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신자인 나는 늘 한국천주교회를 연 초대 평신도들 가운데 정약현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형제 집안을 주목하고 있었다. 성리학 세상 조선사회에서 명망 높은 사대부 집안의 학자들인 그들이 어떻게 서학과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는가. 학문적 호기심도 있었겠지만, 새로운 세상에 향한 갈망이 그들을 거기로 이끌었으리라.
그들로서도 자신들의 투신이 후대엔 순교자로 불리는 희생자들까지 집안에서 나오게 만들 줄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념은 어느덧 신앙이 되고 그로인해 멸문지화의 시련을 겪어가면서 배교자(정약용)가 되었든 유배자(정약전)가 되었든 순교자(정약종)가 되었든 그들 형제들은 모두 조선에다 새로운 세상의 빛살을 비추어주는 선구자들이 되었다.
몇 년 전 서울로 올라오고 난 뒤, 한번은 성지순례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던 곳이 그들이 태어나고 자란 남양주에 위치한 마재마을이었던 것도 그들의 그 마음을 만나고 싶었던 까닭이었다.
그러다 그들의 삶을 다룬 영화 <자산어보(玆山魚譜, 2021)>가 상영된다기에 반가운 마음에 시간을 내어 삼성동 메가박스 코엑스를 찾아갔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순교자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를 성인으로 모시고, 학계에서는 <목민심서(牧民心書)>의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에 관심을 집중하는 데에 비해, 다소 덜 주목받고 있던 정약전(丁若銓)의 삶을 다룬 이준익 감독이 무엇보다 고맙기만 했다.
영화는 순조 1년인 1801년, 신유박해로 정약종이 참형으로 순교한 후, 배교의 과정까지 밟았지만 유배당해 각기 흑산도와 강진 유배지로 떠나는 정약전 정약용 형제의 기나긴 여정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같은 유배자이지만 두 형제는 흑산도와 강진의 지형만큼 다른 길을 걸어 나갈 것이었다.
하지만 민중들에 눈길을 두는 삶으로 유배생활을 가득 채운 것에선 두 형제는 같았다. 거기에서 그들 집안이 어찌하여 천주교에 몰입하게 되었는지 이해가 된다. 정약전이 <자산어보> 쓰는데 도움 주었던 흑산도 출신 청년 어부 창대가 “사대부 어른께서 <목민심서> 같은 책은 짓지 않고 어찌 <자산어보> 같은 쓰잘머리 없는 책이나 쓰십니까?” 질책하자 던지는 고백 “양반도 상놈도 없고 임금도 필요 없는 세상”이야말로 그 당시 반상사회(班常社會)였던 조선에서 깨어있는 사대부들과 민중들이 천주교로 눈길 돌린 이유였던 것이다.
물론 그 당시 유럽에서 중국을 거쳐 들어온 현실 교회가 그러했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성경을 비롯한 천주교 가르침이 그런 세상을 가르쳤고, 도탄의 늪에 빠져 있던 조선의 민중들은 거기에서 해방구를 보았고 새로운 세상을 그리고 꿈꾸었던 것이다. 당시 천주교인들은 그 가르침대로 살고자 계급과 성별을 뛰어넘어 하나를 이루는 공동체를 이루었다. 거기에 이들 정씨 형제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애씀은 대규모로 자행된 무자비한 박해를 받으며 수만 명의 희생자(순교자)들만 낳고서 결국 사회변혁의 동력은 상실하고 만다.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반상 타파를 외치며 불길처럼 일어났던 동학농민혁명은 다시 1세기가 더 지나서였다.
영화는 흑산도 유배 중인 정약전의 삶과 강진에서 역시 유배 중이면서 간간이 소식을 전해오는 정약용의 삶을 대비시키며, 영화 사이사이 나오는 “주자(朱子)는 참 힘이 세구나!”는 탄식처럼 성리학이 지배하던 조선사회에서 실사구시를 추구했던 실학자들의 고민을 담아내고 있다.
두 형제는 정약용의 시 애절양(哀絶陽)이 표현한대로 백성의 피를 빨아먹는 탐관오리의 사회,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의 삼정문란(三政紊亂)으로 수탈 착취당하는 민중들의 밑바닥 삶을 유배지에서 목도하고서 충격을 받고 분노한다. 유배생활 내내 그 참담한 현장을 결코 외면하지 않고 그들 편에서 사회혁신의 길을 끝없이 모색하는 모습은 지금 우리 사회의 리더들이 배워야 하는 자세가 아닌가.
하지만 현실 혁파 방식에서 두 형제는 달랐다. 정약용이 근본 해결책으로 탐관오리들을 척결하고 나라의 질서를 다시 바로 세우면 되리라 보고 <목민심서>를 지었다면, 정약전은 거기서 더 나아가 아예 민중들 스스로 깨어나 빈곤에서 탈피해 자립하게 되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실용 서적 <자산어보>를 지었다.
1814년 완성한 어류학서 <자산어보>는 흑산도 연해에 서식하는 물고기와 해양생물 등을 채집해 명칭, 형태, 분포, 실태 등을 기록한 서적으로, 그림 없이 세밀한 해설로 수산 생물의 특징을 서술해 해양 자원의 이용 가치는 물론 당시 주민들의 생활상까지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민중들의 삶의 질을 높이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영화는 ‘목민심서의 길’과 ‘자산어보의 길’ 사이를 넘나드는 창대의 방황을 통해 어느 길이 궁극의 해결책인가를 관람객들에게 넌지시 던지며 묻고 있다. 정약전과 함께 <자산어보>를 짓고 있던 창대는 더 큰 세상을 꿈꾸며 정약전을 떠나 정약용 문하생으로 들어간다. 목민관이 된 창대는 탐관오리들 틈에서 ‘목민심서의 길’을 실천하려 분투했지만, 조선 후기 관료사회의 뿌리 깊은 부패 앞에 결국 좌절하게 되고, 다시 ‘자산어보의 길’을 찾아 흑산도로 귀향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정약전은 하늘나라로 떠난 뒤, 창대는 스승의 영정 앞에서 통곡한다. 거기서 “학처럼 사는 것도 좋으나 구정물 흙탕물 다 묻어도 마다않는 자산 같은 검은색 무명천으로 사는 것도 뜻이 있지 않겠느냐”는 정약전의 말이 가슴을 친다.
같은 민중을 향한 사랑이었지만, <목민심서>가 목민관들을 향해 ‘민중들을 위하라’는 선의의 마음에 호소한 것이라면, <자산어보>는 민중들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유복하게 만들어 자립하도록 하는 길을 선택했다. 어쩌면 정약용이 개량주의적 개혁을 꿈꾸었다면 정약전은 보다 근본적인 혁명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정약전의 마음에서 널리 백성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 정신 그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면 지나친 것일까.
영화는 이 현란한 칼라시대에 무성영화시대 같은 무채색 흑백필름으로 제작되어 마치 담백한 수묵화 그림 한 편을 감상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조선의 빛깔, 푸른빛 고려의 청자가 아닌 흰빛의 질감을 뿜어내는 조선의 백자는 오히려 검은빛 여백을 배경으로 더욱 도드라지는 것 아닌가. 민중들의 질박한 삶을 표현하는데 흰빛과 검은빛 외 더 마땅한 것이 또 어디 있을 것인가. 영화는 끝나고 엔딩 크레딧 시간, 정약전의 얼굴이 어느덧 창대 가거댁 복례 창대모 등과 어울려 자막과 함께 내 가슴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