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집안의 혼이 서려 있는 남양주시 마재성지 성가정성당 순례 2021.5.6. 오후3시.
마재
성 정하상(丁夏祥, 바오로)과 성 정정혜(丁情惠, 엘리사벳) 남매의 탄생지이며, 정약전(丁若銓)·정약종(丁若鍾, 아우수스티노)·정약용(丁若鏞, 요한) 형제의 고향이기도 하다. 마재가 한국 천주교회사와 관련되기 시작한 시기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 이전부터이다. 이곳에 살던 나주(羅州) 정씨(丁氏) 집안의 후손들은 18세기 후반부터 집안에 보관되어 있던 한역(漢譯) 서학서(西學書)를 읽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정약전은 1779년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의 주도로 열린 주어사(走魚寺:경기 여주시 금사면) 강학회(講學會)에 참석하여, 이벽(李檗, 요한)으로부터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게 되었다. 또 1784년에는 마재를 방문한 이벽이 정약전·정약용 형제와 함께 배를 타고 상경하면서 천주교 교리에 대해 토론하기도 하였다. 정씨 형제 중에 특히 정약종은 교리 지식에 해박하였으며, 주문모 신부에 의해 명도회(明道會) 회장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1800년 양근(楊根) 지방의 박해로 마재에서 서울로 피난하였으며, 이때 정약종의 처인 유(柳) 세실리아와 자녀인 정하상, 정정혜가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로 정약종과 아들인 정철상(丁哲祥, 카롤로)이 순교하자 정약종의 유족들은 5촌 조카의 도움으로 다시 마재로 돌아왔으나, 친척들의 냉대로 극도의 빈궁 속에서 어려움을 겪어야만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정씨 일가족은 꾸준히 신앙을 키워 나갔으며, 1814년에 상경한 정하상은 1816년부터 조선 교회의 재건과 성직자 영입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 후 정하상이 마재에 있던 어머니와 여동생을 서울로 오게 함으로써 이들 일가는 마재를 떠나게 되었다. 정약용선생 형제와 집안 정약용 선생의 아버지 정재원(丁載遠, 1730~1792)에게는 세 부인 사이에 모두 5남 5녀의 10 남매가 있었다. 큰 아들 약현(若鉉)은 24세로 요절한 의령 남씨(1729~1752) 소생이며, 둘째 부인 해남 윤씨(1728~1770)에게서는 약전, 약종, 약용과 이승훈에게 시집간 누이 등이 있었다. 윤씨가 세상을 뜬 후 김화현의 처녀 황씨를 첩으로 삼았으나 요절 해 버리자 1773년 다산이 12살 되던 해에 서울에서 20세의 김씨(1754~1813)를 데려왔다. 이 분이 정약용 선생이 장가들 때까지 손수 부스럼이나 종기를 치료해 주고 친어머니처럼 보살펴준 서모 김씨로 형제 중에서 정약용 선생과 특별히 정이 돈독하였다. 김씨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내 김의택(金宜澤)의 딸로서 슬하에 삼녀 일남(약황) 을 두었는데 큰딸은 채제공의 서자인 채홍근(蔡弘謹)에게 다음은 나주목사를 지낸 이인섭의 서자 이중식(李重植)에게 시집갔다. 정약용 선생의 집안은 혼맥으로 이익 계열의 학통을 계승하였는데 이는 자연스럽게 정약용 선생 일가가 천주교와 관련을 맺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 정약용 선생에게 천주학을 가르쳐주었을 뿐만 아니라 학문적·인간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끼쳤던 광암(曠菴) 이벽(李檗, 1754~1786)은 정약용 선생의 맏형인 정약현의 처남이니 정약용 선생과는 사돈간이다. 정약용에게 하나밖에 없는 누이는 조선 최초의 영세 교인인 만천(蔓川) 이승훈(李承薰, 1756~1801)에게 시집갔고 정약용 선생 자신은 이승훈의 누이를 며느리로 맞아들이니 이승훈은 정약용에게 매부이자 사돈지간이 된다. 한편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종손인 이가환(李家煥)은 이승훈의 숙부가 된다. 또 백서(帛書)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黃嗣永, 1775~1801)은 정약용의 조카사위이다. 16세 때 진사시에 장원급제한 수재인 황사영이 정약용의 맏형인 약현의 딸(丁命蓮)에게 장가들었다. 황사영은 중국인 신부 주문모에게 영세받고 알렉산드로라는 교명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열일곱 어린나이에 진사에 합격해 임금의 사랑을 받았지만 천주교에 심취해 서울에서 교리서를 등사하며 나이 많은 교우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1801년 신유사옥(辛酉邪獄)때 수배되었지만 토굴에서 지내며 흰 명주에 조선교회의 박해상황을 알리고 서양제국의 구원을 요청하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북경에 있는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어 그해 11월 능지처참을 당한다. 이때 황사영의 어머니와 부인은 각각 거제도와 제주도로 쫓겨가 여종살이를 해야했고 세 살짜리 아들까지 추자도 에 버려졌다. 이로 인해 경상도 장기에 유배되어 있던 정약용은 서울로 압송되어 취조를 받았으나 관련 사실이 드러나지 않아 극형은 면하였으나 형 약전은 흑산도로 자신은 강진으로 유배되는 신세가 되었다. 정약용 선생이 한 배에서 태어난 형제의 연(緣)뿐 아니라 지기(知己)까지 되어준 유일한 사람으로 말 할 정도로 학문적으로나 인간적으로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고 깊게 교류하였던 손암(巽菴) 약전(若銓)은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흑산도로 유배되었다가 끝내 해배되지 못하고 그의 나이 59세인 1816년 유배지에서 죽었다. 1801년 11월 하순 귀양길에 나주 율정점(栗亭店)에서 눈물로 헤어진 후 16년 동안 한번 보지 못하고 죽은 형을 다산은 형의 묘지명에서 정밀한 지식과 식견을 펼치지 못하고 먼 바다 속 풀집에서 귀양살다 죽었다고 가슴 아파하였다. 정약용 선생의 손윗 형인 정약종은 1801년 신유사옥때 옥사하였다.1795년 이승훈과 함께 청나라 신부 주문모를 맞아들여 최초의 전도회장으로 천주교 전도에 힘쓰다 4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형 약전과 막내(정약용)이 천주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하며 나라의 엄혹한 탄압에도 끝까지 배교하지 않은 약종의 아들 철상 (哲祥), 하상(夏祥), 딸 정혜(貞惠) 역시 천주교로 인해 요절하였다.