된 헌법이 민주주의를 지킨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건 제도가 아닌 규범이다


한 설문조사에서 미국인들의 85퍼센트가 ‘헌법’이 지난 세기 동안 미국이 번영할 수 있었던 핵심 기반이라고 응답했다. 실제 균형과 견제를 바탕으로 한 미국 헌법 체계는 지도자가 권력을 함부로 독식하거나 남용하지 못하도록 설계되었고, 대체로 잘 작동되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아무리 잘 설계된 헌법이라도 민주주의를 지킬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이 책에 나오는 민주주의 붕괴를 경험한 유럽과 중남미 여러 나라에는 미국 헌법과 크게 다르지 않은 훌륭한 헌법이 있었으며, 미국 민주주의 역시 트럼프의 당선으로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두 저자에 따르면 민주주의를 지키는 건 성문화되지 않은 규범이고, 그 가운데서도 핵심 역할을 하는 건 ‘상호 관용(mutual tolerance)’과 ‘제도적 자제(institutional forbearance)’다. 상호 관용은 자신과 다른 집단과 의견도 인정하는 정치인들의 집단 의지를 뜻하며, 제도적 자제는 주어진 법적 권리를 신중하게 행사하는 태도를 뜻한다. 둘 모두 언뜻 보면 매우 당연한 개념인 것 같지만 이 규범들이 무너질 때 민주주의도 함께 허물어진다. 저자들은 스페인 좌파 공화당과 우파 세력 간의 대립 끝에 일어난 내전을 규범 파괴로 인한 민주주의 붕괴의 대표적인 사례로 제시한다. 무엇보다 트럼프의 당선 역시 민주주의를 지켜오던 두 규범이 무너지면서 정치 양극화가 극단으로 치달은 끝에 만들어진 결과임을, 200년 미국 민주주의 역사 속 규범의 형성과 정착, 파괴 과정을 통해 생생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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